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83화 (1,273/1,794)

템빨 65권 - 05화

그리드가 보유 중인 <마드라의 일기장>은 불완전한 기록이다.

저자가 무패왕 마드라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필 ‘데스나이트가 된 이후’의 마드라가 쓴 일기인지라 내용에 혼선이 있고 전달력이 떨어졌다.

애초에 데스나이트란 이미 죽은 사람의 백골이 언데드로 부활한 것이다. 살아있을 때와 비교해서 인지가 현격히 떨어지는 언데드의 일기를 무작정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심지어 뒷장부턴 전혀 알아볼 수가 없는 수준이었고.’

원치 않게 언데드로 부활해서 수백 년을 존재했던 마드라는 점차 미쳐갔다. 종국에는 이성의 끊을 놓고 기이하게 울부짖었다.

그가 종이에 남긴 문장들과 기억에 남긴 언어들엔 아무런 규칙성이 없다.

대현자 스틱세이조차 번역에 실패했을 정도다.

하지만 스틱세이는 그것이 글이 아니고, 언어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다. 지성으로 해석하지 못할 뿐, 단순한 울부짖음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정령들의 언어가 있듯이 망자(亡者)의 언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가설을 세웠다.

실제로 그의 가설은 옳았다.

탈리마의 만마전에서 얻었던 <갈구노스의 뼈로 만든 오브>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오브의 속삭임은 데스나이트 마드라의 절규와 닮아있었다.

‘스틱세이는 오브를 연구해서 망자의 언어를 습득해보겠다고 했지만....’

지지부진한 것이 사실이다.

스틱세이의 연구는 몇 달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마드라의 일기를 언제쯤에나 해석 가능할지 전혀 기약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얻게 된 번헨 열도 전기는 그리드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기록이었다.

“그, 그걸 꼭 봐야하느냐?”

“응.”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레라지에가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그녀에겐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었다. 자신의 치부가 담긴 일기장을 펼치는 그리드를 말리지 못했다.

『지옥의 밤을 만들던 마기가 걷히자 낮이 찾아왔다. 하늘이 밝아지며 지옥달이 희미해졌다. 인계처럼 변한 지옥의 풍경을 낯설어하고 있자니 마르바스 영감이 신성(神聖)의 영향을 운운했다. 그제야 지옥에 신이 방문했음을 알았다.』

지옥을 방문한 신.

인간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시절의 헥세타이아다.

그리드도 알고 있는 신화가 제3자의 입장에서 서술되며 번헨 열도 전기의 첫 문장을 장식했고, 그리드의 시야는 서서히 암전됐다.

그는 레라지에를 체험했다.

***

“인계를 침공하라고?”

제1지옥에서 내려온 공문을 펼쳐본 레라지에가 눈살을 찌푸렸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만 득실거리는 곳에 굳이 나를 보낼 필요가 있나?”

투쟁의 가치는 강적과 싸워서 이겼을 때야 비로소 빛나는 법이다.

굳이 약자를 괴롭힐 이유도, 취미도 없는 레라지에의 입장에서 지상이란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는 무대였다.

“허허, 괜한 장난감이 되고 싶지 않다면 바알을 상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니까.”

레라지에가 불태워버린 공문을 곧바로 수복시킨 마르바스가 설득했다.

“바알이 자네를 직접 지목한 이상 가고 싶지 않아도 가는 게 맞네. 그리고 인계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닐세. 인계가 지옥과 천상 사이에서 버젓이 버텨온 이유는 그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니.”

“자격이 있다? 그게 정녕 옳은 표현인가 싶구나. 신들이 신격을 쌓기 위해 인간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인계는 진즉에 멸망했을 터인데.”

“헬가오가 인간에게 패배해서 육신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 겐가.”

“헬가오는 지옥불에 몸을 담궈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지 않더냐. 인계에서 유독 심하게 제약을 받는 체질인 녀석을 쓰러뜨렸다고 해봤자 딱히 대단해 보이진 않는구나.”

“흐음.... 하긴 자네는 ‘이전 세계’엔 없었으니 칠악성의 악명도 실감하지 못하겠군.”

“칠악성? 놈들은 신에게 받은 권능 덕분에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지 않느냐. 놈들 이후로 그 어떤 신도 인간에게 권능을 주지 않았고.”

“신의 호의 없이도 인간은 단련하여 초월할 수 있네. 혹은 업적을 쌓아서 전설이 될 수도 있지. 초월과 전설은 신화의 발판이기도 하다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헬가오를 쓰러뜨린 검성 뮐....”

“영감, 그만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임무는 수행할 테니 헛된 기대감을 심어주지 않아도 되느니라.”

레라지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었다.

인계라....

마르바스 영감은 즐거울 거라며 지껄이고 있다만, 실제로는 아무런 보람이 없는 여정이리라.

터럭만큼의 기대감도,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레라지에는 다른 악마들과 함께 차원문을 넘어 인계로 떠났다.

바알이 그것을 바라는 이상 순순히 따랐다.

현재로써는 ‘재미없는 장기말’로 보이는 편이 바알의 관심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바알과 대적하기엔 아직 밟아야할 수순이 많다.’

값진 승리를 거둘수록 강해지는 투쟁의 권능은 마르바스 영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뛰어난 잠재력을 자랑한다.

화르륵!

인계로 통하는 차원문을 넘는 순간, 레라지에는 자신의 영혼이 불타는 감각을 느꼈다.

마모된다.

영혼의 크기가 명백히 작아지며 격과 권능을 비롯한 모든 능력치가 저하됐다.

“....흐음.”

너무나 맑고 상쾌해 두통을 유발하는 인계의 공기를 맛본 레라지에가 켈록, 기침하며 66개의 작은 섬이 모여 있는 열도의 전경을 시야에 담았다.

약해졌음을 실감하지만, 여전히 기대감은 없었다.

열도에 무엇이 존재하든 그것이 인간이 만든 피조물, 혹은 인간인 이상 자신의 적수는 못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곳에서 거둘 수 있는 건 값싼 승리뿐. 수십 번, 수백 번을 이겨봤자 성장하지 못할 테지.

시간 낭비다.

....는 오산이었다.

“귀찮게 하는구나.”

대량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첫 번째 섬을 우습게 돌파한 레라지에는 두 번째 섬부터 난감함을 느꼈다.

굳게 잠겨있는 상자들.

‘부술 수 없다’는 법칙을 가진 그것들 중 최소 2개를 3일 내에 개봉해야만 다음 섬으로 입장이 가능하다는데, 상자에 꼭 맞는 열쇠를 도대체 어디서 찾으라는 건지 골치가 아팠다.

결국.

“으으.... 집에 가고 싶어.”

레라지에는 두 번째 섬에서 무려 5번이나 탈락했다. 6번의 재도전 끝에 간신히 세 번째 섬에 입장할 수 있었다.

꼬르륵, 배가 보내는 공복 신호를 듣고 더욱 큰 우울감에 휩싸인 그녀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몽매한 인간들이 궁리해서 설치한 마법들이 법칙을 이루어 열도를 수호하고 있으나 어설프기 짝이 없노라. 함정에 빠진 악마들이 혼란해하는 동안 나 패왕 레라지에는 열도를 표표히 가로질렀으니 악마들은 환호하며 우러러 보았고 인간들은 두려움에 빠졌느니라. 나의 존재를 좌시하지 못하고 지켜보고 있을 천상의 오만한 신들도 놀랐는지 천지가 격동하였다.』

***

“.....”

전기의 첫 번째 장이 끝나며 그리드의 첫 번째 과거 체험도 끝났다.

잠시 전기에서 시선을 뗀 그가 레라지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응~ 흐으응~”

황급히 딴청을 부리기 시작한 레라지에가 어색한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푸른 불꽃을 갈기처럼 휘날리는 명마의 등을 괜히 쓰다듬다가 뒷발에 차이고 나서야 콧노래를 멈추고 구석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것은 아직 편집하지 않은 원본이니라.”

“응, 그런 것 같네.”

“내가 조만간 편집본을 만들어줄 테니 원본은 돌려다오.”

“미안한데 그건 안 돼.”

얼마나 많은 왜곡을 가미하려고.

자칫하다간 무패왕과 만났었을 때의 기록이 통째로 삭제될 수도 있다. 그래서야 전기를 얻은 의미가 사라진다.

“이제 그만 다음 보물을 골라주지 않겠느냐?”

도저히 설득이 먹힐 것 같지 않았는지, 레라지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여전히 벽을 보고 앉은 채 화제라도 돌려주길 바랐다.

“그래....”

일기장의 주인 앞에서 일기를 읽는 건 꽤나 큰 실례였구나.

새삼 깨달은 그리드가 번헨 열도 전기를 순순히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번 부탁마저 거절했다가 레라지에의 분노를 샀다간 남은 보상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 보물 창고는 레라지에의 소유.

그녀에겐 언제라도 축객령을 내릴 권한이 있었으니 필요 이상으로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

“혹시 추천해줄만한 물건이 있나?”

보물 창고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불꽃 갈기의 명마였지만 그리드는 녀석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미 그리드에겐 템빨콘이 있었기 때문이다. 템빨콘의 지랄 맞은 성격도 감당하기 힘든 마당에 대악마를 뒷발로 걷어찰 정도로 난폭한 놈까지 분양했다간 좋을 게 없어보였다.

블러드 스톤도 탐내지 않았다.

블러드 스톤은 필시 대단한 광물이지만 탐욕이 있는 이상 굳이 욕심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월야철처럼 독보적인 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기와의 상성이 좋은 정도인데 딱히 필요 없지.’

훌륭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레라지에에게 받는 보상으로 선택하기엔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제파르의 마검도 패스.’

제파르는 악마가 아닌 마족, 그것도 하급 마족 출신으로 지옥 서열 13위까지 올랐었다. 현재는 순위가 꽤나 떨어진 상태 같았지만 어쨌든 지옥에서도 입지전적인 마족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그런 제파르와 호각을 이뤘었다는 ‘이야루그트’가 있다. 현재는 극검에게 대여 중이지만, 어쨌든 이야루그트의 영혼이 봉인된 마검이 있는 마당에 고작 제파르가 사용했었다는 마검 따위를 탐낼 필요가 없었다.

‘....이제 보니 재밌네.’

어떤 보상이 좋을까, 곰곰이 궁리하며 보물 창고를 둘러보던 그리드가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10위 대악마가 애지중지하는 보물들이 탐나지 않을 정도라니.

내가 가진 게 이렇게 많았었나 싶다.

‘이러다가 조만간 내 전용 보물창고를 만들어야할 수도.’

인벤토리와 창고의 허용량을 초과할 정도로 많은 보물을 소유하게 되면 따로 건축물을 만들어야할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리드는 자신이 얼마나 큰 부자가 됐는지 새삼 실감이 됐다. 막말로 개털이었던 시절이 떠올라 깊은 감회에 젖었다.

“뭐, 뭐냐! 왜 웃는 것이냐!!”

보물 창고를 구경하는 그리드를 불만스레 노려보던 레라지에가 버럭 소리쳤다.

그리드가 조금 전 읽은 일기의 내용을 떠올리고 자신을 비웃은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쯤 되면 안쓰러울 지경이다.

모자의 넓은 챙을 쭉 잡아당겨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 애쓰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말했다.

“그냥 다른 생각이 나서 웃은 거야. 근데 넌 설마 내가 너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나보다 강한 상대를 면전에서 비웃을 정도로 개념 없고 주제 파악 못하는 놈이 아닌데.”

딱히 특별한 의도를 품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리드는 자꾸만 옆에서 꽥꽥거리는 레라지에가 거슬렸을 뿐이다. 소리 좀 그만 지르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 솔직함이 레라지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흐흠, 내가 너보다 훨씬~ 훠얼~~씬 강하기는 하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도, 호방한 말투도 마음에 드는구나.”

[대악마 ‘레라지에’와의 호감도가 1 상승하였습니다.]

“....??”

대악마는 절대 악이다.

인간의 무조건적인 적이다.

하늘이 두 쪽 나도 가까워질 수 없는 사이다.

많은 체험을 통해 그렇게 믿어왔다.

한데 호감도가 오르다니?

“너.... 악마 맞냐?”

“질문의 의도가 무엇이냐? 그것보다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구나. 너에겐 보물을 고를 안목이 없는 듯하니 내가 친히 도와주도록 하겠느니라. 자, 이건 어떠냐? 이 방패로 말할 것 같으면 159년 전, 내가 100만 대 1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얻은 전리ㅍ....”

“쓰레기잖아.”

악마 맞네.

그리드가 게슴츠레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레라지에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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