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88화 (1,278/1,794)

템빨 65권 - 10화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며 굴절된 형형색색의 빛이 레베카 여신의 동상을 신비롭게 물들인다.

찬란하고 거룩한 광경이었으나 그 아래 무릎 꿇은 성직자는 현혹되지 않았다.

스윽.

차가운 시선으로 동상을 올려보던 성직자가 관을 벗어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올린 기도는, 그간의 믿음에 종지부를 찍는 그 나름의 의식이었다.

쿠르릉...

구슬피 우는 하늘이 먹구름을 불러왔다.

빛이 구름에 종적을 감추자 어둠이 신전을 물들였다.

콰쾅!!

천둥이 울린다.

그리고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 레베카 여신의 동상이 화면에 클로즈업 됐다.

절묘하게 드리운 그림자가 동상의 미소를 지웠다.

여태껏 보여줬던 자애는 온데간데없고 한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성스러운 관(冠)과 검(劍)을 내려놓고 떠나는 성직자를 마치 노려보는 듯했다.

하지만 성직자는 위축되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올곧은 걸음걸이로 끝까지 당당하게 걸었다.

거대한 신전의 복도는 매우 길어서, 걷는 동안 어느새 먹구름이 걷혔다.

밖으로 나온 성직자는 자신을 환영하며 새로운 축복을 내리듯 떠있는 커다란 태양을 보았다.

“....”

성직자가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레베카교의 상징이었던 순백의 예복을 벗고 대신 갑옷을 입었다. 검과 망치의 문장이 새겨진 갑옷이었다.

그에게 가까이 붙은 카메라가 선회하며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끝부터 얼굴까지 차례대로 화면에 담는다.

이내 카메라와 그의 시선이 마주치는 구도가 되자 화면 하단에 그를 소개하는 자막이 깔렸다.

데미안.

템빨신교 교주.

***

제6회 국가대항전 오프닝 영상이 큰 화제에 올랐다.

모든 플레이어가 선망하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닌 교황의 지위를 버리고 템빨신교의 교주가 되기를 선택한 데미안.

안 그래도 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그가 영상의 대미를 장식했으니 사람들은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데미안이 보여줄 ‘검무’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5회 국대전에 이어서 6회 국대전에도 불참을 선언한 그리드의 검무를 타인을 통해서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하는 눈치였다.

제1회 국대전에서 PvP 우승후보들을 무참히 도륙했던 살(殺)과 연(聯)부터 시작해 마왕토벌전에서 보여줬던 융합 검무들에 이르기까지....

데미안은 과연 어디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

『데미안이 교황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템빨신교의 교주가 된 이유가 드디어 곧 밝혀지겠군요.』

『템빨신교 교주라는 지위, 혹은 직업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자랑할까요? 지존 그리드의 가호를 한 몸에 받는 만큼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얻어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게 사람들의 예상인데 과연 정말일까요?』

『예, 올해의 데미안은 역대 최고의 활약을 펼칠 겁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템빨신교의 최대 장점은 ‘그리드제 아이템’의 위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에 있는데 템빨신교 교주쯤 되면 그리드가 직접 만든 아이템을 중무장하고 있을 거거든요. 그것도 최신품으로요.』

“....푸웃!!”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우유를 시원하게 마시던 데미안이 코로 우유를 뿜었다.

세간의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겁한 것이다.

‘아직 쥐뿔도 없는데.’

템빨신교 교주는 아니, 템빨신교의 모든 교인은 분명 커다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검무의 숙련도를 충분히 쌓아야했고 전문가들의 분석처럼 템빨을 받아야했다.

그러나 현재 데미안에겐 아무 것도 없다.

그는 아직 2개의 2융합 검무를 구현하는 게 고작이었고 보유 중인 그리드제 아이템이라고 해봐야 옛날에 구매했던 검과 갑옷, 작년에 선물 받은 방패가 전부였다.

올해의 데미안이 역대 최고의 활약을 펼칠 거라는 사람들의 기대는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애초에 내가 저렇게 비중 있게 다뤄질 거라곤 알려주지도 않았잖아....”

씬을 촬영할 때 유난히 촬영 시간이 긴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그 씬이 영상의 하이라이트였을 줄이야.

오프닝 영상에서 저렇게 특정 개인이 부각된 경우는 그리드와 크라우젤 이후 최초 아닌가?

‘어쩌다가 내가 이런 거물 취급을 받게 된 거지? 지슈카 님이나 크리스 님도 계시는데 왜 하필 나를....’

이게 바로 그리드 효과인가 싶다.

템빨신교의 어그로가 상상 이상이다. 라고, 데미안은 생각하며 한탄했지만 필요 이상의 겸손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를 처단한 건 순전히 그리드의 활약이었다지만 이후 여신의 대행자가 되어 레베카교를 재건한 건 데미안 본인의 활약이었다.

또한 데미안이 교황이 되는데 그리드가 크게 일조하긴 했지만 데미안에게 자격이 없었다면 그리드가 돕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후 레베카교가 크게 융성했던 것도 순전히 데미안의 노력과 수완 덕분이었다.

데미안 본인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세상이 보는 데미안은 그리드 다음가는, 혹은 크라우젤과 비견되는 거물인 셈이다.

심지어 작년 국대전에서 ‘좀비 마왕’으로 대활약했던 전적도 있으니 오프닝 영상의 대미를 장식할 자격이 그에겐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후우....”

지금 현재 의기소침해져서 한숨 쉬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템빨신교 교주가 된지 얼마 안 되는, 그리고 그리드에게 아이템 제작 의뢰를 맡길만한 재력이 없는 현재의 데미안은 작년과 비교해서 몇 배나 약해진 상태다.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어쩌면 출전하는 종목마다 죽을 쑤고 템빨신교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차라리 불참했어야 맞는 건데.’

참가 여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만난 재수 없는 방송국 관계자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집도 안 팔리고.’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데미안이 문득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

교황 시절에 누렸던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고 하지만 자신은 템빨신교의 교주다.

그리드의 검무를 조금이나마 계승했다.

....그리고 그리드의 검무는 늘 최강이었다.

데미안은 당시 최고의 주가를 누리고 있던 휴렌트를 단 일격에 해치웠던 살의 검무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물론 요즘 랭커들이 단일 검무 한 방에 죽을 일은 만무하겠다만은 한 방이 안 되면 두 방, 두 방이 안 되면 세 방, 세 방도 안 되면 네 방을 꽂아 넣으면 그만 아닌가?

‘그래, 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이길 수 있다.

특히 플레이어 56인지 55인지의 출전자들.

실력과 업적보단 방송의 힘을 빌려 얻은 인기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신진 랭커들과 비교해서 내가 부족할 리 없다. 만약 그들보다 부족하다면 그건 새로운 클래스의 문제가 아닌 자질의 문제일 테지.

생각하며 자신감을 얻은 데미안은 보름 후 개최된 국대전 첫 번째 종목부터 피똥을 쌌다.

“허억.... 허억....”

각종 버프 스킬과 회복 스킬의 상실.

여태껏 당연하게 누려왔던 유틸성을 잃은 데미안은 단지 공격성을 올려주는 패시브 스킬 1개와 몇 개의 공격스킬만으로 타인과 경쟁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실히 실감했다.

‘그리드 님이 욕먹을 일이 아니었잖아?’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1차 국대전 당시의 그리드를 조롱했었다. 컨트롤을 못한다는 이유였다.

한데 이제와 당시 그리드의 입장을 체험해보니 컨트롤을 못했다기보다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그마의 후예에서 대장장이를 빼면 근접 딜러라고 봐야하는데 방어기도 없고 돌진기도 없다. 그나마 검무를 회피기로 응용할 순 있지만 온전한 회피기와 비교하면 실용성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들을 사냥할 땐 몰랐는데 대인전에선 약점으로 공략당하기 딱 좋아.’

새로운 융합검무를 습득해가는 과정에 차차 나아지겠지만, 현재 단계에서 그리드의 검무는 너무 수동적이다. 대인전에서 터무니없이 약했다. 매우 높은 공격력을 제외하면 별다른 장점이 없고 긴 예비동작 등 오히려 단점이 많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 선 데미안이 금메달을 목에 걸자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피똥을 쌌다지만 결국 1등을 차지한 그였다.

미궁을 헤매는 과정에서 마주쳤던 다른 모든 참가자들을 강력한 검무로 도륙했다.

다만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는 게 문제지.

『으음.... 데미안이 모두의 예상대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군요.』

『근데 뭐랄까. 매우 투박한 전투가 반복 됐죠? 데미안 특유의 색채를 찾아볼 수 없는 전투였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본래 데미안은 민첩한 방패술로 상대방을 압박해서 공격을 봉쇄하거나 신성 마법으로 움직임을 제약한 뒤 깔끔하게 대상을 쓰러뜨리는 세련된 느낌의 전투를 구사했는데 오늘은 마치.... 음....』

『뭘 돌려 말해요? 그냥 실망입니다, 실망. 저게 어딜 봐서 올해 PvP 우승후보의 실력이란 말입니까? 수많은 전투 데이터가 누적된 덕분에 요즘 나오는 전투 지침서는 수준이 매우 높습니다. 요즘은 200레벨 전사 플레이어도 저렇게는 안 싸워요. 제 생각엔 데미안이 일부러 실력을 숨긴 게 아닌 이상 폼이 많이 떨어진 것 같군요. 뭐, 늘어질 만도 하죠. 얼마나 아쉬울 게 없으면 교황직까지 내려놨겠습니까? 앞으로 데미안은 하락세를 걸을 일만 남았습니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킨다는 건 보통 열정과 야망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몇몇 사람들은 데미안이 열정을 잃었다고 오해했다.

그만큼 데미안이 보여준 실력이 별로였다.

***

템빨국이 로드 왕자의 성인식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결국 그렇게 됐나.”

재상 라우엘에게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오크 왕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예측했던 일이다.

본래 오크는 부족 단위의 생활을 영위했던 원시 종족.

새로운 오크 로드 테루찬이 왕국의 건설을 바랐고, 그리드가 그를 도와 오크 왕국이 탄생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오크 귀족들은 국가를 울타리가 아닌 감옥으로 받아들였다. 부족 사회에서는 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건만 왕국에선 온갖 법규에 얽매여야했으니 답답할 수밖에.

오크 귀족들의 불만은 계속해서 쌓여만 갔고 오크족 플레이어들은 그들을 이용할 조짐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이유는 오크족 플레이어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였다. 그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관리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때만 기다리고 있었나보군.’

공교롭게도 템빨단원의 주요 전력 대부분이 국대전 참가로 자리를 비운 상태다. 템빨왕자 로드의 성인식으로 바쁜 시기이기도 했다.

인력이 부족해서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꽤 긴 시간과 자금을 소요해야할 듯하다.

‘독립에 성공하는 부족의 숫자를 최소화시켜야하는데....’

오크들이 다시 부족 단위로 쪼개지면 오크족 플레이어들이 너무 득세하게 된다. 대부분이 중국인 플레이어인 그들이 부족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키울 경우 템빨국 입장에서 좋을 게 없었다.

미간을 좁힌 라우엘이 반란군 진압 병력으로 차출할 템빨단원들의 목록을 정리하기 시작한 그때였다.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오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은 들었다만 테루찬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최근 며칠 동안 대장간에 틀어박혀 있던 그리드가 라우엘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의 얼굴에 묻은 검댕이 안 그래도 예민한 라우엘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젠 일국의 왕인 것으로 모자라 신이 되신 마당에 몸가짐에 더 신경 쓰셔야하는 거 아닙니까?”

“인간미 있는 모습이 오히려 호감을 얻는 거야.”

애초에 신이라고 해봤자 아직은 명예직 비슷한 수준에 불과하고.

뒷말을 삼킨 그리드가 라우엘이 작성 중이던 목록을 확인했다.

“병력을 이 목록대로 차출하면 라엘라하고 제드노스가 너무 고생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성인식이 끝날 때까지 왕도의 방비를 철저히 해야 하니 그 이상의 병력을 차출하는 건 힘들어요. 그건 그렇고 물건은 다 만드신 겁니까?”

“응, 데미안이 엄청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 흐음, 내가 잠시 다녀올까....”

“어딜요?”

“어디긴 어디야. 반란 진압하러 간다는 거지.”

“안 됩니다. 바로 3일 후에 성인식이 시작되는 마당에 전하께서 자리를 비우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3일이면 충분하지.”

오크 왕국의 지도를 펼친 그리드가 남쪽과 북쪽을 지목했다.

“애들한텐 여기만 맡으라고 해. 나머진 내가 해결할 테니까.”

“....혹시 신은 몸이 10개라도 됩니까?”

그리드가 담당하겠다는 구역엔 총 43개의 반란 발생 포인트가 있었다. 혼자서, 그것도 3일 만에 그들을 전부 제압한다는 건 몸이 10개가 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여유가 넘쳤다.

“내가 눈이 너무 좋아져서 말이지.”

“....?”

“어쨌든 다녀올게. 이 아이템들이나 데미안한테 전해줘.”

“아니 잠깐.... 전하! 야! 지금 당신이 그럴 때가 아니라고!!”

그리드를 붙잡아 세우려고 반말까지 해보는 라우엘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라우엘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이 웃어준 그리드는 이미 워프 게이트로 몸을 던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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