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16화
왕가의 성인식 절차는 복잡하지 않다.
각국에서 모인 귀빈들 앞에서 예법을 보이고 학식을 논하거나 재능의 편린을 보이는 것.
일종의 학예회다.
초대 받은 손님들은 성인식 주인공의 외모와 품격, 그리고 잠재력 등을 평가하며 주인공의 앞날을 점치고 향후 어떤 관계를 맺어야 좋을지 참고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드의 첫인상은 최고였다.
‘아름답군.’
‘사교계에 데뷔하는 순간 대륙을 들썩이게 하겠어.’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의 조화가 훌륭하다.
모친을 닮아 희고 고운 피부가 자칫 연약해 보일 수 있건만 부친을 닮은 날카로운 눈매가 부족한 인상을 충족시킨다.
올곧은 걸음걸이에 격조가 있고, 귀빈들을 향한 가벼운 목례와 입가의 온화한 미소엔 여유가 있으니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숙함이 묻어났다.
펄럭이는 예복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손등은 고우나 손바닥엔 굳은살이 가득하니 부친에게 검술과 야장일을 배운 듯했고,
파르르....
빛을 뿌리는 정령들이 주변을 따르는 모습을 보아 대현자 스틱세이에게 정령술을 사사한 듯했다.
‘정령이 셋.... 심지어 빛과 땅, 물인가.’
저쯤 되면 정령술만으로 꽃과 나무를 피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고작 15세의 어린 나이에.
감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독 제국의 황제와 공작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스스로 꽃과 나무를 빚을 수 있다는 뜻은....’
‘피아로 공에게 농업을 배우기 쉬운 조건이라는 건데.’
‘설마 그리드 전하와 스틱세이 공뿐만 아니라 피아로 공까지 스승으로 섬기는 건....?’
검술과 야장일, 정령술과 농업.
궤를 달리하는 분야들 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통하는 구석이 있다.
검술을 배우면 체력이 붙고 야장일엔 체력이 필요하다.
야장일을 하면 근력이 붙고 검술엔 근력이 필요하다.
정령술을 배우면 자연과의 친화력이 오르고 농업에 도움이 된다.
농업을 배우면 자연을 이해하기 쉽고 정령을 다루는데 도움이 된다.
‘체계적으로 가르쳤군....’
‘예법부터 흠 잡을 곳이 없다. 아이린 왕비의 훈육 수준이 보통이 아니야. 과연 명가의 핏줄이라는 건가.’
귀빈 중에서도 특히 눈썰미가 좋은 사람들이 감탄을 거듭할 때였다.
“어른이 된 저를 축복해주시기 위해 자리를 빛내주신 귀빈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로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맑고 깊은 목소리가 사람들의 혼을 뺀다.
수많은 여심이 흔들렸다.
보통의 소년은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마성(魔性)이 로드에겐 있었다.
장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와중에 수애가 흐뭇하게 웃었다.
‘정말이지 가르친 보람이 있다니까.’
로드의 표정, 몸짓, 말투, 목소리는 아이린의 훈육만으로 탄생한 결과가 아니다. 로드가 품격을 잃지 않되 이성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게끔 수애가 살짝 교정을 해줬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부모, 형제와 함께 현장을 방문한 각국 왕녀들의 표정을 보라.
로드에게 완전히 홀려버렸다.
이후 로드는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부모님과 템빨국의 명성에 흠집이 가지 않게끔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귀빈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후.
여전히 홀린 표정을 짓고 있는 각국 왕녀들에게 싱긋 웃어준 로드가 검을 뽑아 세운 뒤 귀빈들에게 말했다.
“귀하신 분들의 천금 같은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순 없죠. 부끄럽지만 작은 재주를 부려보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인식은 재능을 보여주는 자리다.
템빨국의 미래를 이끌 왕자의 재능.
여기서 로드가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귀빈들은 향후 방침들을 고민할 것이다.
템빨국과 어느 정도 깊이의 우호를 맺을지, 그 기간은 얼마로 정할지 등등.
귀빈들이 집중하는 순간이었다.
스파앗━!
로드의 검이 반월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다시 사선을 그리며 내려왔다.
두 번의 베기를 하나의 동작으로 해냈는데 무척 신속하고 깔끔하여 흠 잡을 구석이 없었다.
“흐음....”
귀빈들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단지 고개를 주억거렸고 누군가는 턱을 매만졌으며 누군가는 천천히 박수를 쳤다.
표정은 대부분 같았다.
로드의 등장 이후 내내 감탄했던 그들이 처음으로 무표정해졌다.
그만큼 로드가 보여준 검술은 평범했다. 아니, 사실 평범하다는 표현은 커다란 결례다. 굉장히 준수했다고 평가함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감을 품었기에 평범하게 다가올 뿐이다.
‘왜 검무가 아닌 평범한 검술이지?’
그렇다.
귀빈들이 로드에게 기대한 것은 그리드의 검무였다.
한데 검술이라니.
의심이 싹 트기 시작했다.
‘부친의 검무를 체득할 정도의 재능은 얻지 못한 건가.’
‘본디 아비보다 나은 자식은 드문 법이지.’
희망적인 관측도 많았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검술 재능을 평가하기엔 이르다. 검무의 난이도가 워낙 높은 점을 고려해야 돼.’
‘아니, 단 일검을 보고 재능을 논하기엔 무리가 있다. 보통 이럴 땐 대련 형식의 무대를 짜는 게 관례인데.... 설마 끝은 아니겠지?’
‘템빨왕의 가치는 무력뿐만 아니라 대장장이 기술에도 있다. 대장장이의 재능만 타고났어도 검술 재능 따윈 평범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술렁일 때였다.
“....!!”
금발의 여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의 자리는 황제의 바로 뒤.
어지간한 왕국의 왕족보다 높은 서열을 배분 받았다.
당연하다.
그녀의 정체는 제국의 공작, 창성 레이첼이었으니까.
“....?”
“....?”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레이첼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로드를 마주보자 장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는 이들이 생겼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로드 왕자, 그건 크라우젤의 검술이 아니오?”
레이첼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파장은 컸다.
크라우젤.
당대 검성의 이름이 아닌가.
서대륙에서 가장 강한 사람 10명을 논할 때면 어김없이 언급되는 이름이 바로 크라우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알고 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크라우젤은 가장 강한 5인을 논할 때 언급될 것이며, 또 더 긴 세월이 흐른 후엔 가장 강한 1인을 논할 때 언급될 거라는 사실을.
역사상 모든 검성의 잠재력은 그만큼 위대했다.
한데 검성에게 검술을 사사했다고?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짓고서 로드를 바라보았다.
로드가 그리드, 스틱세이, 피아로를 스승으로 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섣불리 믿기 힘들 지경이었는데 스승 중에 크라우젤까지 있었다니....
이쯤 되면 로드의 재능을 우리가 논한다는 것부터 잘못된 전제가 아닐까.
‘스틱세이 공과 피아로 공이야 그리드 님의 신하라지만 크라우젤은 아니다.’
‘어떤 세력에도 소속되지 않고 바람처럼 떠도는 검성이 굳이 로드 왕자를 제자로 거뒀다는 건 그만큼 로드 왕자에게 큰 재능이 있다는 뜻일 터....’
꿀꺽, 마른 침을 삼킨 귀빈들이 로드의 검술 재능을 재평가했다.
평범, 혹은 준수에서 최고로 바꿔버렸다.
적어도 검술이라는 분야에서만큼은 검성이 지닌 파급력이 최고인 것이다.
로드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설명했다.
“네, 운이 좋게도 크라우젤 님께 검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크라우젤 님께서 제 아버님의 절친한 벗인 덕분에 저를 필요 이상으로 좋게 봐주셨어요.”
“...!”
“...!”
그리드와 크라우젤의 관계는 아는 사람만 안다.
고독한 떠돌이인 줄로만 알았던 검성 크라우젤이 그리드의 벗이라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알게 된 일부 귀빈들이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드 국왕과 검성이 함께 대악마들을 퇴치했던 건 일시적 동맹을 맺었던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서로 함께했던 동반자였군.’
문헌에 따르면, 전대 검성 뮐러는 본인의 너무 강한 무력을 두려워했었다.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어 대륙의 판도를 무너뜨릴 것을 염려해 고독하게 지냈었다.
하지만 당대의 검성은 아닌 듯했다.
게다가 하필 템빨국과 깊은 교류를 맺고 있었다.
귀빈들은 생각했다.
이러다간 자칫 템빨국이 제2의 사하란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불편한 침묵 속에서 로드가 또 다른 재능을 선보였다.
신성력의 발현이었다.
레베카교를 상징하는 순백의 신성력이 아닌, 푸른 불꽃처럼 일렁이며 형상화되는 신성력.
그것은 최근 급격히 세를 늘리고 있는 템빨신교 교인들의 신성력을 닮아있되 몇 배는 커다란 몸집을 지니고 있었다.
“아아....”
템빨국을 경계하기 시작했던 일부 귀빈들의 마음 속 불안과 불신이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리드가 신이 된 것을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어찌됐든 그리드는 신이 됐고 로드는 신의 자식 아닌가.
애초에 인간이 평가할 수도, 평가해서도 안 되는 대상이었다.
이번 성인식은 여태까지의 성인식과 달라야했다.
모두가 깨달을 때.
“흐음, 그리드의 자식이라.”
아무런 소식도 없이 대전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여성이 나타났다.
활짝 열린 문틈 사이로 쓰러진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봐도 명백히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놀란 귀빈들이 술렁거렸고 그들을 호위하듯, 혹은 감시하듯 빙 둘러싼 채 서있던 템빨국의 수백 기사가 일제히 검과 창을 뽑아 쥐었다.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출현하였습니다.]
[이지를 초월하는 사기(邪氣)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모든 종류의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뱀파이어의 시선은 하등한 종족을 굴종시킵니다. 의지를 상실하며 신체의 자유를 빼앗깁니다.]
[마리로즈의 매력은 절대적입니다. 이성을 무조건 매혹하며 동성조차 높은 확률로 매혹합니다.]
초대 받지 못한 손님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비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여인은, 단지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굴복시켰다.
“마리로즈....!”
실력을 뽐내는 아들 로드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대응해야하지?
갑작스런 사태에 머리가 굳어버린 그리드는 어떤 판단을 내리는 게 불가능했다.
다만, 몸은 움직였다.
왕좌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걷더니 마리로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꿀꺽.
망부석처럼 굳어버린 귀빈들과 기사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수백 년 전 2대 교황에게 봉인 당했던, 전설의 존재나 다름없는 마리로즈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눈치 챈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일을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리드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 어서 오십시오, 마리로즈 님.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땅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
깊숙이 허리를 숙인 그리드가 헤헤 웃으며 마리로즈를 정중히 모시자 마리로즈가 내뿜던 사기가 거짓말처럼 걷히며 사람들의 숨통이 트였다.
하필 쥬드의 안내를 받은 바람에 현장에 늦게 도착한 샤이닝 왕자가 사태 파악을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