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08화
시야가 중요치 않은 게임이 있겠느냐만, Satisfy에선 시야의 중요성이 특히 더 부각된다. 일부 광역 스킬들이 ‘시야가 미치는 범위’에 작용하기 때문인데 무패왕의 검술이 대표적인 예다.
원덕구로 내리는 무구의 비처럼 ‘대상을 지정해서’ 공격하는 원거리 스킬 또한 더 크고 먼 시야가 있을 경우 활용도가 높아졌다.
만약 그리드에게 제3의 시야가 생긴다면, 그의 힘은 그가 없는 장소에서도 발현되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쿠콰콰콰콱!!
“큭!”
전후, 좌우, 상하.
어디서든 갑자기, 아무런 전조 없이 발생하는 게이트를 타고 솟구치는 검은 손이 그리드를 집요하게 노린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저격’이 그의 정신력과 체력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젠장, 뭐 이딴 개사기 능력이 다 있지?’
저격 포인트를 특정할 수 없는 저격이라니.... 두 눈 뜨고 당하라는 소리밖에 더 되나?
당하는 입장에선 욕이 나오는 게 당연할 지경이다.
정신없이 도망치며 욕설을 짓씹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에 휩싸였다.
‘근데 도대체 왜 나를 노리는 거야?’
바르바토스의 권속 크르차는 레라지에와 싸우는 중이다. 그리고 크르차가 레라지에와 싸우게 된 경위는 데빌 슬레이어 유라에게 있었다.
바르바토스의 저격 우선순위는 레라지에, 혹은 유라여야 마땅한 셈이다.
한데 왜 나를 노린단 말인가?
‘유라를 노리지 않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납득이 안 되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이 저격이 레라지에에게 향하는 것이다.
그녀는 크르차에게 상성에서 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주도권을 서서히 되찾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실력이면 크르차를 상대하는 동시에 바르바토스의 저격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그로가 레라지에쪽으로 끌렸어야 크르차를 쉽게 잡았을... 아, 그래서 나를 노리는 건가.’
분명하다. 바르바토스는 레라지에를 저격해봤자 효율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자신보다 서열이 2개나 낮은 상대를 무시하기는커녕 도리어 경계하고 있었다.
악마의 호전성을 억누르면서까지 말이다.
‘레라지에가 특별하긴 한가보군. 유라를 노리지 않는 이유는 유라의 전투력이 아직 크르차를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같고.’
지성을 지닌 네임드 보스들은 플레이어의 전투력을 식별하고 사냥 순서를 결정한다. 24시간마다 나타나 그리드에게 극한의 수혈을 썼던 엘핀스톤처럼 가장 강한 플레이어를 최우선으로 노리는 보스가 있는 반면 가장 약한 플레이어를 최우선으로 노리는 보스가 있는데 바르바토스의 경우 전자에 속하는 듯했다.
“지옥 도약.”
그리드가 상황을 분석하는 동안 유라가 지옥과 인계를 잇는 소규모의 차원문을 열었다.
본래 그것은 데빌 슬레이어 전용의 ‘이동’ 기술이었지만,
콰드득!!
유라는 다르게 응용할 줄 알았다.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발생시키는 게이트 앞에 차원문을 겹치게 만들어서 바르바토스의 저격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시켰다. 그리드를 노리고 뻗어졌던 검은 손이 유라가 연 차원문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애꿎은 곳에서 나타나 허우적거렸다.
‘이거 위험....’
도움을 받았음에도, 그리드의 심장은 도리어 철렁 내려앉았다.
유라의 활약이 바르바토스의 어그로를 끄는 원인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역시나.
콰자작!!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그리드가 아닌 유라를 노리기 시작했다.
유라보다 그리드의 위험 순위를 높게 책정했던 놈의 평가가 바뀐 듯했다.
“피해!”
아무런 징조 없이 유라의 등 뒤에 열리는 게이트를 초월자의 감각으로 감지한 그리드가 다급히 소리쳤고, 유라는 자신의 등 뒤에 게이트가 열렸다는 사실을 그 순간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콰자작!!
게이트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손이 유라의 몸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유라!!”
그리드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반면.
괜찮아요.
검은 손에 붙잡힌 유라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쏴아아아━
그녀의 은색 갑옷 표면에 흐르는 옥빛의 마력이 강렬한 빛을 방출했다.
“....!?”
검은 손은 무시무시한 마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드의 망토는 그 손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마기에 침식당해 내구력을 깎이고 기능이 저하됐을 정도다.
한데 그 마기가 옥빛의 마력 앞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정화가 아닌 제압.
데빌 슬레이어의 마력은 신성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마기를 억누른다.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그녀의 모습이 그리드를 당혹시켰다.
마기의 잔재를 툭툭 털어낸 유라가 설명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바르바토스는 알렉스에게도 까다로운 상대였어요. 그래서 알렉스는 연구했고, 진화했죠.”
그리고 그 진화된 능력이 당대의 데빌 슬레이어에게 계승됐다.
알렉스와 싸워서 한 번이라도 패배했던 악마들은, 설령 대악마라고 할지언정 유라와의 상성 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당장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유라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오...!”
종종 드러나는 데빌 슬레이어의 진가는 그리드를 감탄시킨다.
유라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유라에게 앞으로의 난관들을 해쳐나갈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사실이 그리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게 만들었다.
물론 그 환한 표정은 얼마 못가 지워졌다.
콰작! 콰자자자작!!
바르바토스의 우선 저격 순위가 다시 그리드로 돌아온 까닭.
강제 발동되는 초월경에 의존해서 3차례의 저격을 피해낸 그리드의 머리가 부글부글 끓었다.
‘더럽게 짜증나는 놈일세.’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놈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며 지속적으로 체력이 소모되는 상황이다. 이건 진짜 최악이다. 바르바토스의 저격 횟수에 제한이 있지 않은 이상 결국 내가 먼저 지쳐 쓰러지게 마련이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점은 바르바토스의 저격 쿨타임을 파악했다는 것.
단발의 경우 2초, 2연발의 경우 5초, 3연발의 경우 9초다.
그 이상의 연사는 아직 겪어보지 못해 모르겠지만, 최소 2배 이상의 쿨타임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보였다.
꿀꺽, 저격을 피할 때마다 마기의 잔재에 노출되며 소모된 생명력을 물약을 마셔 회복시킨 그리드가 레라지에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그녀의 작은 발이 크르차의 안면을 짓밟고 있었다. 유난히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던 이유는 신장에 콤플렉스가 있어서가 아니라 무기로 활용하기 위함인 듯했다.
캐캥!
굽에서 튀어나온 송곳에 찔린 크르차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뒷걸음치는 놈의 이마에 구멍이 뻥 뚫려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암수를 쓰다니! 과연 대악마답게 비열하구나! 모든 마족의 귀감이라 칭할 만하다!! 크르르!”
“겁쟁이처럼 멀리 숨어서 총이나 쏘는 네 주인과 비교하면 아직 멀었느니라.”
“컹컹! 맞다! 네놈은 바르바토스 님과 비교하면 아직 한참 멀었다!”
서로 비꼬는 거야, 칭찬하는 거야?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음에도 해석이 힘들다.
“....!”
혀를 내두르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크르차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
‘이런 빌어먹을, 개라서 개콘가.’
바르바토스는 권속의 시야를 이용해서 사냥감의 위치를 파악하고, 저격한다.
바르바토스의 저격을 피하기 위해선 크르차의 눈에 띄지 않는 게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잠시 멈춘 틈을 이용해 엄폐물 뒤에 숨었건만 크르차에게 위치가 너무 빨리 발각당해 버렸다.
‘잠깐이라도 숨 좀 돌리고 싶었는데 염병.’
대전 입구로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순보를 써서 위치를 바꿨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 그리드가 숨어있던 자리에서 검은 손이 솟구쳐 올라왔다.
퍼펑-! 퍼퍼퍼퍼퍼퍼펑!!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긴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안 레라지에와 크르차가 다시 격전에 돌입했다. 둘의 주먹과 발차기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음이 폭발했고 둘의 공격이 맞부딪칠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가 대전을 뒤흔들었다.
‘엄청나군.’
지옥불의 열기에 점액이 메마르고 권능을 잃은 레라지에가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전투기술이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평생을 단련해온 무도가처럼, 그녀는 자신의 육체를 가장 이상적인 무기로 활용할 줄 알았다. 승리를 향한 집념이 그녀를 꾸준히 연마시켜왔으리라.
‘....각이 좋은데?’
레라지에와의 전투에 너무 열중한 탓일까.
칼바바의 기습을 대비해서인지 일말의 빈틈도 보이지 않던 크르차가 갑자기 허점을 드러냈다. 다시 숨어버린 그리드를 찾아내지 못하자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드를 시야의 사각에 둔 채 등지고 섰다.
초를 써서 확정 순보를 전개해 접근한 뒤 검무를 꽂아 넣는다면 치명상을 입힐 거라는 확신이 생길정도로 커다란 허점, 그건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이었다.
‘지금이 절호의 기습 타이밍이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그리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순간,
콰자자작!!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초월경이 발동했으나, 그리드는 저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드가 발을 내딛을 지점을 예측한 듯이 쏘아진 저격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즉시 반응해서 피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치이이익!!
검은 손에 붙잡힌 그리드의 오른 발이 검게 타들어갔다.
[<+1 천지를 발밑에 둘 오만한 청룡의 부츠>가 마기에 침식당합니다.]
[내구력이 무한인 아이템입니다. 손상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부츠는 멀쩡했다.
탐욕으로 만든 신화급 아이템답게 손상되지 않았고 손상에 따른 기능 저하도 없었다.
다만.
[2,5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신의 상처를 타고 마기가 침식합니다.]
[‘내상’을 입었습니다. 마기에 오염된 일부 장기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30,000의 추가 피해와 함께 ‘중독’, ‘출혈’, ‘물약 복용 불가’, ‘혼란’의 상태이상이 동반됩니다.]
[중독에 면역하였습니다.]
[출혈 면역에 실패하였습니다.]
[물약 복용 불가 면역에 실패하였습니다.]
[혼란 면역에 실패하였습니다.]
방어구의 내구력이 무한이라고 해서 공격에 뒤따르는 충격을 온전히 흡수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부츠 속 그리드의 발이 마기에 썩어 들어갔다. 상처를 통해서 마기가 깊숙이 침투했다.
“쿨럭....!”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는’ 물리적 상태이상이 그리드에게 커다란 고통과 위기를 선사했다.
특히 상태이상 ‘혼란’이 큰 문제였다.
혼란은 조작을 힘들게 만든다.
그리드의 몸이 마치 실 끊어진 인형처럼 휘청거렸다.
‘설마 공격을 허용할 때마다 이런 일을 겪어야한다고?’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
혹시 ‘공략 불가 대상’이 아닐까, 그런 의문이 생길정도로 대단한 놈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격하며, 단 한 번의 저격으로 대상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놈을 상대로 승산을 점친다는 건 처음부터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놈의 공격을 면역하는 유라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녀야말로 지옥을 정화할 수 있는 인류의 몇 안 되는 희망 중 하나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크르르.”
“....?”
맥없이 쓰러지는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크르차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를 비웃듯 미소 짓는 놈의 코가 벌렁거리고 있었다.
‘개새끼 저거.... 역시 후각으로 내 위치를 파악하는 거였군.’
이래서야 시선을 피하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제아무리 공들여 숨어봤자 크르차의 후각에 발각당해 바르바토스에게 저격당할 것이다.
그리드가 보통의 플레이어였다면 말이다.
“영우 씨!!”
지옥 도약을 쓴 유라가 그리드의 곁으로 날아왔다. 그녀의 부축을 받아 맨땅에 헤딩하는 꼴을 모면한 그리드가 덜덜 떨리는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진정해요! 일단 혼란부터 회복하세요!!”
전설은 대부분의 상태 이상에 면역한다.
그리고 그리드는 플레이어 최초의 전설이다.
어느새 그에겐 상태 이상이, 특히 정신에 개입하는 상태 이상이 낯선 개념이 되어있을 터였다.
혼란이 일으키는 컨트롤 불가, 시야 반전 등의 현상에 도통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콰작! 콰자작!!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연사됐다.
여전히 허우적거리는 그리드를 품에 안은 유라가 저격을 대신 맞았다. 검은 손은 그녀를 해치지 못했다. 검은 손이 아무리 강렬한 마기를 내뿜어봤자 옥빛의 마력에 흩어졌다. 하지만 검은 손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하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푸욱-!!
검은 송곳이 유라의 옆구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새로운 형태의 저격은 마기보다 물리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유라의 방어력을 꿰뚫을만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알렉스가 바르바토스와 싸운 경험을 토대로 진화했듯 바르바토스도 진화해온 것이다.
“윽....!”
유라의 입에서 울컥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리드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도리어 더 꽉 끌어안았다. 지옥 도약의 쿨타임이 돌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2초였지만 그녀는 2시간처럼 느껴졌다.
‘내가 지켜야 돼.’
항상 도움만 받을 순 없다.
더군다나 이곳은 지옥이다. 나의 영역이다. 내가 활약해야할 장소란 말이다....
이를 악 물며 마법공학총을 검의 형태로 바꾼 그녀가 마침 돌아온 지옥 도약을 시전했다.
그러자 열린 차원문에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고 그리드를 던져 넣었다.
이어서.
투쾅-!
크르차에게 쇄도했다.
이 일방적인 저격을 멈추기 위해선 크르차를 죽이는 것만이 유일한 해답임을 그녀 또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르차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놈이 레라지에와 대적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10지옥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를 헬가오가 두려워 공석인 9지옥은 노리지 못했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레라지에를 상대로는 자신이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괴물에게 유라의 공격은 딱히 위협적이지 않았다.
아직 성장 중인 유라가 도전할만한 상대는 20번대 지옥의 악마들이다.
“제 발로 죽으러 온 거냐. 크르르.”
불꽃에 휩싸인 주먹을 휘둘러 유라의 검을 막아낸 놈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커다란 손을 펼쳐 유라의 작은 얼굴을 통째로 거머쥔 놈이 유라를 불태워버릴 기세로 불꽃의 온도를 높이는 바로 그때였다.
펄럭.
붉은 망토가,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왔다.
“....!”
크르차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갑자기 밀려드는 수백 종의 피 냄새가 그의 후각을 마비시킨 까닭이다.
‘이게 무슨?’
뛰어난 후각이 도리어 독이 됐다.
코끝을 찌르는 수백 종의 피 냄새 탓에 크르차는 바로 곁에 있는 레라지에와 칼바바, 그리고 유라의 체취조차 혼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물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인간의 위치를 식별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
쩌저저저저저저저정!!
천장을 꿰뚫고 내려온 용이 크르차를 집어삼켰다.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처음으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