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19화
마리로즈의 경멸어린 시선을 마주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을 때, 어느새 다가와 곁에 서는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기척을 느낀 브라함은 기대했다.
이들과 함께하는 이상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뺏기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딴 저열한 희망들을 품었다.
그것은.
일생일대의 치욕이었다.
자신이 타인에게, 심지어 자신보다 약한 이들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자각한 순간 대마법사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혔다. 위대하신 어머니 베리아체의 자식으로서 당연히 품어왔던 긍지가 산산조각 났다.
무엇보다도 부끄러웠다.
오직 내가 최강이라는 망발을 진지하게 들어주곤 했던 그리드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봄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마리로즈!”
콰르르르륵!!
이를 가는 브라함의 주변 마력이 격동한다. 돌풍처럼 휘몰아치더니 빠르게 결집하여 커다란 빛의 창을 빚는다.
수백 년 전의 브라함이 파라왕의 궁전을 꿰뚫고, 소멸시킬 때 사용했던 디스인티그레이트. 브라함이 잠들어 있는 동안 전설의 산물이라고 치부 받아온 그 대마법이 모루 위에 놓인 <탐욕>을 노리고 투척됐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본래 태산마저 부수는 마법이다.
브라함이 염룡 트라우카의 추격을 따돌리는 게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디스인티그레이트의 전조가 트라우카의 경각심을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디스인티그레이트는 미약했다.
마법의 위력이 상당량 탐욕에 흡수됐다곤 하나, 작은 산의 ‘일각’을 부수고 소멸하는 게 고작이었다.
히드라를 사냥하고 신화의 일부가 됐다지만 아직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진 못한 것이다.
반면 마리로즈는 어떤가.
삶의 대부분을 잠든 채 힘을 비축해온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지금의 마리로즈와 자신의 실력 차이는 어느 때보다 더 크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뱀파이어 시절’의 브라함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다.
마리로즈에게 심장이 꿰뚫렸을 당시의 브라함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단지 타고난 힘과 지식에 심취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힘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직계 뱀파이어의 권능과 대마법사로써 쌓았던 마력.
그 모든 힘을 되찾아 신격과 융합시킨다면 마리로즈의 심장을 꿰뚫고 목을 찢어발기진 못할지언정 어느 정도 호각을 이룰 것이다.
진정한 최강을 논할 수 있게 된다.
그때야말로 나는 비로소 ‘브라함’이다...
‘힘을 되찾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다.
좌절하지 말아야하며, 꾸준히 노력하고 정진해야한다.
상기하는 브라함의 눈빛이 흔들림을 멈추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어머니를 희생하여 태어난 주제에 나태의 저주를 핑계로 시간을 낭비 중인 마리로즈.
그 빌어먹을 원수에게 품은 깊은 분노와 원한을 억누르고, 스스로에게 느꼈던 실망과 혐오를 도리어 열정을 만드는 양분으로 삼아, 무너지기 직전의 정신을 바로 세웠다.
이는 뱀파이어가 아닌 대마법사의 정신력이다.
뱀파이어의 힘을 잃고 인계로 추방당했던 브라함이 온갖 고초를 이겨내며 갈고닦은 정신력.
“후우....”
호흡을 고르고 있자니 익숙한 기척이 느껴진다.
창공을 가르며 다가오는 그리드가 보였다.
작은 용의 날개를 펼칠 수 있음에도 굳이 낡은 부츠에 의존해서 날아다니는 놈의 배려 아닌 배려가 브라함을 피식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미소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리드를 맞이했다.
“같잖은 위로를 하러 온 건가? 아서라. 마리로즈는 어머님의 힘을 계승한 존재. 그 계집에게 위축되는 것은 섭리인지라 딱히 부끄럽지도, 화나지도 않는다.”
“내가 그렇게 시건방져 보입니까?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천하의 브라함님을 위로하겠어요.”
브라함은 아직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리드에겐 여태껏 없던 시야가 생겼다.
이곳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브라함의 모습을 관찰했다.
초조함과 분노를 버리고 결의하는 브라함을 목격했다.
그러므로 브라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혼자 어련히 잘 견디고, 이겨낼 사람을 걱정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지?”
“아니 뭔, 꼭 일이 있어야 찾아오겠수? 그냥 진지는 잡쉈나~ 오늘 티타임엔 어떤 차를 드셨나~ 궁금해서 온 거지.”
“...흥, 마법 단련의 진척도가 궁금한 거라면 걱정하지 마라. 1초의 낭비도 없이 진행 중이니.”
“아, 마법 단련 말인데요. 그.... 심상세계에서는 못하는 겁니까?”
브라함은 탐욕을 한 번 단련할 때마다 산을 부수고 있었다.
이래서야 몇 주만 지나도 라인하르트 근방의 산은 죄다 사라지고 없을 것이었다.
브라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의미한 짓이다. 탐욕을 내 심상으로 옮겨서 단련하는 일은 가능하지만, 심상에서 새롭게 구성된 탐욕을 외부로 반출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왜죠?”
“내 심상 속에서 변화된 물질은 ‘당연히’ 내 심상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아....”
대충 이해된다.
어찌됐든 마법 단련은 결국 외부에서 진행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럼 최소한 산이라도 부수지 말아주세요.”
라인하르트 인근의 산에서는 나무와 광물, 약초 등의 자원을 채집할 수 있다. 백성들이 산짐승을 사냥할 때, 초보 플레이어들이 몬스터를 사냥할 때 애용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만약 산이 죄다 없어져버리면 자원이야 수입하면 된다지만, 백성들의 일자리와 플레이어들의 사냥터가 없어지는 셈이라 장기적인 손실을 염려해야한다.
브라함이 콧방귀 뀌었다.
“어디서 뭘 하든 내 마음이다.”
“....”
이 인간, 이제 보니 아직도 마리로즈 때문에 언짢아있는 건가.
그리드의 입장에선 브라함이 괜히 삐뚤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설득하기가 난처했다.
탐욕을 단련해주고 있는 것만 해도 평생 감사해야할 일인데, 마법 단련을 할 때마다 저기 어디 먼 무인도까지 나가서 하고 오라기엔 염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도시 안 부수고 산 부수는 게 어디냐.’
애초에 브라함이 산까지 찾아와 마법 단련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기 위함일 것이었다. 여러모로 배려해주는 그에게 자꾸만 딴지를 걸어봤자 추태다.
‘산이 없어지면 개간지가 늘어나서 농부들도 좋아할 거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본 그리드가 고이 접은 옷 한 벌을 꺼내 브라함에게 건네주었다.
지금은 그리드의 체형에 적합한 형태로 모습을 바꾼 <베리아체의 내의>의 원래 형태를 복원한 옷이었다.
“....이게 뭐냐?”
“베리아체님이 대악마 시절에 애용하셨던 것으로 추정되는 속옷을 복원한 작품입니다.”
“....?”
“재단 기술도 올릴 겸, 당신께 선물로 드리려고 복원해봤죠.”
브라함에게 어머님을 추억할 옷을 만들어줬단 사실에 흐뭇함을 느낀 그리드가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물론 브라함의 반응은 싸늘했다.
“네 녀석도 마리로즈를 만난 까닭에 잠시 제정신을 잃었나보군.”
속옷이 아닌 다른 상징물이었다면 살짝 감동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속옷이다.
어머니의 속옷을 소중히 간직하기엔 좀 이상하지 않은가....
눈살을 찌푸리는 브라함을 보고 자신의 실수를 뒤늦게 깨닫는 그리드였다.
***
이름:로드 스테임
나이:15세 성별:남
직업:왕자
칭호:서대륙의 천재
*하나의 대륙을 대표할 만한 천재입니다. 이는 국가적 천재들을 압도한다는 뜻이며 레벨과 능력치 상승 속도가 보통보다 60퍼센트 빠릅니다. 또한 광범위한 분야의 스킬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칭호:전설이 될 자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인물이므로 절대적인 가호를 받습니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80% 확률로 면역합니다. 공격을 받아 생명력이 1이하로 떨어지는 피해를 입을 경우 2.5초 동안 불사 상태에 돌입합니다.
칭호:템빨신의 아들
반신은 아닙니다. 템빨신이 인간 시절에 낳은 자식이므로 신의 피와 육신, 권능은 잇지 못했습니다. 단, 신앙의 대상이 될 확률이 생깁니다.
칭호:마성의 남자
딱히 의도하지 않아도 이성을 높은 확률로 유혹합니다. 행운일 수도, 불행일 수도 있습니다.
레벨:150
근력:1,500 체력:1,500
민첩성:1,500 지력:1,447
손재주:1,500 신성력:1,160
매력:1,500 위엄:870
통찰력:1,500 정치:552
끈기:1,210 평정:1,210
템빨신 그리드의 아들입니다.
부모의 장점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므로 잠재력이 독보적인 수준으로 뛰어납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고도 남습니다. 당대를 풍미하는 스승을 여섯이나 두었으며 그들의 수업을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도 그 재능에 눈독을 들이는 눈치입니다.
모친의 훌륭한 훈육 덕분에 올곧게 자랐습니다.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도덕성을 지녔습니다. 단, 이성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사상을 지녔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유 스킬 목록:[승마(A)] [체술(A)] [고급 보우 마스터리(A)] [고급 스피어 마스터리(A)] [레베카교의 신성마법(A▼▼▼)] [예절(S)] [다루카의 술법(S)] [아직 미완인 검성의 검술(S+)] [최고급 웨폰 마스터리(S+)] [스틱세이식 정령술(SS)] [최고급 대장장이 기술(SS)] [농사(SS)] [안목(SS)] [압도적인 매력(SS)] [명문과 전설의 혈통(SS)] [도덕(SS)] [란스티어의 술법(SS+)] [현자의 지혜(SS+)] [신의 아들(??)]
‘아이템 효과를 받지 않은’ 로드의 상태창이다.
150의 레벨과 1,500에 도달한 능력치마다 붙어 있던 (-) 표시가 삭제됐다.
성장 제한이 풀렸다는 뜻이다.
그리드가 예상하기로 로드의 평균 능력치는 ‘머지않아’ 2천을 돌파할 것이었다.
‘아쉬운 건 레베카교의 신성마법이군.’
몇 달 전에 봤을 때는 SS등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데 갑자기 A등급으로 격하된 이유는 내가 레베카교와 대립하게 됐기 때문일 터다.
‘....압도적인 매력의 등급이 오른 이유는 수애의 영향인 거 같고.’
마성의 남자라는 칭호가 특히 거슬린다.
조금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로드의 상태창을 점검한 그리드가 골똘히 생각해본 뒤 말했다.
“로드, 이제 너도 어엿한 성인이 됐으니 모험을 떠나보는 게 어떻겠니?”
“네! 정말로 즐거울 것 같아요!!”
활짝 웃은 로드가 힘차게 대답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야한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낄 법도 하건만, 마냥 기뻐하는 눈치였다.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로드는 천재다. 세계의 규칙과 섭리를 이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감을 표출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철저한 성장계획을 준비해놨기 때문일 것이다.
“모험에는 목적이 있어야한다. 아무런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간 모험의 의도가 변질될 수 있어. 모험의 목적을 고민해본 적 있니?”
로드의 눈이 반짝였다.
“저는 우선 숲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싶어요.”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템빨왕 전기(지금은 템빨신 전기)는 대부분 숲의 수호자와의 결투로 첫 포문을 연다.
로드는 아버지의 족적을 뒤쫓고 싶은 눈치였다.
합리적이기도 했다.
‘첫 모험지로 바이란.... 적절하군.’
그리드는 로드에게 많은 애정을 쏟아왔다.
로드가 각 분야의 스승을 얻고 본격적인 수련에 임하기 시작했던 무렵부터 로드와 함께 성장해나갈 아이템들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로드의 전용 장비들이 대부분 레어, 에픽 등급에 도달했다는 점과, 로드가 습득한 스킬들의 종합적인 수준이 ‘전설급’이라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바이란 영지의 필드와 던전들은 로드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나이 제한에 걸려있던 탓에 스탯 수치가 높지 않다고 해도 템빨과 스킬빨로 몬스터들을 충분히 학살할 수 있을 것이었다.
‘숲의 수호자를 만날 때까지 레벨이 최소 20개는 더 오를 테고...’
그 과정에서의 행동과 선택의 여파로 능력치도 골고루 오를 테니 숲의 수호자를 혼자서 레이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보인다.
생각해본 그리드가 씨익,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아. 숲의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돌아와라.”
“네! 아바마마! 푸른 오리하르콘을 증표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한 로드가 아이린 왕비와 여자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라인하르트를 떠났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모험에 들뜬 로드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하지도, 말을 타지도 않았다. 두 다리로 직접 바이란 영지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점차 멀어지는 로드의 뒷모습을 <바르바토스의 시야>로 바라보던 그리드가 너털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지치기는커녕 점점 더 빨라지네.’
‘달린다.’는 행위 하나로 체력 스탯과 민첩성 스탯이 실시간으로 오르는 듯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MAX 상태에 도달해서 멈춰있던 능력치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
“...!”
처음에는 로드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뒤를 쫓던 템빨 그림자단원들이 당황하며 속력을 높인다.
저러다가 조만간 들키겠는데....
쯧쯧, 혀를 찬 그리드가 그림자 속 카심에게 말했다.
“왕비의 호위는 당분간 페이커에게 맡길 테니 로드를 부탁한다.”
“예.”
스르륵.
그림자 속 카심의 기척이 사라졌다.
그제야 안심한 그리드가 시야 한쪽에 떠올라있는 알림창을 기쁘게 감상했다.
[당신의 아들 로드가 모험을 떠났습니다.]
[로드는 <푸른 오리하르콘>이라는 선물을 들고 당신의 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