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5권 - 03화
부들부들!
양팔이 경기를 일으킨다.
충돌에 뒤따른 충격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아주 잠시, 레라지에는 넋을 잃었다.
자신의 팔뚝에 요란하게 새겨진 검흔을 눈으로 보고도 현실을 믿지 못했다.
만약 이곳에 있는 사람이 그녀 혼자였다면, 그녀는 몇 분이고 멍하니 자신의 두 팔만 바라봤을 것이다.
“....잠깐, 다시 하자.”
장내에 도열해 있는 수천 악마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정신을 수습한 레라지에가 정중히 요청했다. 그러면서 눈앞에 세우고 있던 두 팔을 통 넓은 소매 속으로 슬그머니 감췄다.
스르륵.
연분홍색 피부 위로 투명한 점액이 스며나온다. 끈적끈적 흘러내리는 점액이 상처를 덮고, 지운다.
펄럭이는 소매 틈새로 레라지에의 치유 능력을 엿본 그리드가 진상을 파악했다.
‘검무의 위력이 반감된 이유가 저거였나.’
초연살파극의 검무가 일으키는 파장.
살육의 심상이 빚는 일종의 결계가 레라지에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당황하지 않았었다.
레라지에는 서열 10위의 대악마.
멀쩡한 육신을 지닌, 지옥에서의 10위 대악마다.
육신을 잃고 약화된, 심지어 그 상태로 인계에 강림한 헬가오보다 최소 몇 배는 더 강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가 초연살파극의 심상을 압도하는 정신력, 또는 기세를 발휘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연살파극을 맨팔로 막아내는 모습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건틀렛조차 끼지 않은, 한 눈에 봐도 부드러워 보이는 손등으로 연(聯)의 수십 회 검로를 모조리 쳐내고, 초(超)와 파(波)의 파장으로 비롯하는 검기는 얇은 손목으로 막아내고, 살(殺)의 묘리가 담긴 찌르기는 맨손으로 붙잡아 비틀고....
초연살파극의 경로를 간파하고, 속도를 읽고, 반응한 것만으로도 놀라울 지경인데 맨몸으로 충격을 감당하는 광경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납득이 됐다.
피부에서 점액을 분출하는 레라지에의 특성 자체가 물리적인 힘을 반감시키고 회피할 수 있게 해주는 듯했다.
‘보통은 양서류 계열의 몬스터들이 갖는 특성이지. 마법.... 그것도 화염 마법으로 공략해야하는 상대인 거군.’
악마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고, 유라는 말한 바 있다.
적어도 이번 퀘스트에서 만큼은 레라지에가 그리드를 해칠 일이 없다.
하지만 대악마인 이상 언젠간 결국 목숨을 걸고 레이드해야할 대상이다.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해야한다.
특성과 스킬은 기본이고 성격까지 파악해두는 편이 좋다. 똑같은 능력치를 지녔어도 성격에 따라서 다른 전투 패턴을 보여주게 마련이니.
대화를 많이 나눠보자.
“다시 하자고? 한 입 갖고....”
한 입 갖고 두 말 하는 거냐고 몰아붙이려던 그리드가 입을 다물었다.
[퀘스트 <레라지에와의 대결>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레라지에의 서약서>를 얻었습니다.]
<레라지에의 서약서>
제10위 대악마, 패왕 레라지에는 패배를 무척 싫어합니다. 설령 자신이 승부에서 졌더라도 이겼다고 알려지길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레라지에와의 승부에서 이겼다는 말을 영원히 함구하겠노라 서약한다면, 레라지에는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로 보답할 것입니다.
무게:0.1
승부 결과를 외부에 유출하지 말아달라는 내용이 적힌 종이.
공백의 서명란이 그리드의 서명을 요구하고 있다.
“.....”
서약서의 내용을 확인한 그리드가 레라지에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했다.
수백 년 전, 악마들의 번헨 열도 침공전 당시.
레라지에는 마드라에게 패주했다.
심지어 데스나이트 마드라에게 말이다.
한데 레라지에는 진실을 은폐했다. 악마들에게 마드라가 데스나이트였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뿐더러 패배를 숨기고 무승부를 운운했다.
처음에는 치매라도 걸린 줄 알았다.
한데 이제 보니 중증의 허풍쟁이였다.
‘....이건 서명하는 편이 좋겠는데.’
그리드가 레라지에의 결투를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퀘스트 보상이 탐나서였다. 보상을 얻으려면 서명을 해야 한다고 하니 거절하기 힘들었다. 거절하는 순간 퀘스트를 수행한 게 무의미해졌다.
‘허풍에 어울려준다고 해서 손해 볼 것도 없고.’
그리드는 최대한의 이득을 위해서 판단했다. 서약서의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망설임 없이 기입했다.
[레라지에와 서약하였습니다.]
[악마와의 계약 효과로 함구령이 발동합니다. 만약 당신이 레라지에와의 대결 결과를 타인에게 유출할 경우, 당신은 계약에 의거해 큰 페널티를 입게 될 것입니다.]
[계약의 해지 권리는 오직 레라지에에게 있습니다.]
그리드의 서약을 확인한 레라지에가 굳었던 얼굴을 펴며 말했다.
“무패왕의 후예여. 너는 이번 대결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느니라.”
“....”
장내의 분위기가 사늘하다.
옥좌 위 레라지에를 바라보는 수천 악마들의 눈빛에 의심과 혼란이 깃들어 있었다.
자신들 또한 대악마 후보답게 다른 대악마를 경쟁자로 여기는 악마들.
놈들이 유독 레라지에를 우러러보며 공경했던 이유는 항상 승리해왔던 레라지에의 무용담에 매료되어서였다.
한데 방금 레라지에의 패배를 목격했다.
한 팔만 사용하겠다더니 곧장 두 팔을 사용해버린 레라지에의 추태에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레라지에의 실력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승리해야만 유지되는 패왕의 칭호가 자칫 격을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마음이 조급해진 레라지에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갓, 윽.”
혀를 깨물어버렸다.
안 그래도 선홍색인 피부가 수치심으로 붉게 물든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레라지에는 주장했다.
“....내가 네게 대결을 신청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무패왕과의 승부를 결착 짓기 위해서였다. 너를 다른 누구도 아닌 무패왕의 후예라고 상정하고 승부에 임했단 말이다. 한데 너는 비겁하게도 무패왕의 검술이 아닌 다른 기술을 사용해서 대결의 본질을 흐트러뜨렸구나.”
스윽, 레라지에가 두 팔을 들어올렸다.
통 넓은 소매에 가려졌던 얇은 팔뚝이 악마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팔엔 작은 생채기조차 하나 없었다.
“오오....!”
악마들이 감탄했다.
조금 전 인간이 사용했던 검술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그 검술에 표적이 됐다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을 정도다.
한데 레라지에는 검술에 정통으로 맞서고도 작은 상처조차 없었으니 과연 레라지에의 실력은 명불허전이었다. 잠시 품었던 의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며 다시금 존경심이 샘솟았다.
“무패왕의 후예여. 나 패왕 레라지에는 너의 목을 단번에 움켜쥐어 죽여 버릴 수 있었느니라. 하지만 못 이뤘던 승부에 집착하여 자비를 베풀고, 손속에 사정을 두었으니 감사한 줄 알고 이제라도 다시 올바른 자세로 대결에 임하도록 하여라.”
“그래! 이 비겁한 인간 놈아!!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히 승부에 임해라!!”
우우! 우우우우!!
그리드에게 악마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비겁하다느니, 정정당당히 싸우라느니.
‘그게 악마들이 할 소리냐....?’
레라지에의 성.
인간 귀족들의 연회장처럼 잘 꾸며진 이곳의 분위기는 지옥의 다른 장소들과 사뭇 다르다.
쾌활하고 자유롭다.
레라지에 특유의 허풍과 생떼가 악마들의 악의를 미묘하게 흐트러뜨리는 느낌이다.
‘....어찌됐든.’
지금은 상황에 집중할 때다.
그리드가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레라지에와의 대결(2)>
난이도:SSS
제10위 대악마 레라지에와 승부하십시오. 5분 내에 레라지에가 옥좌에서 일어나게 만들거나 두 팔을 사용하게 만들면 당신의 승리입니다.
단,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스킬은 무패왕의 검술로 한정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라지에의 선물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느니라. 오거라.”
거대한 옥좌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가녀린 몸.
짐짓 근엄한 척 노력하며, 레라지에는 손을 까닥였다.
기회는 자신이 얻은 주제에 생색은 일품이다.
황당해서 실소를 흘린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후우.”
그리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상대는 옥좌에 가만히 앉아있을 거라고 선언했다.
굳이 구르고, 뛰고, 나는 등의 발악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격에 집중한다.
단 한 번의 참격.
무패왕의 검술의 본질을 상기하고 이행한다.
“십만대군.”
꽈드득!
그리드의 허리가 한계까지 비틀렸다.
검을 쥔 팔뚝에 샘솟은 핏줄이 터질 듯 움찔거린다.
“봉쇄검.”
시야에 보이는 모든 적에게 공격력 1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히고 봉쇄 효과를 거는 검술.
무패왕의 검술이 무서운 점은, 봉쇄검을 단초로 삼는 부분에 있다.
봉쇄에 걸린 대상은 3초 동안 모든 스킬과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피이잉━!
아이템 합체로 하나가 된 열망의 무아검과 염룡검.
그것이 반월을 그리는 순간 공기가 갈려나갔고 곳곳에서 소름 돋는 절삭음이 울려 퍼졌다.
“....어?”
레라지에의 옥좌 좌우에 늘어선 악마들.
그중 그리드의 시야에 들어와 있던 악마들의 몸이 비스듬하게 기운다.
봉쇄검에 베인 것이다.
반면 레라지에는 막아냈다.
한쪽 팔을 들어 여유롭게.
검기를 흘려내는 그녀의 팔은 점액질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부족한가?’
그리드가 순간적인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패왕의 검술은 물론 뛰어난 스킬이지만 5융합 검무와 비교했을 때 위력적인 측면은 약하다.
봉쇄검이 점액을 베지 못하는 이상 양팔을 쓰게 만드는 건 힘들 수도 있다.
그때였다.
[히든 패시브 스킬 <신장(神將)>의 효과로 <십만대군 봉쇄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3초 내에 재사용할 경우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그리드에게 희망의 빛이 내렸다.
“십만대군 봉쇄검.”
“....?”
다시 이어지는 봉쇄검의 검기를 또 다시 흘려낸 레라지에의 눈빛에 의문이 깃든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그녀는 한 팔로 봉쇄검을 막아냈다. 그녀의 피부를 감싸고 있는 점액은 베이지 않았다.
‘마법 관조가 발동하지 않는 걸 보면 마법적인 힘도 아니고.’
고유 능력 같은 거라 베이지 않는 건가? 더럽게 까다롭다.
쯧, 혀를 찬 그리드가 지체 않고 다음 검술을 연계시켰다.
“십만대군 학살검.”
스파아아앗━!
공격 대상과 대상의 반경 30m 내에 있는 모든 대상에게 공격력의 300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히는 검술.
심지어 하나의 대상이 사망할 때마다 피해량이 100퍼센트씩 상승하는 학살검의 위력은 이름 그대로 무시무시했다.
“으억....!”
“크아악!!”
앞서 봉쇄검에 베였던 악마들 중 일부가 학살검에 도륙 당한다.
점차 강력해진 검기가 레라지에의 점액을 비집고 들어갔다.
주륵.
레라지에의 팔뚝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고,
[히든 패시브 스킬 <신장(神將)>의 효과로 <십만대군 학살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3초 내에 재사용할 경우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십만대군 학살검.”
그리드는 시간 차 없이 학살검을 다시 사용했다.
“....!”
레라지에의 표정이 굳었다.
봉쇄검과 학살검에 베이고도 간신히 살아남았던 일부 끈질긴 악마들의 얼굴엔 절망이 깃들었다.
푸화하학!!
그나마 살아남았던 악마들이 모조리 죽어버리며 더욱 위력을 키운 검기가 레라지에의 팔뚝을 크게 벤다. 그녀의 출혈은 흘러내리는 수준을 넘어 솟구치는 수준이 되었다.
“이십만대군 분쇄검.”
[히든 패시브 스킬 <신장(神將)>의 효과로 <이십만대군 분쇄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되었습니다. 3초 내에 재사용할 경우 자원을 소모하지 않습니다.]
“이십만대군....”
“잠깐.”
멈칫.
운이 좋았다.
빌어먹을 신장.
발동 확률이 50퍼센트인 주제에 체감 확률은 10퍼센트에 불과했던 그것이 세 번 연속이나 터져줬다.
효과는 컸다.
꿋꿋이 한 팔만 세워서 공격을 막아내던 레라지에가 반사적으로 두 팔을 세우게 만들었다.
악마들의 침묵 속에서.
“너.... 무패왕의 후예가 아니었구나.”
레라지에가 그리드를 노려봤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꼴이 꽤나 분한 눈치였다.
“무패왕조차도 같은 검술을 2번씩은 쓰지 못했었다. 너는.... 놈의 후예가 아니라 스승이었구나. 그래, 처음부터 나를 기만한 거였어.”
레라지에는 싸워야하고, 이겨야하는 투쟁의 악마다.
패배할 때면 명성에 흠집이 생겼고 이는 격의 하락과 직결됐다.
하물며 같은 대상에게 두 번 연속으로 패배한다는 건.... 결단코 벌어져선 안 될 일이다.
“나를....! 나를 조롱하다니! 이 대결은 무효이니라! 무효야!”
“.....”
“.....”
억울해서 눈물까지 글썽인 레라지에가 우겨봤지만, 공교롭게도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두 번이나 생떼를 쓰는 건 불가능했다.
[퀘스트 <레라지에와의 대결(2)>를 클리어하였습니다.]
[퀘스트 성공 보상으로 레라지에의 보물 창고에 입장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내가 운이 좋았다.”
무릇 승자는 여유가 있는 법.
그리드는 겸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