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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84화 (1,274/1,794)

템빨 65권 - 06화

마법으로 세공한 샹들리에가 은은한 빛을 분사하는 레라지에의 보물창고.

레라지에가 싸우고, 승리할 때마다 얻었던 전리품들을 수용하는 장소이니만큼 규모가 상당히 크다. 어지간한 대형 박물관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리드의 발걸음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는 곳곳에 장식된 수백 종의 보물들을 힐끗 곁눈질로 흩어볼 뿐, 미련 없이 지나쳐버렸다. 마치 돌덩어리라도 보는 듯한 태도였다.

‘칼바바가 이것들 모두 진귀한 보물이라고 하였는데.... 저자는 과연 안목이 없구나.’

나를 닮았다.

과연 강자는 강자끼리 통하는 면이 있는 듯하다.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그리드의 뒤를 쫓던 레라지에가 문득 망부석처럼 굳었다.

그리드가 딱 한 번 걸음을 멈췄던 순간을 상기한 것이다.

번헨 열도 전기.

바로 자신의 일기장을 얻기 위해서, 저 거침없는 녀석이 걸음을 멈췄었다.

‘설마 저자는 처음부터 내게 관심이 있던 건가?’

그래야만 수많은 보물들을 제쳐두고 내 일기장부터 탐했던 행동이 납득된다.

‘왜 내게 관심을....? 오호, 동경심을 품게 되어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된 게로구나.’

그리드는 무패왕의 기록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레라지에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멋대로 결론을 내린 그녀가 우쭐거리는 그때였다.

“이건....”

그리드가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수백 종의 보물 중 그의 시선을 끈 물건은 하필 가장 구석진 자리에 놓여있었다.

전시(展示)가 아닌 방치.

구석 깊은 자리에서, 먼지와 그늘에 뒤덮인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이었다.

빛이 바랜 낡은 천.

잔뜩 구겨져있는 터라 얼핏 봐선 걸레와 다를 바가 없다.

창고의 관리인이 선반을 닦을 때 쓰다가 대충 구석에 던져놓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안목은 이 천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떠난 자가 남긴 옷>

등급:???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지옥을 떠날 때 남긴 옷입니다.

무게:10

“그, 그건 걸레다.”

레라지에가 즉시 반응을 보였다.

옷을 걸레라고 지칭하여 별것 아닌 것처럼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허우적거리는 팔다리와 갈팡질팡하는 눈동자가 그녀의 동요를 알려주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대상 아이템의 감정에 실패하였습니다.]

“윽!”

눈에서 심한 격통을 느낀 그리드가 뒷걸음쳤다.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 됐다.

감정에 실패하고 반동으로 고통까지 느끼는 경험은, 무신의 비급을 감정하려다가 실패했을 때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다.

이 옷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증거다.

‘잠재력 개방.’

[등급을 성장시킬 스킬을 지정해주십시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의 잠재력이 개방되어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감정>스킬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신에 필적하는 대장장이의 감정은, 단언컨대 세계관을 통틀어서 최고의 기능을 자랑하는 감정 스킬이다.

하지만 이 스킬을 처음 썼을 때 그리드는 실패를 맛봤었다.

하필 감정 대상이 무신의 비급이었기 때문이다.

‘무신의 비급을 감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유일신에게 범접하는 것이 금기였기 때문이고.’

두 번의 실패는 없다.

이 옷의 주인이 누구인진 몰라도, 아무리 대단한 사람일지라도 치우와 동급일 수는 없다.

그리드의 확신에 호응하듯,

[감정에 성공하였습니다.]

<떠난 자가 남긴 옷>의 상세 정보가 갱신되며 그리드의 시야에 떠올랐다.

<베리아체의 내의>

등급:전설(초월)

내구력:117/519 방어력:450

★스킬 <금강불괴> 활성화

★스킬 <입은 듯, 안 입은 듯> 활성화

★스킬 <???> 특정 조건 충족 시 해금

뱀파이어 시조 베리아체가 대악마 시절에 즐겨 입던 내의입니다.

베리아체가 자신의 마력을 실처럼 엮어 만든 옷으로,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형태가 변하고 밀착하여 편하게 입을 수 있습니다.

사용 조건:베리아체. 베리아체의 혈육. 서열 3위 이상의 대악마.

무게:10

“....미쳤군.”

그리드의 입에서 최고의 찬사가 튀어나왔다.

베리아체의 내의는 <속옷>으로 분류됐다.

갑옷과 중복 착용이 가능하다는 뜻인데 방어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심지어,

<금강불괴>Lv.1

패시브

일정 수준 이하의 데미지를 면역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데미지를 10퍼센트 경감시킵니다.

<입은 듯, 안 입은 듯>

패시브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집니다. 보다 경쾌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2개의 패시브 스킬이 귀속돼 있다.

‘금강불괴.... 크라우젤이 쓰는 걸 보고 감탄했었지.’

금강불괴는 최상급 패시브 스킬이다.

하지만 입은 듯, 안 입은 듯은 설명이 애매했다.

민첩성이 얼마나 오른다거나, 속도가 얼마만큼 빨라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직관성 있게 명시된 게 아니라 단지 경쾌해진다고 막연하게 서술됐을 뿐이니 직접 체험해보지 않는 이상 정확한 효과를 알기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다른 하나의 스킬은 자칫 독일 수도 있고.’

하지만 자체적인 방어력과 금강불괴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가치를 지닌 아이템이다.

“두 번째 선물은 이걸로 부탁한다.”

시조 베리아체.

무려 서열 3위의 대악마였으나 야탄 신을 의심한 죄로 지옥에서 추방당한 존재.

브라함의 부모이기도 한 그녀의 옷이 어째서 레라지에의 보물창고에 있는 것인가, 궁금하긴 했지만 딱히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드는 단지 이걸 소유하면 그만이었다.

‘갖고 싶다.’

직접 입고 싶은 건 당연한 욕구고, 이해도를 높여서 속옷 제작 기술의 레벨을 올리는데 도움을 받고 싶기도 했다. 더 뛰어난 속옷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재단기술을 올리는 속도도 자연히 빨라질 테니.

“....변태로구나.”

노골적인 욕망을 드러내는 그리드에게 레라지에가 혐오의 시선을 보냈다. 누가 봐도 여성용인 내의를 탐하는 그리드를 곱게 보지 못했다.

그리드는 개의치 않았다.

상대는 대악마다.

어쩌다가 호감도가 올랐다지만 고작 1.

사이좋은 관계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사이가 좋아질 수도 없다. 그녀의 태생이 악마인 이상 다시 만날 땐 높은 확률로 적일 것이다. 변태라는 오해를 받았다고 해서 굳이 해소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잘 쓸게.”

“잠깐.”

베리아체의 내의에 손을 가져가는 그리드를 레라지에가 붙잡아 세웠다.

“그 옷은.... 내 우상의 유품이니라. 소중한 물건이란 말이다. 기왕이면 다른 물건을 선택해준다면 좋겠구나.”

“소중히 여기는 물건치곤 너무 대충 방치해놓은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었느니라. 지옥의 모든 군주들은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군주에게 주기적으로 보물을 진상해야하는데, 너는 믿지 못하겠지만 내 위로도 상위의 군주들이 있다. 그 옷이 놈들의 눈에 띄었다간 빼앗길 우려가 있어 어쩔 수 없이 걸레로 위장시켜놓았던 것이다.”

자신이야말로 지옥의 으뜸 군주라고 주장했던 허풍쟁이 레라지에가 솔직하게 고백하게 만들 정도라니.

베리아체의 내의는 그녀에게 정말로 소중한 물건인 듯했다.

물론 그리드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그리드의 적이 될 확률이 높다.

무시하고, 보물을 손에 넣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내의에서 손을 뗐다.

“너는 베리아체하고 무슨 관계지?”

스토리의 확장은 정보의 확장으로 직결된다. 더 많은 정보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어쩌면 이 초월급 레전드리 아이템보다 레라지에의 이야기가 더 큰 가치를 지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특기는 투쟁과 승리지만, 사실 사랑을 관장하기도 하느니라.”

“....응?”

대악마가 사랑을 운운하다니.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반응을 보고 얼굴을 붉힌 레라지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비웃지 말거라. 나 또한 내가 다른 악마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혼란스러웠느니라.”

본능적으로 사랑을 동경했다. 타인의 사랑을 이뤄주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이루기 힘든 욕망이었다.

지옥의 악마들은 사랑에 일체 관심이 없었으니.

레라지에는 누구 앞에서도 사랑을 논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항상 고독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했던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주셨던 분이 바로 베리아체 님이시다. 그분은 나의 욕망을 비웃지 않고 도리어 응원해주셨지. 덕분에 나는 용기를 얻어 투쟁하고, 승리하며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다.”

“.....”

그리드는 브라함을 비롯한 직계 뱀파이어들이 베리아체를 얼마나 동경하고 사랑했는지 떠올렸다.

만약 베리아체가 다른 대악마들처럼 절대 악이었다면, 그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가르칠 수 있었을까? 동족들을 해쳤던 브라함을 비난하며 동정했을까? 넷째 자식인 놀에게 ‘자애’라는 특성을 물려줄 수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베리아체는 근본부터가 보통의 대악마들과 달랐다.

그러므로 야탄을 의심했고, 비난했으며, 나태의 저주와 함께 인계로 추방당한 것이다.

‘베리아체는 악마들에게 돌연변이 취급을 받았겠지.’

그녀를 이해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었던 악마가 바로 눈앞의 레라지에였던 건가....

깨닫는 그리드의 경계심이 희미해졌다.

그는 레라지에의 말을 무조건 의심하기보다 우선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분께서 떠나기 전에 말씀하셨다. 오직 악의와 살의로 들끓는 이 지옥을 바꾸기 위해서라도 자신은 반드시 되돌아올 거라고.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자신이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신의 분신을 보내시겠노라고.”

“.....”

베리아체는 단지 복수뿐만 아니라 변혁을 꿈꿨던 거다.

그리드는 그녀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테지만, 지옥을 바꾸겠다는 그녀의 목표가 영 허황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로즈와 브라함.

그녀의 자식(분신)들이 증명하고 있다.

그녀에겐 변혁을 일으킬 자격이 있었노라고.

“이 옷은 그분과의 재회에 필요한 증표, 혹은 그분의 분신에게 전달해야할 선물인 것이다. 하니 네게 줄 수 없다. 어떤 보물이라도 주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구나. 부디 이해해다오.”

이쯤 말했으면 이해해주겠지.

모든 사실을 고백하며 고개까지 숙인 레라지에는 그리드가 양보해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내의를 기필코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다.

“....실망이구나.”

눈살을 찌푸리는 레라지에에게,

“실망할 필요 없어. 이 옷은 내가 갖는 게 맞으니까.”

그리드는 단언했다.

레라지에의 입장에선 황당한 헛소리였다.

“네가 갖는 게 맞다니? 설마 네가 그분의 분신이라고 주장하려는 거냐? 너는.... 너는 나를 바보로 아는 것이냐?”

“그럴 리가. 베리아체의 분신들이 내 곁에 있을 뿐이다.”

그리드가 엘핀스톤의 반지를 매만졌다.

콰르륵!

피의 폭풍이 불어 닥친다.

혈기.

레라지에가 늘 그리워했던 기운이 일대를 지배하며 엘핀스톤이 현현했다.

“아....”

엘핀스톤의 홍옥 같은 눈동자가 레라지에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경탄이 묻어났다.

어느새 갑옷을 벗은 그리드는 베리아체의 내의를 착용하고 있었다.

순간.

[<베리아체의 내의>가 혈왕의 피를 감지합니다.]

[숨겨진 스킬, <블러드 마스터>Lv.1이 활성화됩니다.]

베리아체의 내의의 숨겨진 기능이 해금됐다.

언젠가 이 내의를 똑같이 만들 수 있게 된다면, 브라함과 놀을 비롯한 모든 직계 뱀파이어들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되리라.

그리드는 확신했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레라지에는 이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구나. 너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던 거였어.”

“....”

네가 접근한 건데?

황당해하는 그리드의 시야에 레라지아와의 호감도가 20 올랐다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이쯤 되자 그리드도 걱정이었다.

‘너무 잡탕 아닌가....’

수인, 뱀파이어, 오크, 엘프 등의 이종족들과 친분을 쌓은 건 충분히 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대천사에 이어 대악마와도 친분을 쌓는 건 좀.... 이게 과연 괜찮은 일인가 싶다. 이러다가 박쥐라고 소문나는 건 아닐지 심히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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