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80화 (1,270/1,794)

템빨 65권 - 02화

머엉.

“....슈카!!”

머어엉.

“지슈카!!”

이틀 전부터 지슈카의 상태가 이상하다. 넋이 나간 사람마냥 매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기 일쑤다. 심지어 사냥터 한복판에서도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다.

“야, 지슈카!! 귓구멍이 처 막혔냐!!”

“깜짝이야! 좀 작게 말해!!”

“컥!!”

지슈카에게 쏟아지는 투석 공격을 막아준 반트너가 비명을 토했다. 옆구리에 꽂힌 지슈카의 무릎 공격에 허를 찔린 것이다. 비틀대다가 다시 방패를 세워서 몬스터의 머리통을 날려버린 그가 지슈카를 쏘아봤다.

“너 요즘 뭐냐?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사람이 기껏 버스 태워준다는데 강제로 하차할 생각이냐?”

“버스라기에는 몹을 내가 더 많이 잡는데?”

“그야 넌 딜러고, 나는 탱커니까. 몹 잡는 속도는 네가 더 빠를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이게 팀플이지 무슨 버스냐고.”

“.....”

반트너는 딱히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었다.

버스기사를 자처했던 그 본인조차도 사실 이게 정말 버스가 맞는지 의문이었으니까.

궁성으로 전직한 지슈카는 낮아진 레벨이 무색하게도 강력한 공격력을 발휘했다. 특히 주작의 숨결을 운용할 때는 자신보다 레벨이 100 이상 높은 딜러를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자칫 그리드가 떠오를 정도랄까.

생각하는 반트너의 옆구리를 지슈카가 한 번 더 걷어찼다.

“컥, 왜 때려?”

“네가 방금 기분 나쁜 생각을 한 것 같아서.”

“여자의 감이라는 거냐? 빌어먹을, 그 감 한 번 구리네. 나 방금 그리드 생각했거든? 좋아해도 부족할 판국에 왜 사람을 때.... 컥!”

“그리드 얘기 하지 마!”

“....”

세 번째 걷어차이고 나서야, 반트너가 입을 꾹 다물었다.

지난 이틀 동안 지슈카의 상태가 나빴던 원인이 그리드에게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차였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반트너를 지슈카가 찌릿, 노려봤다.

며칠 전 겪은 일을 꿈이라고 믿고 싶었던 그녀는 부정할 말을 골라보았지만 공교롭게도 찾지 못했다. 결국 긍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응, 그래 차였어. 그래서 힘드니까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가서 몹이나 몰아와.”

“흐음....”

반트너는 굳이 지슈카를 위로하지 않았다.

사실 제3자 입장에서 봤을 때 그리드와 지슈카의 관계는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겉보기와 달리 연애에 숙맥인 지슈카는 그리드에게 애정을 어필하면서도 일정 선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리드 곁에 있겠다고 한국으로 이민까지 간 주제에 그 이상 진도를 빼는 방법을 모르고 곁에만 맴돌았다.

이민 후 반 년쯤 지났을 때였나.

운전 중인 그리드의 뺨에 입을 맞췄다며, 그건 정말로 행복하고 짜릿한 경험이었다고 떠드는 지슈카를 보면서 반트너와 템빨단원들은 깜짝 놀랐다.

기껏 이민까지 가서 한 일이 고작 뺨에 입을 맞춘 거라고....?

그쯤은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로도 나누는 행동 아닌가?

....글렀다.

안 그래도 고자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그리드에게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도 모자랄 판국에, 고작 뺨에 입 맞춘 정도로 혼자 신나 두근거리는 꼴을 보니 미래가 암울하다.

지슈카는 또 오랫동안 진도를 빼지 못할 거고, 그 탓에 그리드는 지슈카의 진심이 어디까지인지 끝내 파악하지 못할 거다.

친구라기엔 조금 가깝고, 연인이라기엔 너무 애매한 저 둘의 관계는 앞으로 몇 년이나 계속될 수도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는데, 차였다고?’

반트너는 유능하다. 게다가 호탕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인기가 많다. 비록 대머리긴 하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연애경험은 없지만, 친구들의 연애 상담역은 늘 그의 역할이었다. 일명 연애 박사라는 것이다. 그는 이번 사태가 긍정적인 변화를 시사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흐음, 흐음, 알겠군.”

“뭐야? 기분 나쁘게.”

사람이 차였다는데 고개를 주억거리며 피식피식 웃는 반트너의 태도는 지슈카를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떠는 그녀의 어깨를 반트너가 두드려주었다.

“드디어 사랑 받기 시작했구만.”

“....뭐?”

“여태까지 너를 애매하게 대했던 그리드가 이제 와서 갑자기 너를 찬 게 괜히 그런 것 같아? 그리드는 너를 사랑하게 된 거야. 그래서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기엔 미안하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거고, 결과적으로 네 행복을 위해서 너를 떠나보낸 거라고.”

“그게 무슨 개 같은 논리야?”

“아가야, 원래 사랑은 개 같은 거란다. 특히 경험 부족한 놈들이 사랑을 하게 되면 병신 같은 선택을 연속하기도 하지.”

“그럼 뭐야.... 그리드가 나를 찬 건 내가 좋아져서, 나를 위해서 그런 거고,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거라는 거야?”

“후회하겠지. 이대로 너를 놓친다면 앞으로 영원히 네게 미련을 품을 수도 있어.”

“그, 그런 거야?”

눈을 동그랗게 뜬 지슈카가 활을 인벤토리에 돌려 넣었다. 당장 그리드를 찾아 떠날 기세인 그녀를 반트너가 붙잡아 세웠다.

“바보냐? 그리드가 네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보낸 이유는 너보다 유라가 더 좋아서일 테고, 결국 네가 아닌 유라를 선택한 걸 텐데 당장 그리드를 찾아가서 뭐하려고?”

“뭐,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뭘 어째? 네가 느끼는 슬픔과 우울을 숨기지 말고 고스란히 표현하면서 지내야지. 기운 잃은 네 모습을 볼 때마다 더 후회하고, 아파질 그리드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네게 다가오길 기다리라고. 만약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 그땐 새로운 작전을 실행하면 돼. 우선 정석적으로다가 질투심을 유발하는 작전을 이 연애 박사님께서 설계해주마. 그리드가 지금 당장이야 유라와 매주 데이트를 하느라 유라에게 더 큰 호감을 품고 있다지만 내 작전이 실행되는 순간 상황이 역전될 거다.”

“....”

지슈카는 반트너의 말이 도중부터 들리지 않았다.

더 후회하고, 아파질 그리드.....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지슈카는 급격히 우울해졌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할 그리드의 모습을, 그녀는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하여.

“연애도 못해본 주제에 연애 박사는 무슨~ 세상 박사가 다 얼어 죽었어?”

일부러 밝게 웃었다.

“사냥이나 하자. 어서 빨리 몹 몰아와.”

“....어휴, 답답이.”

지슈카가 아직 10대일 때부터 지켜봐온 반트너다.

대장의 성격을 뻔히 알기에, 그녀가 이 순간 어떤 선택을 내린 건지 눈치 채고 말았다.

“썬 가드으!”

반트너는 울분을 몸으로 표현했다. 행위예술가가 따로 없었다. 민머리로 태양빛을 반사시키는 그에게 몬스터들이 부나방처럼 몰려들었고, 지슈카의 화살은 놈들을 차례대로 격추시켰다.

반트너가 곁에 있다는 전제 하에, 지슈카의 성장 속도는 동레벨 시절의 그리드를 초월하고 있었다.

***

모든 생물에게는 격이라는 게 있다.

그중 악마의 격은 무력으로 판별된다.

수천, 수만의 악마 중 ‘지옥의 군주’가 될 정도의 격을 쌓는 악마는 33마리가 고작이고, 그 33마리의 대악마 중 홀로 지옥의 판세를 뒤집을 정도의 격을 쌓은 대악마는 9마리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레라지에의 격은 다소 애매했다.

지옥 서열 제10위.

그녀는 분명히 강하다.

이 넓은 지옥에서 레라지에 위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레라지에 혼자서 지옥의 판세를 뒤집을 수준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레라지에는 진짜 매우 강했지만, 한 자릿수 서열의 대악마와 실력을 겨루기엔 다소 손색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한 자릿수 서열의 대악마들이 지옥 깊은 곳에 틀어박혀있다는 사실.

‘표면적’으로 레라지에의 지위는 지옥의 계급 피라미드에서 최상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덕분에 지옥 군주들 위에 황제처럼 군림할 수 있었고, 그런 레라지에를 선망하며 따르는 악마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레라지에는 자신을 따르는 악마들의 기대에 부흥하고 싶었다.

그래서 습관이 생겼다.

“나, 패왕 레라지에가 탄생한 이래. 내가 걷는 길 위엔 늘 승리와 쟁취라는 두 글자만이 수식됐었느니라.”

“우오오오!! 역시 레라지에 님이 최고십니다!!”

“꺄악! 레라지에 님! 너무 멋지세요!!”

....소위 말하는 허풍이었다.

위로 아홉이나 되는 군주를 두고도, 레라지에는 늘 자신을 ‘으뜸’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악마들에게 자신이야말로 최고라고 주입시켰다.

사실 그리 큰 왜곡도 아니다.

“하지만 단 한 번.”

꿀꺽.

늘 자신감과 패기로 넘치던 레라지에의 눈동자가 드물게 가라앉자 악마들이 마른 침을 삼킨다.

“정말로 딱 한 번, 나는 승리를 거머쥐지 못했었다.”

“허억....!”

악마들이 자지러지게 놀랐다.

레라지에의 성에 모인 수천 악마 중 놀라지 않은 악마는 단 하나, 플레이어 유일의 대악마 후보 ‘로제’뿐이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10위면 뻔하지. 서열전에서 9위 대악마에게 도전했다가 졌겠지.’

그러니까 10위 아닌가?

생각하는 그녀에게 레라지에의 시선이 꽂혔다.

“너는.... 이번에 갓 태어났다는 소문의 아이로구나.”

“네! 로제라고 합니다!! 아모락트님의 축복을 받아 악마가 됐어요!!”

속내야 어찌됐든, 로제는 레라지에에게 극진했다. 지옥에서 가장 존귀한 지존을 섬기듯이 대했다. 머리를 땅에 박을 기세였다.

그러자 레라지에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씰룩였다.

“흠, 아모락트의.... 그래, 기억해두마.”

레라지에가 다시 한 번 좌중을 살폈다.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천천히 곱씹었다.

“누구와 무엇을 겨루든지 승리하려는 습성을 지녔으며, 반드시 승리하는 패왕. 33인의 지옥 군주 중에서도 으뜸인 나 레라지에에게 ‘무승부’라는 애매한 전적을 남기게 만든 존재.... 놈은 놀랍게도 인간이었다.”

“....!”

“....!”

두 눈이 휘둥그레진 악마들이 술렁거렸다.

악마들 사이에서 ‘뮐러’의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레라지에는 부정했다.

“나와 무승부를 나눈 인간은 검성 따위가 아니다. 놈의 이름은 마드라..... 그래, 마드라였다.”

마드라.

로제도 들어본 이름이다.

본래 유명한 인물은 아니었다.

마치 파그마처럼, 그리드 덕분에 뒤늦게 사람들에게 알려진 전대의 전설이다.

“광오하게도 ‘무패왕’이라고 불렸던 놈이지.”

“무패왕!”

악마들의 술렁임이 커졌다.

무패왕.

패배하지 않는 왕이라니.

마치 레라지에 님께 도전하는 듯한 칭호가 아닌가.

“놈에겐 무패를 자처할 자격이 있었느니라. 비록 인계에서의 싸움이긴 했지만.... 내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입장이긴 했다만.... 어찌됐든 놈은 나와의 치열한 접전 끝에 패배하지 않고 간신히나마 살아남았으니 치하할만하다. 후후훗.”

“오오!”

악마들이 감탄했다.

패왕 레라지에께서 치하할 정도의 인간이라니, 정녕 대단하다 싶었다.

무패왕에게 좌중의 관심이 집중될 때였다.

“부군단장 칼바바가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였습니다!!”

지축이 흔들린다 싶더니 10지옥이 자랑하는 전차군단이 귀환했다.

한데 부군단장 칼바바의 대형 전차 위에 두 명의 인간이 나란히 서있었다.

악마들의 살기가 들끓었다.

악명 높은 데빌 슬레이어의 기운을 읽은 것이다.

“진정하라.”

레라지에가 단 한 마디로 악마들을 제지했다. 그러자 당장 유라에게 달려들 기세였던 악마들이 냉큼 허리를 숙이고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레라지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소개하마. 저 인간이 바로 무패왕의 후예니라.”

“....!”

“....!”

유라를 노려보던 악마들의 시선이 뒤늦게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나, 패왕 레라지에는 나와의 승부에서 입은 상처를 감당하지 못하고 끝내 죽어버린 무패왕에게 애도를 표하는 의미에서, 또한 나 자신의 전승(全勝) 기록을 복구하기 위해서 무패왕의 후예와 정정당당한 승부를 나눌 것이니라.”

“우와아아아아!!”

장내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황당한 개소리의 향연이었고, 도통 납득하지 못할 전개였다.

‘사람을 기껏 불러놓고, 뭐?’

애초에 ‘데스나이트 마드라’에게 져놓고 무승부는 무슨.... 치매라도 걸린 건가?

뭔가 특별한 이벤트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기대가 무참히 깨진다.

괜히 왔다. 상종해선 안 될 부류다.

실망하며 퇴로를 물색하는 그리드에게 레라지에가 말했다.

“그대, 무패왕의 후예여.”

“....?”

“과거 내가 무패왕과 싸웠을 때와 달리 이곳은 지옥이라 내게 유리하고, 네게 불리하니 어느 정도 조건을 맞춰주겠다. 흐음.... 그래, 나는 이 옥좌에 가만히 앉아있겠느니라. 또한 한 팔만 사용하겠다. 그리고 이는 정정당당한 결투. 네 목숨을 취하지 않겠느니라.”

“....”

“5분. 5분 내에 내가 옥좌에서 일어나거나 두 팔을 쓴다면 나의 패배인 것이고, 그러지 아니한다면 나의 승리이니라. 결투를 받아들이겠느냐?”

레라지에는 투쟁의 대악마다.

싸워야하고, 이겨야한다.

이길수록 강해진다.

그녀는 무패왕에게 ‘패배’했던 전적을 승리로 바꿔야만 더 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무패왕은 죽어 없으니 그의 기술을 계승한 그리드에게 집착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알겠다.”

눈앞에 떠오른 퀘스트 내용을 재차 확인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5분의 제한 시간이 있는 퀘스트가 시작됐다.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모든 버프 스킬을 두르고 5융합 검무를 시전하며, 검무의 동작이 끝자락에 닿는 타이밍에 순보를 발동시켰다.

쩌저저저저저정!!

“....잠깐, 다시 하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레라지에가 정중히 요청했다.

그녀는 여전히 옥좌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양팔’엔 초연살파극의 검로가 어렴풋한 흔적으로 남아있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