템빨 65권 - 20화
“마리로즈를 만나러 가겠다고? 흠... 네 마음대로 해라.”
딱히 허락을 구할 의도는 아니었다.
다만, 브라함에게 알리지 않고 마리로즈와 접선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괜찮아요?”
그리드는 브라함의 격한 반응을 예상했었다.
브라함 입장에서 마리로즈는 철천지원수.
굳이 그녀와 만나겠다는 자신에게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브라함은 의외로 냉정했다.
“괜찮지 않을 건 뭐냐? 네가 누구를 만나서 뭘 하든 너의 자유인 것을. 설령 네가 마리로즈와 붙어먹을지언정 아무 상관없다.”
“부, 붙어먹는다는 표현은 좀... 애초에 전 걔한테 관심이 없어요.”
혹 누가 들을까, 주변 눈치를 살피며 손사래 치는 그리드였다.
청순하면서도 요염한 마리로즈.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미(美)의 비율을 자랑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그리드의 취향이 아니다. 미모가 너무 완벽한 까닭에 도리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고,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애초에 그리드에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들과의 관계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새로운 여자에게 눈을 돌린다? 천하의 개새끼가 아닌 이상 그럴 순 없다.
“협력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만.... 무슨 뜻으로 받아들인 거지?”
“험험, 마리로즈와 우호적으로 가도 괜찮은 겁니까?”
민망해서 헛기침한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브라함이 반문했다.
“너의 목적이 뭐냐?”
목적?
당연히 잘 먹고 잘 사는 거다.
가족과 동료들, 그리고 백성들이 평화 속에 행복하길 바란다.
그 궁극적인 비원을 이루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들은....
“지옥에서는 대악마들을 멸하고, 동쪽에서는 사신들을 돕고, 천상에서는 헥세타이아를 구하는 겁니다.”
“그중 대악마를 멸하는 것. 그것은 나의 바람이자 마리로즈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의 목적에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이상 잠시 손을 잡아도 나쁘지 않다. 대의 앞에서 개인적인 감정은 사치일 뿐이니.”
마법사란 지극히 이성적인 족속이다.
브라함 본인이 스스로를 ‘뱀파이어’가 아닌 ‘마법사’라고 자각하는 이상 마리로즈에게 품은 원한 따위 얼마든지 뒤로 미룰 수 있었다.
그리드는 카심을 떠올렸다.
템빨국의 미래를 위해서 제국에의 원한을 삼킨 사내...
카심도, 브라함도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음....”
이제 로드는 바르바토스의 시야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지상에 닿을 기세로 내려앉은 하늘을 등지고 선 채 브라함과의 대화를 떠올려본 그리드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녀오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마리로즈와의 만남은, 인연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앞으로 어차피 얽혀야한다면 기왕지사 좋은 관계를 맺어야한다.
무엇보다 브라함은 마리로즈를 만나러 가겠다는 그리드를 걱정하지 않았다.
마리로즈의 성격을 잘 아는 브라함이 봤을 때도, 마리로즈가 그리드에게 위해를 끼칠 가능성은 희박하단 뜻이다.
“전하.”
떠날 채비를 갖추는 그리드의 곁으로 메르세데스가 따라붙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녀의 결연한 눈빛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드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
메르세데스가 사뭇 당황했다.
그녀의 책무는 그리드를 지키는 것이지만, 여태껏 그리드는 위험을 핑계로 그녀와의 동행을 꺼려했었다.
한데 이토록 순순히 함께 가자고 하다니?
메르세데스가 안도했다.
‘또 홀로 위험한 곳으로 떠나시는 건가 싶었는데 다행히 아니었구나.’
그래, 사람이 쉴 때도 있어야지.
근처에 산책이라도 가시려는 건가, 생각하며 그리드를 따라나선 메르세데스의 얼굴이 곧 하얗게 질렸다.
뱀파이어의 도시 중 유일하게 공략하지 않은. 아니, 공략하지 못했던 장소.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의 거처라고 알려진 일명 ‘그녀의 땅’ 입구 앞에서 그리드의 걸음이 멈춘 까닭이다.
“....”
워프 게이트를 타고 레이단으로 넘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목적지가 이곳일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여태껏 외면해 오셨던 이곳을 이제 와서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
전하께서도 역시 그녀에게 매료되신 걸까.
로드의 성인식장에 찾아왔던 마리로즈의 충격적인 미모를 떠올린 메르세데스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그녀가 드물게 동요한 것이다.
태양 아래 메마른 사막에서 유일하게 생동하는 그녀의 푸른 머리카락을 슬쩍 쳐다본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이미 혜안으로 읽었겠지만 마리로즈는 강해. 어쩌면 드래곤도 그녀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겠지.”
메르세데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로드의 성인식에서 만난 마리로즈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리드와 함께 헬가오를 쓰러뜨리고 부쩍 강해졌다고 자부해온 자신조차도 명함을 내밀 수 없었을 정도로.
그건, 단지 종(種)의 차이라고 납득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드를 따르는 직계 뱀파이어들과 비교해도 그녀는 특별했으니까.
기원(起源) 자체가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마리로즈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혜안의 메르세데스와 그랜드마스터 지크프렉터.
인류 중 최고의 잠재력을 지닌 두 사람은 본래 죽었을 운명이다.
Satisfy의 이야기는 그들 없이도 이어지게끔 설계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리로즈가 없었어도 이야기가 이어졌을까?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마리로즈의 사망 변수는 없다.
특히 악신 야탄이 베리아체를 죽이지 않고 인계로 추방시켰던 이유가 ‘죽이지 못해서’였다고 가정할 경우, 베리아체를 초월한다는 마리로즈의 힘은 가히 신급에 이른다는 뜻이 된다. 물리적으로 죽기 힘들다.
“베리아체를 희생해서 태어난 마리로즈에겐 베리아체의 복수를 이뤄야한다는 의무가 있어. 그녀의 적은 베리아체를 지옥에서 쫓아낸 악신 야탄과 그를 따르는 대악마들이야.”
“...그녀와 한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응.”
대답하는 그리드의 음성에는 확신이 차있었다.
그러므로 메르세데스는 의심하지 않았다.
“따르겠습니다. 만약 그녀가 전하의 편에 서지 않겠다하면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체벌하여 전하의 편에 서게 할게요.”
“....그러지 마.”
그러다가 같이 죽을라.
***
“경고인가. 유치한 건 여전하군.”
라인하르트 외곽의 풍경을 쭉 살펴본 소년이 쯧쯧, 혀를 찼다.
비쩍 마른 몸과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일행으로 보이는 사내가 로브를 푹 뒤집어쓰고 있으니 더욱 수상하게 보는 눈치다.
개의치 않은 사내가 소년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지?”
“저 산들.”
소년이 어떤 잔해들을 가리켜보였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뒤얽혀 있었다. 어떤 건축물을 파괴한 흔적들인 줄 알았더니 ‘산’이란다.
“디스인티그레이트의 여파다.”
“디스인티그레이트....”
무속성 마법 중 최강이라는 전설의 대마법.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은, 사내가 알기로 현재 단 한 명밖에 없다.
‘브라함.’
그리드가 지닌 최강의 패.
떠올리며 표정을 굳히는 사내에게 소년이 설명했다.
“브라함이 이런 식으로 이곳에 자신이 머무르고 있다는 흔적을 남긴 이상 어중이떠중이들은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킬 엄두조차 못 내겠지. 일종의 영역 표시다.”
“큭큭, 고작 영역 표시를 하려고 산을 다 때려 부수다니, 성격 한 번 화끈하군.”
“미친놈이야. 기왕이면 놈과 상종하고 싶지 않다.”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웃고, 소년은 눈살을 찌푸리는 그때.
“잠시, 신분증을 제시해주시겠습니까?”
병사들이 다가와 사내를 둘러쌌다.
행인들이 힐끔거리며 지나간다 싶더니 그새 신고를 했나보다.
아동학대범으로 보였나보지?
티 안 나게 눈살을 찌푸리는 사내에게 소년이 속삭여 물었다.
“죽일까?”
“방금 전까진 브라함과 상종하고 싶지 않다며? 여기서 소란을 일으켰다간 놈과 바로 대면하게 될 수도 있다.”
“내 바람이야 어찌됐든 네놈이 내 주인인 이상 따라야지.”
퉁명스레 말하는 소년의 이름은 파울드.
브라함과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마법사다.
실력과 업적, 모든 면에서 브라함에게 밀려 전설이 되진 못했지만 그 또한 대마법사라고 불렸었다.
그리고 수개월 전, 사후 수백 년 만에 부활했다.
곤륜삼을 먹고 여태껏 없던 완전한 리치로 재탄생했다.
그의 주인은 당연히....
“저기요? 순순히 협조바랍니다.”
“당연히 협조해야죠. 원체 행동이 굼떠서, 죄송합니다.”
아그너스였다.
병사들이 재촉하자 활짝 웃으며 로브를 벗은 그가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내밀었다.
병사들이 확인했다.
이름은 하벨. 나이 서른다섯. 직업은 세공사. 거처는 사하란에 두었고 병든 노모와 어린 아들을 부양하고 있다....
신분증에 새겨진 내용들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템빨국의 병사들은 워낙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이쪽이 아드님이신가요?”
“네, 제 아들도 세공사가 꿈인지라. 엘리자베스 님의 공방에 볼 일이 있다고 하니 한사코 자기도 따라나서더군요. 몸도 안 좋은 녀석이 말입니다.”
“음....”
소년 쪽의 신분증도 요구하려던 병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한 눈에 봐도 병약한 소년과 비쩍 마른 아버지.
온갖 풍파를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부자다. 신분증은 멀쩡하고, 이렇게 보니 크게 수상한 구석도 없는데 필요 이상으로 깐깐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선임 병사의 태도는 달랐다.
주민들의 신고로 사내를 조사하게 된 이상 형식에 따른 절차는 진행할 생각이었다.
“아들 분의 신분증도.”
“네, 여기.”
“음.... 아버지하고 사이는 어떻니?”
“좋아요. 무척.”
“다행이구나. 확인은 모두 끝났소. 라인하르트에서 부디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돌아가시기 바라오.”
“감사합니다.”
꾸벅, 병사들에게 인사한 아그너스가 논밭을 지나 성문에 이르렀다.
검문도 무사히 통과.
파울드가 피식 웃는다.
“시체의 가죽을 뒤집어써서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라. 악마의 기술답게 가히 역겹다만 편리하긴 편리하군.”
“스스로를 리치로 만든 미치광이가 고작 이 정도를 역겹다고 말하는 건 우습지 않나? 킁킁.”
아그너스가 갑자기 코를 벌름거렸다.
코끝으로 불쾌한 냄새가 스친다 싶더니, 몸에서 나는 악취였다.
뒤집어쓰고 있는 시체 가죽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공방에 찾아가기 전에 새로운 시체 가죽이 필요해보였다.
자칫 정체가 들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으니까.
라인하르트를 방문한 그의 목적은 단 하나.
파울드가 새롭게 제작할 아티팩트에 필요한 재료들을 수급하는 것이다.
장인급 세공사인 엘리자베스라면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수준의 재료들.
꽤 값비싼 돈을 지불해야겠지만....
“묘지부터 찾지. 인적이 드문 개인묘지나 가족묘지로 찾아라.”
“개골. 깐깐하기는. 자고로 바알의 계약자란 압도적인 무력으로 거침없이 진격하고 지배해야하는 법이거늘. 개골. 최근의 너는 거의 쥐새끼구나. 개골.”
투덜대면서도 펄쩍 뛰어 묘지를 찾아 떠나는 체파르데아였다.
제1위 대악마 바알의 권속인 그 두꺼비는 여러모로 요긴하다.
“실력자가 상당히 많군.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은 각별히 조심해야할 듯하다.”
고작 치안대 병사 따위가 무의식중에 기감을 훑다니?
거구의 치안대 병사가 지나치는 순간 혹 정체를 들킬까, 반사적으로 마력을 갈무리한 파울드가 아그너스에게 주의를 줬다.
마침 울타리 너머 훈련장을 바라보던 아그너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훈련장에 늘어선 수십 개의 과녁 모두 ‘정중앙에만’ 화살이 꽂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아카데미의 넓은 부지는 정령의 기운으로 충만했고, 높이 솟은 마탑엔 강력한 마력이 득실거린다.
겉으로 보기엔 한없이 평화로운 대도시.
조금 다른 관점에서 봤을 때, 이곳은 온갖 괴물들이 기거하는 만마전이다.
“체파르데아의 말대로 쥐새끼가 되자고.”
루나(라고 믿었던 것)의 소멸 이후, 아그너스는 변했다.
이제 그는 현실을 직시했다. 다른 랭커들처럼 냉정하고 신중해졌다.
광기에 몸을 맡긴 채 늘 죽음을 달고 살았던 아그너스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왕의, 새로운 거악의 태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