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93화 (1,283/1,794)

템빨 65권 - 15화

“흠 잡을 곳 없는 혈통이로다.”

아이린 왕비의 가계(家系)를 자세히 조사해본 그렌할 공작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시조가 북방의 패왕 로란과 함께 에트날을 건국한 영웅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암군을 배출하지 않은 그녀의 가문 내력에 대해선 솔직히 오늘 처음 알았다.

스테임 가문이 관리하는 영지는 어떤 시대에도 치세를 누렸고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를 거듭할수록 무재(武才)는 희미해졌으나 어질고 곧은 성품은 변치 않고 이어졌구나.’

스테임 가문은 귀족의 귀감이라 할만 했다.

대사하란 제국의 최고 귀족인 그렌할 공작조차 존경심을 품게 될 정도였다. 그렌할 공작은 자신의 후손들이 스테임 가문을 본받길 바라게 되었다.

‘모친의 성품과 부친의 무재를 이은 이상....’

로드 스테임.

그리드의 하나뿐인 아들은 필시 대성하리라.

신이라 칭송받기 시작한 만큼 언젠간 천상으로 떠날지도 모를 부친을 대신해 어질고 굳센 왕이 되어 템빨국을 잘 이끌어갈 테지.

템빨국의 백성들은 물론 템빨국을 맹우로 둔 제국 입장에서도 축복이다.

‘실로 기대 되는구나.’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로 가는 길.

언젠가 보았던 흑발의 소년을 떠올려본 그렌할 공작의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번진다.

올해 드디어 15살이 되어 천천히 재능을 꽃피워갈 템빨왕자 로드의 미래를 떠올려보자 절로 흐뭇해지고 든든해졌다.

상념에 젖어있던 그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를 태운 마차가 갑자기 제자리에 멈춘 까닭이다.

“가, 각하,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황급히 마차 곁으로 달려온 선임기사가 호들갑을 떨었다.

“흠.”

그렌할 공작은 사하란 최고의 권력자다.

이는 즉 서대륙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라는 뜻이며 최강의 정예군단을 호위로 거느렸다.

그렌할 공작의 기사씩이나 되는 인사가 고작 도적떼 따위를 마주쳤다고 이리 당황할 리 없단 뜻이다.

‘이번 성인식을 노리고 불온한 세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템빨국을 경계할 수밖에 없을 세력들이 존재함을 떠올린 그렌할 공작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적에게 저격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보는 얼간이 짓은 하지 않았다.

“....!?”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오러를 일으켜 호신강기를 만든 그렌할 공작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의 앞길을 막아선 행렬의 주인공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크게 놀란 것이다.

“폐, 폐하!!”

털썩!

흙바닥을 개의치 않고 무릎 꿇은 그렌할이 깊이 고개 숙였다.

그리고 그를 무릎 꿇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일어나세요.”

사하란 제국의 황제 바사라.

황도에 있어야할 그녀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렌할에게 바사라가 빙그레 미소지어주었다.

“벗의.... 은인의 집안에 경사가 있다는데 제가 어찌 안 올 수 있겠어요?”

본래라면 경을 쳤을 일이다.

무릇 황제란 외부의 행사에 나서지 않는 법이니까.

황제는 심지어 교황 즉위식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이 사하란이고, 세상의 주인이 황제이므로, 황제는 외세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저 ‘보고’만 들을 뿐이다.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일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게 바로 황제라는 존재다.

이번 로드의 성인식만 해도, 성인식이 끝난 후 그리드가 직접 제국을 방문해 황제에게 무사히 일을 치렀노라 보고해야할 일이었다.

그게 제국이 생각하는 황제의 위엄이었다.

한데 친히 머나먼 타국까지 행차하다니....

기사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여태까지의 황제와는 다른 바사라에게 그렌할 공작이 또 잔소리를 늘어놓을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렌할 공작은 활짝 웃었다.

“맞지요. 다른 어디도 아닌 템빨국의 행사인데 폐하께서 자리를 빛내주셔야 그림이 살겠지요. 제가 눈치껏 폐하를 모셔야했는데 이렇듯 우연히 만난 꼴이 되어 안타깝고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불충한 신하를 욕하소서.”

“그래요, 이번엔 좀 눈치가 없긴 하셨어요.”

“허흠....”

충직하기에 고지식한 그렌할 공작과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황제 바사라.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은 충돌하기도 자주했고, 그만큼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고 편해지고 있었다.

“여어~ 영감!! 엇!? 폐하도 계셨습니까!!”

“다들 여기에 함께 계셨네요. 재앙 이후로 오래간만에 모인 느낌이군요.”

뒤늦게 도착한 모르이즈 공작과 레이첼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제국엔 세 명의 공작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일곱이었을 때보다 도리어 더 든든하게 제국을 지탱하고 있었다.

서로 시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벗이 되어 협력한 결과다.

그리드와의 인연이 만든 결과였다.

***

상어를 형상화한 푸른 대검.

실패작이라는 이름부터 알 수 있듯이 감히 명품이라고 칭할 순 없는 무기다. 하지만 그리드와 함께 숱한 전쟁을 누볐던 그 검은 템빨왕의 상징 중 하나로 꼽혔다.

템빨국의 역사를 자세히 모르는 방문객들이 일개 치안대장인 쥬드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 이유는 그가 그리드의 첫 번째 기사라는 사실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의 등에 매여진 푸른 대검 때문이었다.

저 검은 템빨왕에게 직접 하사 받은 것일까.

템빨왕에게 직접 무기를 하사 받을 정도면 가진 바 직급에 비해 대단한 검사가 아닐까.

그런 의문과 기대가 담긴 눈길로 쥬드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지나치는 방문객들.

그들은 꿈에도 몰랐다.

쥬드가 매고 있는 저 푸른 대검은 실패작이 아닌 성공작이라는 사실을.

<성공작>

등급:레전드리

내구력:2,530/2,530

공격력:1,510~3,266 방어력:280

*민첩성 +100

*일정 확률로 적의 공격을 차단.

*높은 확률로 '5연격'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절단' 스킬 발동.

*스킬 '이등분' 생성.

*착용자보다 레벨이 2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 효과.

*어두운 장소에서 공격력 +30%.

템빨왕 그리드가 실패작을 개량해서 만든 대검입니다. 실패작의 단점을 없애고 강점을 부각시킨 작품으로 시대의 걸작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닙니다.

....

...

잠재력을 개방한 상태의 그리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

구조적 결함을 지닌 실패작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시킨 명품이다.

그리드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굳이 심력을 쏟은 이유로는 2가지가 있는데 첫째, ‘상징이 지니는 힘’을 알아서기 때문이고 둘째, 쥬드가 워낙 실패작을 갖고 싶어 해서였다.

야탄교의 교황청 침략 사건 당시 목숨을 걸고 로드를 지켜줬던 샤이닝 왕자에게 감사와 친애를 담아 실패작을 물려줬던 그리드는 이후 몇 달 동안 쥬드의 게슴츠레한 시선을 마주해야만 했었다.

무슨 일이든 금방 까먹었던 예전과 비교해서 상당히 똑똑해진 쥬드는 꽤나 오랫동안 삐져있었고 그리드는 그런 쥬드를 외면하지 못해 새로운 실패작을 만들어줬다.

심지어 원본보다 배는 좋은 성공작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쥬드는 썩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어쩜 이리도 아름답고 치안이 좋을까.”

폴드 왕국의 1왕자 샤이닝.

로드의 성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그는 언제나처럼 바짝 긴장했었다.

그의 조국은 도적과 몬스터의 출몰이 끊이질 않았고 대부분의 다른 국가들도 허술한 구획에는 치안이 떨어지는 법이라 호위에 특히 신경을 썼다.

한데 템빨국에 진입한 뒤론 긴장이 풀려버렸다.

척박한 조국과 달리 푸르고 평온한 템빨국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까지 갖게 됐다.

템빨국은 그만큼 안전한 나라였다.

모든 지역의 병사들이 잘 훈련됐을 뿐더러 부지런하여 대로변까지 범접하는 몬스터가 없었고, 백성들은 풍족하여 도적떼로 변하는 법이 없었다.

평화라는 단어는 템빨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폴드 왕국 출신답게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샤이닝 왕자는 그런 의문을 품게 됐을 정도다.

“여기서부턴 ‘관리’의 수준이 아니라 ‘정화’의 차원이군요. 몬스터의 기척 자체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이쯤 되면 씨가 말랐다고 표현해도 무방한데요.”

드디어 라인하르트 근교에 진입한 폴드 왕국의 기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들에도, 숲에도, 산에도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질 않았으니 별세계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성녀의 힘인가....?”

템빨국의 성녀는 유명하다.

기존의 신성과는 궤를 달리하는 힘으로 부정한 것들을 ‘소멸’시키는 존재.

라인하르트에 머무는 그녀의 영향으로 몬스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샤이닝 왕자와 기사들은 나름 논리적으로 추론했지만 진실과 전혀 다르다.

성녀에겐 몬스터를 깨끗하게 소멸시키거나 몬스터의 출현을 억제하는 능력이 없다.

라인하르트 근교에 몬스터가 없는 이유는 순전히 네펠리나 때문이었다.

그녀가 라인하르트에 자신의 영역 즉, 레어를 세웠기 때문에 몬스터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해츨링이 라인하르트에 머물고 있단 사실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까.

[완전하기에 혼자를 고집하는 고고한 종족이 그의 종을 자처하였다.]

템빨신의 열한 번째 서사시에 등장하는 ‘완전하기에 혼자를 고집하는 고고한 종족’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아직 그 누구도 몰랐다.

‘그의 종을 자처하였다’는 문장 때문이다.

세상 그 어떤 드래곤이 인간의 종을 자처한단 말인가.

열한 번째 서사시 속 종족을 드래곤이라고 유추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처음 봅니다....”

드디어 라인하르트에 도착한 기사들이 넋을 잃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파.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폴드 왕국 출신인 그들에겐 생경하게 다가왔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놀라기는 샤이닝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대륙 최고 행사 중 하나인 교황의 즉위식에 참석해본 그조차도 이 정도 인파는 충격적이었다.

‘템빨국 건국식 때만 해도 이만큼 많은 사람은 모이지 않았다.’

한데 이제는 왕자의 성인식 정도에 이만한 인파가 모이다니....

불과 10여 년 만에 템빨국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확실히 체감된다.

“헉....”

처음 상경한 촌놈들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샤이닝 왕자와 기사들이 급기야 기겁했다.

파도처럼 긴 행렬이 성문을 지나쳤기 때문인데 행렬의 중심엔 무려 제국의 황제와 공작들이 있었다.

고작 일개 왕자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에서 사절단을 보낸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인데 황제와 공작들이 친히 방문한 것이다.

“그거.”

감탄을 넘어 경악하고 있는 샤이닝 왕자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곰처런 큰 체구의 사내였다.

“다룰 수. 있나?”

사내의 정체를 샤이닝 왕자는 한 눈에 알아봤다.

“쥬드 공, 오래간만이오.”

“누구?”

템빨왕 그리드의 첫 번째 기사.

샤이닝 왕자는 그를 만난 경험이 이미 몇 번이나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상대방은 샤이닝 왕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샤이닝 왕자가 그만큼 존재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기억력이 나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샤이닝 왕자는 쥬드의 지능 수준을 모른다.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 쥬드의 모습을 보고 오해했다.

‘내가 어찌나 부족하면.’

기억조차 못한단 말인가.

자극이 된다.

샤이닝 왕자가 실패작을 뽑아 쥐었다.

“보다시피 다룰 수 있소.”

쥬드의 눈빛이 번뜩였다.

“인정.”

“....?”

“쥬드. 샤이닝 왕자. 기억났다. 이리로. 오시길.”

“....”

템빨왕의 첫 번째 기사 쥬드에게 친히 안내를 받게 된 샤이닝 왕자였다.

최고의 귀빈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곧 성인식의 무대로 낙점됐다는 화려한 궁전에 입장한 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제국의 황제들과 공작들, 수인족 왕과 오크 로드 같은 친 템빨국 인사들뿐만 아니라 평소 대외활동을 잘 하지 않는 변방 국가의 왕족들까지 자리를 빛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개중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도 있었는데 당최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드조차 그녀에게는 쩔쩔 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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