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07화
형태에 딱 맞게 변하는 내의.
베리아체의 내의는 그리드의 근육질 몸매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전신 타이즈가 되었다.
‘착용감 좋군.’
어째선지 복잡한 표정을 짓는 엘핀스톤을 역소환시킨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입은 듯, 안 입은 듯>의 효과가 발생합니다.]
[착용하는 방어구의 무게가 반감되고 무게로 인해 발생하는 행동, 속도 관련 페널티가 억제됩니다.]
“....!”
어찌나 놀랐는지,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이건.... 어쩌면 호신강기보다 더 좋은 스킬이다.’
무게는 물질의 함량에 비례한다. 가벼운 갑옷보단 무거운 갑옷이 당연히 더 단단하고 방어력이 높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벼운 갑옷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게가 발생시키는 페널티에 있다.
갑옷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속도가 느려지고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기 때문에 방어력은 어느 정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입은 듯, 안 입은 듯의 효과는 타협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내 기준으로, 방어력을 기존보다 30퍼센트 이상 더 끌어올리는 게 가능해진다.’
거기에 호신강기의 효과까지 더하면 미르가 쏘는 ‘번개’에도 꽤나 버틸 수 있을 터.
‘이거 진짜 엄청난 득템인데....?’
절로 어깨가 들썩일 지경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그리드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런데 미르를 기준으로 삼아도 되는 건가? 한 자릿수 대악마들이 사실은 미르보다 더 강한 거 아니야?’
우선 생명력은 대악마가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예로부터 인간형 NPC의 약점은 생명력과 방어력에 있었으니.
하지만 종합적인 전투력은 미르가 한 자릿수 대악마를 상회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미르는 동방의 중간 보스격인 존재.
지옥의 중간 보스라고 할 수 있는 바알을 제외한 한 자릿수 대악마들은 미르의 상대가 못 될 거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젠 확신이 서지 않는다.
서열 10위에 불과한 레라지에가 맨몸으로 5융합 검무의 데미지를 견디지 않았던가.
물론 물리공격력을 경감시키는 그녀의 권능이 한 자릿수 대악마보다 때때로 높은 방어력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방어력을 제외하더라도 레라지에의 전투력은 그리드의 예상을 훨씬 초월했다. 일단 5융합 검무의 검로를 모조리 읽어낸 동체시력부터가 보통이 아니다.
“레라지에, 너 위로 상위의 군주가 여럿 있다고 했지?”
“그래,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니라.”
“걔들이 너보다 많이 강한가?”
‘그렇다’는 대답이 당연하게 돌아온다면 꽤나 골치 아파진다. 솔직히 말해서 의욕이 다소 꺾일 것 같다.
걱정하는 그리드에게 레라지에가 의외의 답변을 내놓았다.
“상성에 달려있느니라. 나보다 상위 군주 중에서 서열 5위와 6위는 마법이 특기가 아니니 내가 싸워서 이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의 군주들은 지금의 나로서는 이기기 힘들.... 앗!”
순순히 이야기하던 레라지에가 갑자기 깜짝 놀라선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한참을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약점은 마법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거라.”
“...응.”
“진짜이니라!”
“알았다니까?”
“제길....! 분해! 분하도다!!”
“.....”
어째 허풍쟁이치고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 같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고백했단 사실을 끝내 숨기지 못하고 땅을 치며 분개하는 모습을 보면.
‘애초에 약점이야 뻔히 예상했는데.’
순진하기는, 쯧쯧 혀를 차는 그리드에게 레라지에가 꽥 소리쳤다.
“내가 오늘 너만 이겼어도! 너를 이기고 무패왕에게 패배했던 전적, 아, 아니, 무패왕하고 무승부했던 전적을 승리로 고칠 수만 있었어도 단숨에 8위를 노렸을 진데!!”
‘흐음.... 투쟁의 대악마라.’
싸우고 이길수록 강해지는 특성을 지닌 듯하다.
재능과 노력만 뒷받침 된다면 필시 최강의 특성 중 하나일 터.
‘그래서 베리아체가 레라지에에게 기대를 걸고 호의를 보낸 건가.’
번헨 열도 전기 속 레라지에는 바알과 대적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바알과 싸울 힘을 비축할 때까지 바알의 명령을 따르며 와신상담하는 이유는 역시 베리아체의 복수를 위함인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훌륭한 우군이 될 수도....’
그리드 본인이 레라지에와의 호감도를 쌓은 건 둘째 치고, 레라지에가 엘핀스톤을 마주했을 때의 태도가 워낙 호의적이었다.
그런 그녀가 훗날 브라함과 만나 협력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니, 둘이 협력하는 그림이 안 그려지는데?’
브라함이 레라지에를 괴롭히는 모습이 상상되는 건 왜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우웅!!
폭음과 함께 천장이 미세하게 울렸다.
성의 구조상 보물 창고 위엔 레라지에의 대전이 있었는데, 바로 그 대전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떨어진 듯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로구나.”
약점이 공개되는 바람에 안 그래도 저기압이던 레라지에의 두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리드의 등을 떠밀어 보물창고에서 나온 그녀가 곧장 대전을 향해 내달렸고 그리드가 뒤를 쫓았다.
크르릉....
대전에 가까워질수록 지독한 악취와 열기가 느껴진다 싶더니 급기야 짐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크르차!”
레라지에는 침입자의 정체를 도중부터 눈치 챈 듯했다.
그녀가 대전에 입장하며 소리치자 <8지옥 부군단장>이라는 칭호를 지닌 악마 크르차가 기괴하게 웃었다.
허리가 잔뜩 굽은 놈이었다. 턱이 땅에 닿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가 3미터가 넘었고 울퉁불퉁한 근육을 자랑했다. 성벽을 떼다놓은 것처럼 널따란 등판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어깨가 좁았고 대가리는 개 대가리였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점은 커다란 두 주먹에 넘실거리는 불꽃. 낯익은 불꽃이었다.
‘지옥 불.’
헬가오가 두르고 있던....
“크르차는 본래 9지옥의 부군단장이었어요. 하지만 헬가오가 육신을 잃자 9지옥을 버리고 8지옥으로 도피해서 바르바토스의 권속이 됐죠.”
유라의 설명이었다.
성 밖에서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다가 소란을 듣고 달려온 참이었다.
“바르바토스가 8위 악마랬나?”
“네, 저격의 명수죠. 언제 어디서 저격이 날아올지 모르니 바르바토스의 권속과 싸울 땐 특히 더 조심해야 해요.”
유라는 직업 퀘스트를 진행함에 따라서 전 데빌슬레이어 알렉스가 남긴 기록들을 열람해왔다.
바르바토스는 대악마 중에서도 유난히 알렉스를 힘겹게 만든 상대였는데, 그 이유는 무려 수십 킬로미터 바깥에서도 저격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권속의 시야를 통해 대상의 위치를 파악하고 정확히 저격하는 놈의 암살능력은 대악마 중에서도 최강이다.
“크르.... 큭큭, 크컹컹컹컹!!”
소곤거리는 그리드와 유라를 빤히 바라보던 크르차가 이내 대소를 터뜨렸다.
“레라지에! 크르릉, 컹!! 데빌 슬레이어를 손님으로 맞이한 꼴을 보니 데빌 슬레이어에게 꼬리를 내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 컹컹! 구나!! 컹! 크르르!!”
“미개한 개새끼여. 일단 너는 주둥이를 닫고 있어야할 필요가 있느니라. 네가 주둥아리를 열 때마다 악취가 진동하여 주변에 민폐를 끼치거든.”
레라지에가 그리드를 초대했던 건 자신을 위한 축제를 열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축제가 아닌 악몽이 되고 말았지만, 어찌됐든 처음에는 그리드를 웃는 낯으로 대했다.
하지만 지금 크르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엔 모멸과 혐오가 가득했다. 대악마라는 지위에 어울리는 위압과 살의가 그 미형의 얼굴에 드디어 표출됐다.
“크르르....!!”
크르차의 개 면상이 왈칵 구겨졌다. 놈이 레라지에와 유라를 번갈아 노려볼 때마다 고개가 돌아가는 탓에 길게 내민 혀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이 사방으로 튀었다.
“컹컹! 레라지에, 당장 데빌 슬레이어를 죽여라.”
“개새끼가 짖기나 할 것이지 어디서 명령질이더냐.”
“크르릉!! 바르바토스 님의 명령이다!! 당장 데빌 슬레이어를 죽이지 않으면 네놈이 데빌 슬레이어와 내통해온 것으로 알겠다!! 컹!!”
‘이런.’
유라가 위험하다.
둘이서 레라지에와 싸워봤자 승산이 없다.
판단한 그리드가 유라에게 도망치라는 눈짓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바르바토스가 네놈과 함께 지내더니 지능이 개새끼 수준으로 격하됐나 보구나. 9위가 공석인 지금 내 다음 서열전 상대는 바르바토스이다. 상관이 아닌 경쟁자 주제에 내게 무슨 권리와 염치로 명령을 내린다는 것이냐?”
“경쟁자? 큭큭, 컹!! 네깟 놈이 바르바토스 님의 경쟁자라고? 크커컹컹!! 내 불꽃의 열기조차 감당 못하는 미꾸라지 주제에?”
화르르륵!!
크르차의 양손에서 일렁이던 불꽃이 거칠게 날뛰며 비대해졌다. 순간 치솟는 열기가 넓은 대전을 삽시간에 뜨겁게 달궈버렸다.
“읏.”
그리드는 열기에 익숙하지만 유라는 그렇지 않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치는 그녀에게 단열 기능이 있는 망토를 덮어준 그리드가 힐끔 레라지에의 상태를 살폈다.
쩌적. 쩌저적.
윤기가 흘렀던 레라지에의 매끄러운 피부가 갈라지고 있었다. 열기 탓에 점액이 메마르며 급격히 건조되는 것이었다.
‘권능이 봉인됐다.’
그리드가 체험한 레라지에의 가장 큰 강점은 점액에 있다.
물리 공격을 미끄러뜨려 흘리는 동시에 물건을 부식시키는 권능이 깃든 점액.
그것을 잃은 이상 레라지에의 전투력은 반감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역시나.
쩌정-! 쩌저저저정!!
분노해 덤비는 크르차의 맹공이 레라지에의 메마른 피부 위로 상처를 늘려갔다.
불길을 내뿜는 발톱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놈의 공격은 언뜻 마구잡이처럼 보였으나 야생의 감각을 내포하고 있었다. 대상의 약점을 본능적으로 꿰뚫어 보고 집요하게 노렸다.
‘강하다.’
10지옥의 부군단장인 칼바바조차 인계에 현현했던 대악마들과 비견되는 실력자였다. 8지옥의 부군단장인 크르차는 칼바바보다 한 수 위여서 그리드를 긴장하게 만들 정도였다. 속도와 파괴력, 무엇보다 전투 감각이 굉장히 뛰어났다. 뛰어난 신체능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온갖 지물을 이용하며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압박했다.
저런 괴물에게 상성부터 밀리는 이상 레라지에도 버겁지 않을까.
그리드의 생각과 칼바바의 생각이 일치하는 듯했다.
“레라지에 님!!”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칼바바가 참지 못하고 전투에 끼어들었다. 고열 앞에서 무력해진 레라지에를 도와 크르차에게 창을 날렸다.
“크르릉!”
허리를 뒤로 90도로 꺾어 투창을 피한 크르차가 그대로 백 덤블링하며 두 발로 창을 붙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비틀며 날려 칼바바에게 역공을 가했다.
“윽!”
되돌아온 투창을 방패를 세워 막아낸 칼바바가 뒤로 열 걸음이나 밀려났다.
크르차가 기고만장해졌다.
“이참에 너를 죽이고 내가 10 지옥의 주인이 될까?”
도를 넘는 발언.
분위기가 한층 더 험악해질수록 그리드와 유라는 괜히 민망해졌다.
원래는 이 자리의 악마들에게 협공을 당하고 사냥당해야 마땅한 입장이건만 어찌된 게 악마들끼리 싸우고 있었으니 상황이 어색했다.
‘어쨌든 좋은 기회다.’
악마들의 실력을 정확히 가늠해볼 기회다.
그리드와 유라가 집중해서 전투를 지켜봤다.
하지만 그들의 집중은 머잖아 깨지고 말았다.
다른 존재의 개입 때문이었다.
[당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공격은 없습니다.]
“?”
현장엔 그리드를 위협하는 존재가 없었다.
레라지에 패거리와 크르차는 서로 싸우기 바빴다.
한데 이 경고창은 뭐지?
두 눈을 부릅뜬 그리드가 황급히 점프를 뛰었다.
동시에.
푸화하하하학!!
조금 전까지 그리드가 밟고 섰던 지면에서 새카만 손이 뻗어져 나왔다.
본래 그리드를 움켜쥐었어야할 그것이 대상을 놓치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린다.
‘저게 뭐지?’
소름 돋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손이다.
파직, 파지직.
검은 손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망토의 끝자락이 타들어갔다.
유라가 소리쳤다.
“바르바토스의 저격이에요!”
이어서,
푸화하하학!!
허공에 떠있는 그리드의 전후좌우로부터 4개의 검은 손이 새로이 뻗어져 나왔다.
또 다시 떠오르는 경고창을 보고 미리 순보를 쓰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붙잡혀 녹아내렸으리라.
긴장하는 그리드에게 강제 진행 퀘스트가 부여됐다.
[퀘스트 <바르바토스의 저격>이 시작됩니다.]
<바르바토스의 저격>
난이도:SSS
제8위 대악마 바르바토스가 당신을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의 권속 크르차가 살아있는 이상 바르바토스의 저격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크르차를 처치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크르차 토벌
퀘스트 클리어 보상:바르바토스의 시야(5)
퀘스트 실패 시:레벨 -5
‘시야?’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보상이다.
하지만 보상의 효과가 무엇인지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르바토스처럼 장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다는 건가?’
꿀꺽,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기고, 그 시야를 활용할 수만 있다면 무구의 비의 활용도가 급격히 상승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곳이 나의 시야가 미치는 곳이라면, 굳이 현장을 직접 찾아가지 않아도 언제든지 무구의 비를 내릴 수 있다.
천상의 신이 지상에 비를 내리듯이.
‘이번 퀘스트, 반드시 클리어한다.’
찬란한 미래를 그려본 그리드의 의욕이 충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