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90화 (1,280/1,794)

템빨 65권 - 12화

위태롭다.

대국(大國)이 공들여 쌓아올린 탑이 예고 없이 찾아온 재앙에 무너질 듯 휘청거린다.

“아... 아아아....”

“이, 이럴 수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무구의 비에 처참히 죽어나가는 오크들의 모습을 사령관들이 잠시 넋 놓고 바라봤다.

비현실적이다.

수백, 수천 종의 무구가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정녕 인간의 소행이란 말인가.

‘템빨...신...’

굳어선 사령관들의 뇌리에 그리드를 수식하는 새로운 호칭이 스쳐지나갔다.

신.

한낱 인간이 참칭하기엔 너무나도 고귀한 호칭이건만, 그리드의 이름 앞에, 혹은 뒤에 붙으니 어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병사들에게 천벌을 내리는 무구의 비가 그만큼 위대했다.

“....그리드다!!”

지독한 피비린내가 스멀스멀 코끝을 스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던 사령관들이 일제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선두까지 달려 나간 하비스가 병사들을 덮치는 무구를 쳐내고, 막아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드의 소행이다!! 어서 놈의 위치부터 찾아라! 위축되지 마라!! 뒷걸음쳐봤자 표적이 되기 쉬어질 뿐이다!! 앞으로 전진 해!! 그쪽! 열과 오를 흐트러뜨리지 마라!!”

그리드는 필시 근처에 있다.

오크들을 정확히 조준하고 사격 중인 무구의 비가, 놈의 시선이 전장에 미치고 있음을 입증한다.

판단한 하비스는 군대를 일사분란하게 지휘했다. 광역 버프를 작동시켜 병사들을 진정시키고 민첩하게 만든 뒤 사방으로 산개시켰다. 방패병들을 직접 통솔해 아군을 최대한 보호함과 동시에 그리드가 숨어있을 만한 지형들을 찾아 지목했다.

그의 뛰어난 지휘능력 덕분에 병사들은 흩어졌으나 질서를 지켰고, 질서를 지킨 채 흩어진 병사들의 이동경로는 수색대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했다. 그리드의 ‘저격 위치’로 의심되는 지점들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하비스가 예측한 모든 지점에 그리드가 없었다.

펄럭━

이곳에도 없다는 뜻으로 흔들리는 깃발.

“....!!”

마지막 보고까지 듣고 놀란 하비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이 그의 시야 가득 들어왔다.

하늘 역시 깨끗했다.

그리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데 무구의 비가 쏟아졌다.’

하비스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니 별동대의 위치가 어쩌다가 발각당한 거지?’

별동대의 행군 경로는 오늘 낮 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다. 같은 편조차 무작정 신뢰할 수 없어 도중에 몇 번이나 경로를 바꿔 진군했다.

근데 들켰고, 저격당했다.

정작 중요한 저격수는 온데간데없다.

‘이거 설마.’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이쪽에서는 인지할 수도 없는 먼 거리에서부터....?

‘....아니, 그건 말도 안 된다.’

궁성의 전용 스킬이라는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세상에 궁성은 단 한 명, 지슈카밖에 없다.

‘설사 멀리서 본다고 해도 여기까지 스킬을 쓴다는 건 불가능해.’

원거리 공격에도 한도라는 게 있다. 영향범위가 보통 수십 미터로 한정된다.

애초에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스킬을 쓴다.’는 공식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분명히 근처 어딘가에 숨어있다.’

영향범위가 ‘시야’인 스킬은 매우 드물다. 보통 레전드리급 스킬에나 그런 효과가 붙기 때문.

하비스의 상식으로는 시야와 스킬의 연계에 한도가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몰랐다.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므로 이곳 주변에 그리드가 숨어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다른 사령관들의 판단도 마찬가지였다.

-오크 왕국 서북부에 그리드 출현. 다시 한 번 전달한다. 오크 왕국 서북부에 그리드 출현.

왕웨이가 상부에 즉시 보고했다.

이제 곧 라인하르트 곳곳에서 테러가 발생할 것이다.

그리드의 시선을 돌릴 수 있다.

“그리드! 이제 곧 라인하르트에서 소동이 벌어질 텐데 당신이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있나? 아들을 걱정해야할 텐데?”

보이지 않는 그리드를 향해서 왕웨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전장은 고요했다.

상처 입은 병사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왕웨이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느긋하게 기다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마법을 사용했다.

“디텍트!”

번쩍-!

왕웨이는 아무래도 군부를 책임지다보니 암살의 위험에 노출되곤 한다. 그래서 어쌔신의 기척을 감지하는 아티팩트와 은신을 해제시키는 아티팩트 등을 구비했는데 이 투명화 무효 마법 또한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발현하는 것이었다.

“역시....”

왕웨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

디텍트 마법을 썼는데도 주위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템빨단의 상징인 ‘투명망토’를 뒤집어 쓴 채 주변에 숨어있었을 그리드가 황급히 이곳을 떠났다는 증거였다.

“후훗, 그래픽 쪼가리라고 해도 제 새끼라 이건가. 다시 행군을 시작한다!”

정부의 힘을 빌려 철저히 준비해놓은 보람이 있다.

그리드와 굳이 싸우지 않고도 쫓아내버렸으니 이제 거칠 게 없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적’과 싸워서 이겼다는 착각에 빠진 왕웨이가 다시 행군 명령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응? 저게 뭐야?”

“내 눈이 잘못 됐나....”

병사들이 수군거렸다.

‘파도’가 온다는 등 괴상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이곳은 평야인데 말이다.

단체로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뭐, 그럴 만도 하다. 갑자기 황당한 습격을 당해버렸으니 정신이 나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눈살을 찌푸린 왕웨이와 하비스가 병사들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쿠르르르르르르....

지평선을 뒤덮으며 나타난 푸른 물결이 이쪽으로 밀려오는 광경을.

병사들의 말처럼 그것은 파도였다.

“저게 무슨....”

어째서 평야 한복판에 파도가 일어났단 말인가?

의문에 빠지는 왕웨이와 하비스의 생각이 거기서 끊겼다.

덮쳐오는 파도의 속도는 그들이 인지하는 것보다 수십 배 더 빨랐고, 파도가 그들을 스친 순간 그들의 머리는 베여 사라졌기 때문이다.

***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

....

...

“이거 설마 너프 당하는 건 아니겠지....”

오크 왕국의 요새도시 루파.

다소 원시적인 풍경의 도시 성벽 위에 올라선 그리드가 벙 찐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최대 10킬로미터 바깥까지 볼 수 있는 <바르바토스의 시야(5)>와 원덕구, 그리고 무패왕의 검술의 조합이 기대 이상의 위력을 자랑했기 때문.

물경 10만이 넘었던 적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에 당한 건지도 모른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학살을 일으킨 장본인 그리드조차 등골이 오싹해졌을 정도다.

‘....경험치가 이렇게 많이 오른 걸 보면 거의 전멸시켰다고 봐도 무방하겠군.’

신장의 도움을 받고 신격까지 이용해서 무패왕의 검술을 총 9번이나 때려 박았다. 그전에 원덕구로 충분한 양념까지 쳐놨었다.

바르바토스의 시야의 최대 지속 시간이 끝나 더 이상 전장의 상황을 살필 수 없었지만, 그리드는 12만 오크 대군이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사실을 경험치 게이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약 10퍼센트.

최소 한 달 이상 사냥해야 올릴 수 있는 경험치를 한 번에 올려버렸다. NPC가 주는 경험치는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보다 압도적으로 적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굉장히 많은 오른 것이다.

‘깨달음 효과가 크게 작용한 거 같다.’

상위 스킬들을 연계해서 어떤 보너스가 발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 그리드가 등지고 서있던 워프 게이트로 돌아섰다.

저벅.

워프 게이트에 한 걸음 들여놓는 순간.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에 입장하였습니다.]

알림창이 떠올랐다.

스틱세이가 만든 워프 게이트는 하루마다 이용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말이지 완벽하게 유용했다.

“무슨 소란이야?”

궁전에 들어선 그리드가 분주히 돌아다니는 기사들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임기사 로이먼이 정중하게 인사한 뒤 대답했다.

“아스모펠 공께서 거동수상자들을 발견해서 체포했습니다. 한데 워낙 숫자가 많고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려고 했다는 증거가 없어 상황이 다소 난처합니다. 물론 아스모펠 공을 의심할 순 없으니 일단은 심문에 능한 전문가들을 수배해볼 생각인데....”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스모펠? 아스모펠이 돌아왔어?”

브라함이 템빨국의 일원이 됐던 날.

브라함과의 대련에서 패배한 아스모펠은 이후 몇 달 동안 수련에만 열중했다.

브라함에게 진 게 분해서 막연하게 강해지겠다는 열망을 품은 게 아닌, 어떤 희미한 깨달음을 얻고 깨달음의 가닥을 잡기 위해 애쓰는 눈치였다.

그리드는 그런 아스모펠을 묵묵히 지켜봤다. 아스모펠이 수련에 집중할 수 있게끔 충분히 배려해줬다. 아스모펠은 그런 그리드의 배려를 무관심이라고 오해하고 의기소침해졌지만 그리드는 모르는 일이다.

어찌됐든 그리드는 ‘2인자의 집념’이라는 특성을 지닌 아스모펠을 믿고 있었다.

2인자의 집념.

누군가와 싸워 패배했을 때 확률적으로 발생하는 패시브 스킬.

발동확률이 극악인 듯한 그 패시브 스킬은 아스모펠을 성장시키는 기폭제다. 발동할 때마다 아스모펠은 새로운 스킬을 얻으며 모든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했다.

그리드가 아스모펠에게 큰 기대를 걸어왔던 이유다.

그래서 급기야 수행을 떠나고 싶다는 아스모펠을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이후 아스모펠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변했을까?’

기대되는 한편, 오랫동안 떨어져있던 친구와 재회하는 느낌이라 너무 기쁘다.

로이먼의 안내를 받은 그리드가 아스모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32지옥.

일명 템빨단 지옥지부라고 명명한 그곳에 예상치 못한 거물이 방문했다.

천 년을 살아온 악마 글러트를 경악시킬 정도로 엄청난 거물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이곳이 그리드의 근거지라지? 내게도 종종 놀러올 권한이 있는 것 같다만.”

레라지에.

서열 제10위의 대악마다.

그리드와 힘을 합쳐 바르바토스의 권속을 죽였다는 사실에 기쁜 것일까.

그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그리드에게 호의적이었다.

“저 서큐버스들은 무엇이냐?”

“그리드의 부하들이에요.”

“흐음, 32지옥의 마족들을 부하로 삼다니. 어울리지 않게 부하들의 수준이 낮구나. 내 전차병들을 빌려줄 테니 그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도록 하라고 해라.”

“....!”

레라지에의 전차군단은 서큐버스와 비교도 안 되게 강력하다.

서큐버스들은 그리드가 악마들과 싸울 때마다 아무 것도 못하고 숨어있기 바빴지만 레라지에의 전차병들은 그리드와 함께 싸워줄 수 있을 정도다.

유라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전달해 놓을게요.”

그리드의 영향력은 지옥에서도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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