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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96화 (1,286/1,794)

템빨 65권 - 18화

중간에 큰 소란이 있긴 했지만, 로드의 성인식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무사히 끝났다.

여러 스승을 둔 로드는 귀빈들이 기대한 것 이상의 재능을 뽐냈고, 그리드는 마리로즈와 당당히 마주하여 귀빈들을 감동시켰으니 템빨국의 평가는 하늘을 찔렀다.

물론, 템빨국이 제국 다음가는 강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 하지만 템빨국의 힘이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될지, 또한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될지에 대해선 누구도 섣불리 추측하지 못했었다.

템빨국은 템빨왕 그리드가 세우고 이끌어온 나라.

그가 은퇴한 후의 템빨국이 지금처럼 번영할 거라고, 폭정을 일삼지 않을 거라고 누가 감히 장담하겠는가.

하지만 이제 귀빈들은 깨달았다.

그리드의 아들은 그리드 다음가는. 아니, 어쩌면 버금가는 재능의 집결체이며 올곧고 선한 존재라는 사실을.

애초에 그리드는 신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육신은 인간이되 사람들의 염원으로 초월적 존재가 된, 신앙의 대상이다. 그와 그의 아들이 어찌 올곧지 않을까.

최근 레베카 여신을 의심하는 말들이 떠도는 걸 보면 신이라고 해서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는 듯하지만.... 사람들은 그리드 부자를, 템빨국을 믿고 싶었다.

“선물이 산처럼 쌓였군요.”

성인식 다음날 오후.

마지막 연회 일정을 마친 귀빈들이 드디어 성을 떠났다.

그들이 남기고 간 보물의 산을 마주보고 선 라우엘이 활짝 웃었다.

거의 매일 피곤에 찌들어 있는 그가 이토록 밝은 표정을 짓는 모습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이었다.

“저들이 템빨국과 친교를 맺으려하는 이유는 임금의 위대함에 반해서인가, 신의 전능함에 기대고 싶어서인가.”

창문을 돌아보며 독백하는 라우엘의 푸른 눈동자에 떠나는 귀빈들의 행렬이 투영된다.

오래간만에 오글거리는 멘트를 지껄이는 꼴을 보아 확실히 컨디션이 좋은 듯했다.

“이번에 방문한 귀빈 중에 문제를 일으킬 인물은 없는 거지?”

그리드가 급히 대화를 이끌었다. 그는 라우엘에게 독백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출신 성분과 사상 검증을 확실하게 끝낸 사람들만 초대한 거니까요. 저들 모두 대륙의 평화와 인류의 존엄을 위해 싸워왔고, 싸워나갈 위인들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사고를 칠 작자들이 아니니 화친을 맺어서 나쁠 게 없습니다.”

“그래, 네가 어련히 잘 골랐겠지.”

고개를 끄덕인 그리드가 품에서 편지 몇 장을 꺼냈다.

각국의 왕들이 떠나기 전 사적으로 건네준 편지들이었다.

공통점은, 그들 모두 딸을 대동했었다는 점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 본 그리드가 하하 웃었다.

“로드가 잘나긴 잘났네.”

로드 왕자와 내 딸의 혼사를 논하고 싶다....

11통의 편지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특히 왕국이 아닌 공국들의 태도가 적극적이었는데, 혼인을 계기로 본인의 국가를 템빨국에 귀속시킬 의향도 있어보였다.

곁에서 함께 편지를 읽어본 라우엘의 얼굴이 한층 더 밝아졌다.

“헤밀턴 공국이 특히 탐나는군요. 사하란의 셋째 아들을 시조로 둔 국가인데 황실의 적통이라 할 수 있어 출신 성분이 매우 훌륭합니다. 로드 왕자가 헤밀턴 공녀와 혼인하고 자식을 낳으면 전하의 재능을 이어받는 것으로 모자라 적기까지 다룰 수 있는 거죠.”

라우엘이 신나서 설명했다.

명문 중의 명문과 왕자의 혼사를 논하게 된 것이다.

기쁜 게 당연했다.

반면 그리드의 반응은 냉담했다.

“됐어, 로드의 연애나 혼인에 개입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른 아이에게 정략혼이라니, 너무 가혹하잖아. 나는 로드의 혼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아. 나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아들을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아니, 그게....”

“라우엘, 너도 그만 욕심 버려라. 네가 노력해온 덕분에 템빨국은 이미 충분히 융성해졌는데 로드의 행복까지 희생시켜야할 필요가 있겠냐?”

“그게 아니라....”

자꾸만 말을 끊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창밖을 가리켜보였다. 그러자 창가로 다가선 그리드가 밖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레베카의 딸 후보였던 미녀 수백 명과 함께 어울리는 로드가 보였다.

금발 미녀의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운 녀석이 갈색 피부 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

라우엘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대로 놔뒀다간 진짜 난리 나게 생겼다고요.”

“.....”

로드는 변하지 않았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갈 곳 잃은 소녀들을 보살피며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주었다.

그런 로드의 모습을 사람들은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로드의 몸집이 너무 커버렸다.

또래보다 성숙해 어엿한 청년처럼 보이게 됐으니 그림이 묘해졌다.

고전 무협 소설이나 판타지 소설 속 주인공처럼 하렘을 만든 호색한 같아 보였다.

역시나.

미녀에게 둘러싸인 로드의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지나치는 사람들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로드 왕자의 마음은 아직 순수할지 몰라도 레베카의 딸 후보들은 다릅니다. 그녀들의 왕자를 향한 마음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렸어요. 지금부터라도 저들을 떼어놓지 않으면 정말로 손주를 수백 명 보게 되실 겁니다.”

“....”

왕실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은 흔한 일이다.

왕의 자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비극은 더욱 더 심화된다.

미간을 찌푸린 그리드가 한참을 고민해본 뒤 말했다.

“로드도 슬슬 모험을 떠날 때가 됐지.”

로드의 성장 제한은 어제, 성인식의 종료와 함께 해제됐다.

네임드임에도 불구하고 한도에 막혀있던 각종 능력치와 레벨을 이제부터 제약 없이 올릴 수 있었다.

“티라멧, 크레이.”

“혈왕의 부름에 응합니다.”

“왜 불러?”

티라멧과 크레이.

혈왕이 된 그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영혼이 해방된, NPC로 회귀한 직계 뱀파이어들이다.

베리아체가 직접 낳은 자식인 그들은 마리로즈, 브라함과 비교하면 격이 한참 떨어졌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선 네임드 보스급의 재앙이었다.

“너희들이 당분간 로드의 곁을 따르며 보살펴줘.”

“예.”

“응.”

템빨국령 내에만 해도 훌륭한 사냥터와 명소가 많다. 로드의 첫 모험은 굳이 먼 타국이 아닌 템빨국을 무대로 삼아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템빨국이라고 해서 모든 구역이 안전한 건 아니다.

특히 로드는 아직 레벨이 낮고 신분이 신분인지라 어떤 특정 세력의 표적이 되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저렙존에선 위험이 덜할 테니 티라멧과 크레이의 호위면 충분하겠지.’

저레벨 사냥터는 당연히 관리가 쉽고 치안이 좋다.

도처에 템빨국의 병사와 기사들이 깔려있어 누군가가 로드를 노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나중에 로드의 레벨이 더 올라서 상위 사냥터까지 노리게 되면 그때 가서 호위를 늘려도 되고.’

엘핀스톤이나 놀, 에티마 등.

호위로 쓸 직계 뱀파이어는 많다.

최악의 경우에는 <최초의 아빠> 칭호에 의지하면 된다.

최초의 아빠는 자식의 생명력이 30퍼센트 이하로 떨어질 경우 이를 인지하고 <최초의 부성애> 스킬을 발동시킨다.

그때 한달음에 달려가 로드를 구출하리라.

생각하던 그리드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라우엘의 눈빛이 게슴츠레했던 까닭이다.

“왜 그런 눈으로 보냐?”

“황당해서요. 그렇게 걱정하실 거면 차라리 전하가 직접 로드 왕자를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모험을 떠나보내는 취지에 맞지 않잖아.”

그리드가 로드에게 모험을 떠나라고 권하려는 이유는, 독립성을 기르는 한편 경험과 학식을 쌓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라는 의도에서였다. 로드 혼자서도 어엿이 한 사람 몫을 해내길 바라는 한편 레베카의 딸 후보들의 치마폭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아빠를 졸래졸래 따라다녀서야 바뀌는 게 있을까 싶다.

“정말로 그런 취지라면 믿고 혼자 보내줘야죠.”

“....호위 정돈 붙여도 되잖아?”

“호위를 붙이는 것 자체는 찬성입니다. 다만, 로드 왕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끔 템빨 그림자단을 붙이시는 걸 추천하는 바입니다.”

“확실히....”

대놓고 호위를 붙여서야 로드의 독립성을 키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호위의 존재가 로드의 긴장을 풀리게 만들 수도 있다.

“좋아 그럼, 되도록 뛰어난 어쌔신들로 부탁하마.”

“네, 안 그래도 로드 왕자의 기감을 속이려면 손꼽히는 실력자들로 붙여야합니다.”

“흠.... 그러고 보니 페이커는 잘하고 있으려나.”

성인식을 앞두고 Satisfy에 접속하기 전, 그리드도 당연히 국대전을 시청했다.

데미안의 분투를 응원했고, 그림자 마왕의 출현을 목격했다.

만물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무기와 병사로 삼아 싸우는 올해의 마왕은 사람들에게 유독 큰 충격을 안겨줬다.

아무리 쓰러뜨려도 다시 일어나는 그림자 군단이 플레이어들을 몰살시키는 광경은 가히 압도적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다.

라우엘이 웃었다.

“페이커님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하긴....”

페이커는 묵묵히 템빨단원들을 지켜왔다.

그리드가 태양이라면 그는 달이었다.

올해 란스티어가 되며 더욱 더 강력해진 그가 국대전에서 패배하는 그림은 절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기왕 출전한 국대전,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나마 응원을 보낸 그리드가 활성화 상태인 퀘스트 창을 불러왔다.

<혈왕의 탄생비화>

난이도:???

시조 베리아체는 온갖 시련을 혼자서 극복해야만 했습니다. 지옥에서 쫓겨나 홀로 인계를 배회하며 고독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절감했습니다.

그녀가 자식들에게 성별을 부여한 이유입니다.

베리아체는 자식들이 외롭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생의 동반자를 만나 저주 받은 운명을 함께 극복해나가길 바랐습니다.

엘핀스톤의 약혼녀를 해친 브라함이 용서받지 못했던 이유이며, 혈왕이라는 안배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혈왕이여.

교황 크레이슐러는 되지 못했고, 검성 뮐러는 거부했던 혈왕이 된 당신에겐 마리로즈의 고독을 달래줄 의무가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마리로즈와의 호감도 10 달성.

퀘스트 클리어 보상:정보 <혈왕의 탄생비화> 열람 가능.

마리로즈가 배필과 씨를 운운했을 때 자동 진행된 퀘스트다.

그리드가 마리로즈에게 찾아가겠노라 약속할 용기를 준 퀘스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찾아가 봐야겠지.’

정보는 힘이다. 새로운 정보가 숨겨진 기능들을 불러오곤 한다.

게다가 마리로즈는 가능한 우군으로 만들어야할 대상이었다.

그리드는 이번 퀘스트를 되도록 빨리 클리어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 또 다시 마리로즈가 먼저 나를 찾아오게 만들어선 좋을 게 없어 보이니.’

그땐 뒤가 썩 좋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다.

배필을 운운하며 호의적으로 행동해도 실제 호감도는 단 1도 오르지 않은 상대가 바로 마리로즈다.

속내를 읽을 수 없으니 더욱 더 예의주시해야한다.

‘그 전에.’

꽈아아아아앙!!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보자 이름 모를 산의 일각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산에 꽂혔던 빛의 창이 흩어져 사라진다.

‘브라함부터 만나보자.’

전설의 대마법 <디스인티그레이트>로 탐욕을 단련할 때마다 산을 하나씩 부수는 브라함이다.

새로운 광물의 창조를 돕기 위해 벌써 몇 주 째 같은 일을 반복 중인 그를 격려할 겸, 짜증나도 조금만 살살해달라고 부탁할 겸, 마리로즈를 만나 뒤숭숭할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일단 브라함한테 다녀올게. 아, 그리고 이번 성인식에 참석해줬던 손님들께 황금호두를 선물로 보내드려.”

코크로 섬에서 재배 중인 황금호두는 현재 절반의 성공을 거둔 상태다.

동대륙에서 나는 황금호두처럼 ‘껍질을 잘 까면’ 엘릭서와 비슷한 효능을 발휘하지만 효과를 누리는데 제한이 있었다.

1인당 2알밖에 효능을 못 본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효과다.

최고의 선물로 손색이 없다.

“선물치고 너무 과하지 않나요? 차라리 템빨 기사단원들에게 보급하는 게....”

“피아로가 더 많은 경작지를 원하더라고. 일단 최대한 많은 국가에 황금 호두를 알리고 협력을 받아서 코크로 섬과 비슷한 기후를 지닌 토지를 찾고, 대여해볼 생각이야.”

“완전한 황금호두를 재배하려면 더 많은 조건에서 실험할 필요성이 있나보군요. 네, 알겠습니다.”

충분히 납득한 라우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리드는 브라함을 찾아갔다. 돌아온 뒤엔 로드를 불러 모험을 떠나라고 이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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