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14화
국대전에 <마왕 토벌전>이 도입된 이후, PvP의 첫무대는 전대 마왕이 오른다는 규칙이 생겼다. 만약 전대 마왕이 PvP에 불참할지라도 이벤트 매치가 성사된다. (국대전 자체에 불참했을 땐 예외)
최고의 실력을 입증하고 마왕의 자격을 얻은 최강자를 향한 일종의 예우였다.
그리고 올해 PvP의 첫무대에 오른 주인공은 데미안이다.
전대 마왕을 돋보일 희생양으로 낙점된 상대 선수는, 전대 마왕과 동급의 실력자가 아닌 이상에야 긴장하거나 절망함이 옳았다.
한데 데미안을 마주보고 선 한국인 랭커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했다. 딱히 명성이 있거나 랭킹이 높은 인물은 아니었는데 자신감이 상당했다.
‘제로스 같은 신진 강자인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열정을 지닌 사람은 모두 똑같이 노력한다.
어제의 약자가 오늘의 강자일 수 있고 어제의 패자가 오늘의 승자일 수 있다.
그게 섭리다.
스윽.
검을 고쳐 쥔 데미안이 교황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마치 그리드를 연상시키는 기수식을 취했다.
‘류진이라.’
사전에 확보해놓은 상대 선수의 정보를 떠올려본다.
클래스는 링커. <사나우의 범>이라는 레전드리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세이렌 근해에서 활동한 기간이 굉장히 긴 것을 보아 해적 출신일 확률이 높은데, 만약 그렇다면 PvP에 상당히 익숙하리라.
‘사나우의 범은 언월도라고 했지. 링커 전용 스킬로 상대방을 속박시킨 뒤 접근해서 압박하는 건가.’
대부분의 링커는 원거리에서 갉아먹는 식으로 운영하지만 전투 운영 방식은 클래스가 아닌 플레이어의 성향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생각해보던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어설픈 정보는 괜한 추측만을 일으킨다. 맹신해선 안 된다.
상대방의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탐색전을 신중하게 진행할 계획이다.
집중하는 데미안에게 한국인 랭커 류진이 맥 빠지는 소리를 지껄였다.
“운이 좋군.”
“....?”
“직업을 바꾸고 퇴물이 된 상대와 싸우게 되다니 말이야.”
“.....”
자신감의 근원이 고작 그런 거였나.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린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신감은 본인의 실력을 믿어서가 아니었나.’
멋대로 재단한 상대방의 실력을 기준으로 승부를 점치는 부류의 인간.
한심하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전부 다 그리드 님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군.’
“게임 못하는 왜놈 주제에 직업빨로 슈퍼스타가 되더니 감을 잃었나? 주제파악을 못하고 교황의 지위를 내려놓다니 말이야. 하핫! 사실 요즘 엄청 후회하고 있지?”
“....”
굳이 긴 말이 필요할까.
인종 차별까지 일삼는 놈과 상종할 이유는 하등 없다.
“그리드의 검무.”
“흥.”
데미안이 스킬을 전개하자 코웃음 친 류진이 <인형 진열>을 발동시켰다.
최대 10인의 대상과 연동해 꼭두각시로 만드는 <링커> 클래스의 궁극기 중 하나다.
대상을 매우 높은 확률로 속박하는 성능을 지녔다.
그리드의 검무를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우뚝!
데미안이 제자리에 멈춰버렸다.
한 걸음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게 됐다.
완전히 무력화된 그를 보고 회심의 미소를 그린 류진이 다음 스킬을 연계하는 순간이었다.
“초(超).”
기류가 날뛰면서 데미안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는다 싶더니 그의 검에 맹렬한 검기가 깃들었다.
공격력을 상승시키고 근거리 공격을 원거리 공격으로 바꾸는 검무.
그리드의 검무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게끔 돕는 이 검무는 굳이 보폭을 밟지 않아도 전개된다.
속박의 영향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류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태까지 초를 쓴 모습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다소 의외라고 여길 뿐.
“춤추는 인형!”
츠파파파팍!!
침착하게 전투에 임했다.
춤추는 인형.
속박시킨 대상을 최소 2초에서 최대 5초 동안 춤추게 만들어 컨트롤 불가 상태로 만드는 스킬이다.
“....?”
미소를 유지한 채 스킬을 연계시킨 류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이 어느새 검기에 베이고 있었기 때문.
그러자 ‘대상을 조종하기 위해선 공격 받아선 안 된다.’는 링커의 최대 약점이 드러났다.
춤추는 인형이 해제됐고 데미안은 자유를 되찾았다.
‘이런 제길!’
인형 진열은 대상의 발을 묶는 기술.
행동 전체를 제약하진 못한다.
인형 진열에서 춤추는 인형을 연계할 때 발생하는 0.5초의 간극은, 데미안이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검기를 날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능력치는 그대로라 이건가?’
공격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어느새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검기의 쇄도를 목격한 류진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방어? 반격?’
거기까지였다.
푸우우우욱!!
류진이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데미안의 검기가 류진의 심장을 꿰뚫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뭐?’
앞서 맞았던 검기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의 검기.
류진은 말 그대로 의문사를 당해버렸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고작 4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데미안의 실력에 불신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환호했다.
초연살.
그리드를 상징하는 3융합 검무의 등장에 열광하는 것이다.
『그리드의 검무는 여러 개를 융합할수록 활용도가 올라가죠. 단일 검무, 2융합 검무는 다소 단순한 감이 있어 공략당하기 십상이지만 3융합 검무부터는 완전히 다른 스킬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공격, 방어, 회피, 반격 다방면으로 응용 가능하거든요.』
『그런 걸 떠나서 그냥 셉니다.』
『...네, 그렇죠. 방금 보셨다시피 그냥 셉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아는 그리드의 검무죠.』
해설진도 흥분을 금치 못했다.
벌써 몇 년째 국대전을 외면하고 있는 그리드의 편린을 타인을 통해서라도 엿보았다는 사실에 세상 전부가 들떴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세이치 PD의 얼굴은 왈칵 구겨졌다.
“무슨 저런.... 어떻게 벌써 3융합 검무를 쓰는 거지?”
템빨신교 신도의 잠재력은 이미 익히 알려졌다.
그리드의 검무의 레벨과 그리드를 향한 신앙이 오를수록 다양한 융합 검무를 습득할 수 있게 된다는 정보는 오래 전부터 만천하에 공개됐었다.
하지만 고작 몇 달 만에 3융합 검무를 재현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제로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반 신도도 아니고 교주잖아요. 당연히 혜택을 받았겠죠.”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빠르잖나. 벌써부터 3융합 검무를 쓸 정도면 앞으로의 성장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텐데, 이쯤 되면 불공평한 수준 아닌가?”
“언젠 뭐 공평한 게임이었습니까? 애초에 세상에 공평한 게임이 어디에 있어요? 운이든, 재력이든, 실력이든 뭐든지 앞서나가는 놈들이 위에 서는 법이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작용하는 게임을 무슨 재미로 하겠는가.
남들보다 노력해서 랭커가 된 제로스는 그렇게 생각한다.
“뭐....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교주라고 해도 3융합 검무는 저거 하나가 끝일 테니까.”
늘 웃는 낯인 데미안의 표정이 사늘하게 식은 것을 보아 상대 선수가 헛소리를 지껄인 눈치다.
그 탓에 흥분해 의도치 않게 전력을 드러내고 만 것이겠지.
‘좋다.’
처음부터 승산 높은 싸움이었는데 승률이 더 올라갔다.
초연살.
베고, 찌르는 강력한 검기를 연속으로 날리는 원거리 공격.
분명히 강력한 검무이지만 제로스에겐 무용지물이다.
판금갑옷을 입는 수호기사의 특성상 원거리 공격에 높은 내성을 보유할뿐더러 제로스에겐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인 <거울갑옷>이 있었으니까.
플레이어 55에서 우승하고 얻은 갑옷이다.
피격 시 입는 데미지가 반감되고 원거리 공격을 매우 높은 확률로 면역하며 면역 시 반사 데미지를 입히는.
‘하필이면 가장 먼저 배운 3융합 검무가 내게 상성이 최악인 초를 기반으로 삼은 검무라니. 데미안도 운이 나쁘군.’
물론 제로스가 데미안이었어도 초를 기반으로 융합 검무를 만들었을 것이다.
초의 범용성이 워낙 좋으니까.
다만 2라운드부터 제로스를 만나게 됐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다시 주가가 오른 데미안을 꺾고 32강.... 아니, 64강까지만 진출해도 내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거다.’
올해 PvP에 진출한 수백 명의 하이 랭커 중 상위 64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세계적인 인지도가 오른다.
그때부턴 탄탄대로다.
일개 방송국 PD 따위가 옆에서 입김을 불어넣을 시도조차 못하는 거물이 될 거다.
『승자! 제로스!!』
1라운드를 통과했다.
묵직한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갑옷 내부에 충격을 전달하는 몽크 랭커에게 간신히 승리하고 대기실로 돌아온 제로스가 집중력을 높였다.
2라운드에서 만나게 될 데미안과의 전투를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했다.
승리를 모색하기 위해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리고 약 2시간 후.
드디어 시작된 2라운드에서 제로스가 무대 위에 올랐다.
거울의 역할을 하는 수십 개의 원판 수정이 달린 갑옷.
대상이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끔 만드는 기물이다.
조준 자체를 힘들게 만들어서 명중률을 떨어뜨리는 구조다.
“데미안 님,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그리드 님의 팬입니다. 하지만 템빨신교에 가입할 용기는 내지 못했죠. 기존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이 시작한다는 게 보통 용기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제로스는 위를 노린다.
솔직히 말해서 템빨단에 가입하고 싶었다.
이제 명백히 템빨단원인 데미안과 굳이 적이 되고 싶진 않았다.
“데미안 님, 저는 당신의 용기를 존경합니다. 같은 일본인으로써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최선을 다해서 싸우겠습니다. 저의 전력으로 당신을 마주하겠습니다. 그게 예의일 테니까요.”
“네, 저도 최선을 다하도록 하죠.”
정중히 인사하는 제로스에게 미소로 화답해준 데미안이 보폭을 밟았다.
[<그리드의 검>의 효과로 <그리드의 검무>가 일부 활성화됩니다.]
<그리드의 검>
등급:신화
내구력:1,938/1,938 공격력:2,959
*공격 속도 50퍼센트 상승.
*그리드의 검무 사용 시 공격력 50퍼센트 상승.
*그리드의 검무 사용 시 명중률 30퍼센트 상승.
*그리드의 검무 사용 시 회피율과 방어력 각 20퍼센트 상승.
*그리드의 검무 숙련도 성장 속도 상승.
*단일 검무 파, 제, 연, 살, 초, 극, 회, 락, 화 활성화
*템빨신의 동상에 기도를 올린 횟수에 따라서 최대 3융합 검무까지 활성화 가능. 단, 하나의 융합 검무만 활성화시킬 수 있으며 재사용 대기 시간은 6시간. 활성화시킨 검무는 1회 사용 시 소멸.
★착용자가 그리드의 검무를 깊이 이해할수록 더 강력한 융합 검무를 활성화 가능.
템빨신교 최초의 신기입니다. 주인이 성장할수록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보검입니다.
템빨신 그리드가 제1대 교주 데미안을 위해 친히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용 조건:템빨신. 템빨신교 교주.
무게:5,500
“....!!”
제로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데미안이 초를 쓰지 않고 근접해온다 싶더니 ‘연살극’의 검무를 추었기 때문.
쨍그랑━!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거울이 부셔졌고 제로스는 잿빛으로 산화했다.
1세대 하이 랭커와 신진 랭커의 수준 차이를 여실히 알려주는 승부였다.
데미안은 완벽하게 부활했다.
PvP 4강까지 진출해 크리스와 싸워서 졌다.
3융합 검무를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몸으로 4강까지 오른 게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올해 국대전 PvP 우승자는 크리스가 됐다.
그리고 국대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왕 토벌전에 등장한 마왕은....
“.....”
그림자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올해 마왕의 정체를 전혀 유추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올해의 마왕 페이커는 여태껏 국대전에 참가한 이력이 전무했으니까.
페이커라는 이름 석자를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콰자작!!
플레이어들은 그림자로 빚은 기사와 병사들이 지키는 4개의 성문을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