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95화 (1,285/1,794)

템빨 65권 - 17화

로드의 성인식에 참석한 귀빈들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거물들이다. 적어도 자국에서만큼은, 또는 외국에서도 두려움 없이 권력을 행사해왔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인간이다.

마리로즈.

최상위 포식자의 등장은 장내의 귀빈 전부를 덜덜 떨게 만들었다.

자부심이 대단해 불안과 공포를 몰랐던 거물들이 그녀에겐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당신에게 거역할 뜻이 없음을 내비치듯, 최대한 하찮은 존재처럼 보이고자 몸을 수그렸다.

굴욕과 수치를 논할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조상들이 공포를 느끼지 못했다면 위험한 상황을 피해올 수 있었을까? 없다. 인류는 현재까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마리로즈 앞에서 겸손해진 귀빈들의 태도는 인간의 당연한 본능에 의거한 결과다.

위험 요인에게 공포를 느끼고 회피하려는, 지극히 원초적인 본능.

‘마리로즈. 정녕 마리로즈인가?’

제국의 공작들 또한 지독한 사기(邪氣)에 짓눌려 무력해지자 반사적으로 몸을 수그리고 있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하며 상황을 파악했다.

떠올려본다.

이미 17년, 18년 전쯤 마리로즈의 봉인이 풀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전 황제 쥬앙데르크는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해 베인을 움직였고, 베인은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이지를 초월할 정도로 짙은 이 사기는 필시 마리로즈의 것일 확률이 높다.

그래야만 납득이 된다.

내가, 우리가.

불사왕 그렌할이, 창성 레이첼이, 맹수왕 모르이즈가 여태껏 쌓아올린 명성과 무력이 무색하게도 공포에 떨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상대방이 마리로즈인 걸 인정해야만 납득할 수 있었다.

‘이건.... 궤멸이다.’

마리로즈가 왜 하필 지금, 이곳에 나타났는지.

이유를 따져볼 여력이 없다.

공작들은 다만 아찔해졌다.

역대 최강의 교황이었던 제2대 교황 크레이슐러가 레베카의 딸들과 함께 목숨을 바쳐야만 간신히 봉인시킬 수 있었던 괴물.

사하란의 오래된 비밀 문헌이 ‘시조 베리아체보다 강하며, 바알이 경계하는 몇 안 되는 존재’라고 평가는 저 괴물 마리로즈가 이곳에 나타난 이상 생로가 떠오르지 않았다.

죽었다. 죽는다. 살아남을 수 없다.

온통 그런 생각들이 공작들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나마 바사라 황제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어버이인 그녀의 책임감은 초월적인 것. 그녀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냉정을 지킨다.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인 자리를 노리고 습격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인류를 지배할 야망이 있다는 거겠지.’

이 자리의 귀빈들이 전멸하는 순간 세계는 거의 마비된다.

그때부터 활개 칠 마리로즈를 어느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인류는, 당장 제국만 해도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채 마리로즈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할 것이었다.

‘지금 살려야할 사람은....’

바사라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향했다.

그녀의 판단은 빨랐다.

‘그리드 님을 지켜야해.’

이 자리의 모두가 희생을 치러야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리드를 대피시켜서 그를 인류의 구심점으로 삼아야한다. 그래야만 인류의 멸절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그에게만 자격이 있다.

쏴아아━

바사라의 적기(赤氣)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하란의 혈통임을 증명하는 힘.

만물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일명 지배자의 힘이다.

이는 스킬이나 마법이라기보다 체질에 가깝다.

사기(邪氣)에 봉인당하지 않는다.

바사라는 마리로즈의 사기에 개입해볼 요량이었다.

그 반동으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잠시나마 사기를 통제할 수만 있다면, 공작들과 힘을 합쳐 그리드의 활로를 열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설령 성공 가능성이 1퍼센트 미만이라고 해도 그것 외엔 시도해볼 방법이 없었다.

바사라의 적기가 짙어졌고,

“흐흥?”

마리로즈가 바사라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저벅, 저벅, 저벅....

누군가의 발걸음소리가 적막한 장내에 울려 퍼졌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홀로 당당히 걷는 자.

그의 정체를 유추해보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드 님?’

‘그리드 전하....!’

모두의 시선이 발걸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대전 중앙.

역시나 그리드가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마리로즈를 똑바로 마주봤다. 걸음걸이에 망설임이 없었고, 허리는 올곧게 섰다. 몸을 떠는 일도 없었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권력자들과 강자들을 모조리 겁에 질리게 만든 저 마리로즈조차도 템빨신 그리드를 겁박하진 못하는 것이다.

귀빈들이 감탄할 때였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리로즈 님.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드디어 마리로즈 앞에 다가선 그리드가 헤헤 웃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상과 전혀 다른 태도였다.

의외였지만, 그리드를 비굴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역시 마리로즈였나.’

‘설령 마족이라고 할지언정 그녀는 전설적인 존재다. 수백 년 전부터 시조를 초월했다는 명성을 쌓은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는 건 당연해.’

‘애초에 그리드님께서 허리를 굽히신 이유는 우리 때문이야....’

그리드는 마리로즈의 사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은 눈치였다.

딱히 마리로즈를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리를 굽힌 이유는 순전히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리라.

마리로즈가 섣불리 행동하지 못하게끔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란 뜻이다.

‘과연 인류의 등불이란 건가.’

귀빈들. 특히 여태껏 그리드를 소문으로만 접했던 귀빈들이 그리드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여태껏 템빨국과 교류가 없었던 왕국이나 부족의 지도자들이 그리드에게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는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뭐지....’

내가 뭘 했다고 갑자기 막 호감도가 오르는 거지...?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마리로즈가 손등을 내밀었다. 만년설을 떠오르게 만드는 흰 피부가 창문에 새어 들어온 햇살을 받아 붉게 물든다.

태양은 뱀파이어에게 썩 좋은 양분이 아니다.

서열 제3위의 대악마였던 베리아체보다 더 강한 무력을 지녔으며, 인계에서 태어난 만큼 인계에서의 페널티를 받지 않는 마리로즈.

세계관 최강자 중 하나인 그녀의 몇 안 되는 약점이 바로 태양이었다. 베리아체의 힘 즉, 뱀파이어의 특성을 누구보다 짙게 이어받은 만큼 햇빛에 약했다.

이런 대낮에 그녀가 굳이 고통을 무릅쓰고 라인하르트를 방문한 이유는....

“잠들어 있는 사이에 혈왕이 되었더라?”

그리드를 어서 축하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춘 그리드가 민망하게 웃었다.

“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마리로즈는 최강의 뱀파이어지만 혈왕의 지위엔 적합하지 않다. 그녀의 목적은 단지 대악마들을 박멸하는 것일 뿐. 왕이 되어 뱀파이어들을 이끌어나갈 거라는 야망은 없었기 때문이다. 형제애가 전무하다는 점이 증거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그리드는 마리로즈의 축하를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 그녀로부터 혈왕이라는 지위를 빼앗은 거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나 마리로즈의 축하는 진심이었다.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 청초한 꽃이 떠올랐다.

“기뻤어.”

“...?”

“내 봉인을 푼 사내가 어느덧 훌륭하게 자라서 나의 배필로 성장했잖아. 운명이라는 말을 믿게 됐어.”

“...?”

“...?”

혈왕? 배필?

보통 사람들은 영문 모를 이야기뿐이다.

심지어 그리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배필?’

등에 따가운 시선들이 꽂힌다.

아이린 왕비의 시선은 아니다.

그녀는 예전부터 그리드가 첩을 들이길 바랐었다. 그리드에게 직접 종용도 했었다.

그리드보다 빨리 늙고, 먼저 떠날 자신을 대신해 다른 좋은 사람이 그리드의 곁을 지켜주길 바라서였다.

다행히 지금의 아이린 왕비는 젊음을 되찾아가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예전과 변함이 없다.

그녀는 벌써 15년째 둘째를 출산하지 못하고 있다. 왕위계승자가 1명뿐이어서야 왕국의 정세가 너무 불안해진다.

“....”

그리드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딱히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아이린과 달리 바사라와 메르세데스는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녀들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늘이 져있었다.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던 이유다.

바사라는 왜....?

“험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리고 마리로즈를 상석으로 안내했다.

“오늘은 제 아들이 드디어 성인이 된 날입니다.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손님들도 계시고 하니, 사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하시도록 하고 함께 자리를 빛내주시죠.”

“네 자식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봤어. 재능이 뛰어나고 생긴 것도 귀여워서 너를 꼭 빼닮았네. 아마 우리들의 자식도....”

“험험! 자, 이리로.”

“....”

그리드가 또 다시 헛기침을 하며 마리로즈의 말을 끊자 마리로즈의 인상이 확 바뀌었다. 화사했던 미소가 의미심장하게 변했고 초롱초롱했던 두 눈이 반달을 그렸다. 그리드의 심장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설마 너, 내 배필이 되기 싫은 거니?”

“그, 그게, 유부남이라....”

“흐음, 그럼 씨만 줘도 돼.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마렴.”

“....”

장내에 적막이 깔렸다.

특히 바사라와 메르세데스의 입이 꽉 다물렸다.

요염하게 미소 짓는 마리로즈의 눈빛에 서운함과 서러움 등의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똑똑히 목격한 까닭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리드에게 진지할 수도 있었다.

바사라와 메르세데스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이었다.

“네가 무슨 염치로 이곳을 찾아온 거지?”

대전 입구에 멀뚱멀뚱 서있는 쥬드와 샤이닝 왕자 뒤로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은발 적안의 사내.

마리로즈와 나란히 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미남자의 정체는 당연히 브라함이었다.

전설의 대마법사.

드라시온 레이드에서 그의 힘을 목도했던 제국의 공작들이 반사적으로 차렷한다.

반면 마리로즈는 느긋했다.

“많이 컸네, 브라함. 내게 큰 소리를 다 치고.”

“귀한 행사 망치지 말고 썩 꺼져라.”

“귀한 행사...? 귀하다고?”

마리로즈가 귀를 의심했다.

브라함이.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 수많은 동족들을 실험체로 사용하고 살육했던,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고 잔인한 브라함이 타인의 행사를, 타인을 존중한다고?

“....후훗, 내가 잠들어있는 동안 많이 변했나보구나?”

마리로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움찔, 놀란 브라함이 뒷걸음질 쳤다.

마리로즈에게 심장을 꿰뚫리고 뱀파이어의 힘을 잃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다른 사람들 이상으로 브라함은 마리로즈를 두려워했다.

어머니를 뛰어넘는 그녀의 힘은 세월이 지나 더욱 더 강해졌을 반면 자신은 아직도 힘을 되찾아가는 단계에 있는 신세였으니까.

‘또.... 죽는 건가.’

내가 마리로즈를 증오하듯, 마리로즈는 나를 혐오한다.

그 사실을 뻔히 알기에 브라함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

애초에 마리로즈는 본인이 뜻하는 바를 대부분 이룰 수 있는 존재였다. 그녀가 브라함을 죽이고자 마음먹는다면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

‘....이번엔 잠자코 당하지만은 않겠다.’

영원히 지우지 못할 상처라도 입혀주겠다.

다짐하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떠는 브라함의 등 뒤로.

“예상치 못한 손님께서 찾아오셨구려.”

전설의 농부 피아로와 최근 귀환한 아스모펠이 나란히 다가와 섰다. 그리드의 사도 사리엘도 함께였다.

구우우웅....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궁전 전체에 희미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네펠리나의 기운이 강해지기도 했다.

끝으로.

“브라함님은 아버님의 벗이세요. 마리로즈님이 아버님의 벗인 것처럼요.”

브라함을 노려보는 마리로즈의 눈앞으로 로드가 끼어들며 말했다.

수애에게 배운 살인 미소가 마리로즈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친구가 많이 생겼네.”

브라함을 감싸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훑어보고 피식 웃은 마리로즈가 드디어 브라함으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다시 그리드를 돌아보았다.

“그리 무서운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오늘 내가 찾아온 이유는 우리의 미래를 논하기 위해서였을 뿐, 네 벗을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시기가 안 좋았나봐.”

“.....”

이번엔 그리드도 보았다.

마리로즈의 눈빛에 잠시 스친 서운한 감정을.

“그럼 안녕, 다음에 또 찾아올게.”

마리로즈의 몸이 연기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새카만 지하로, 오래 전부터 홀로 잠들어왔던 관으로 그녀는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녀에게.

“다음엔 내가 찾아갈게.”

그리드가 약속했다.

점차 사라져가는 마리로즈의 얼굴을 장식하는 건 기쁨의 미소였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