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20화
미식룡 레이더스를 만나기 전.
그리드는 지크프렉터와의 접선을 시도했다. 그에게 사자(使者)가 되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지크프렉터의 궁극적인 목표와 자신의 과업이 일치하는 이상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해도 좋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리드는 지크프렉터에게 부탁 자체를 하지 못했다.
지크프렉터가 환국을 다녀온 뒤로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이다.
-내 생각엔 환국 놈들이 수작을 부린 것 같다.
지크프렉터의 측근 중 유일한 플레이어이자 유일한 연락책인 지발은 동쪽의 신들을 의심했다.
-그랜드마스터께 손을 잡자고 설득했다가 거절당했으니 원한은 충분하고도 남지. 애초에 나태의 저주라는 건 신이 물은 원죄로부터 비롯한 거라며? 환국 놈들, 특히 그 한울이라는 놈이 저주에 개입해서 심화시키는 게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거다.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다.
그리드는 공감하는 한편 지발의 변화에 흥미를 느꼈다.
본래 지발은 지크프렉터가 없는 자리에선 존칭을 생략했었다. 그냥 단순히 그랜드마스터라고 지칭했었는데 이제는 존칭을 붙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지크프렉터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저절로 공경하게 된 눈치였다.
마치 그리드와 칸, 크라우젤과 키리누스의 관계처럼 말이다.
-...아니, 내가 누구를 어떻게 부르든 네가 뭔 상관이냐? 크흠, 어찌됐든 요즘 그랜드마스터께서 깨어있는 시간은 너무 적고, 불규칙하다. 심하면 한 달 내내 잠들어 계실 때도 있어서 나도 하루 종일 곁에 붙어있지 않는 이상 그랜드마스터와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어. 뭐? 템빨국으로 모셔가라고? 그건 안 돼. 기껏 신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만든 은신처를 벗어났다가 제라툴 놈한테 표적이 됐다간 우리나 너네나 X되는 거라고.
알고 보니 지크프렉터의 세력도 큰 고충을 겪고 있었다.
제국을 떠난 뒤부터 제라툴과 무신의 추종자들에게 추적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제국의 시조 사하란이 지크프렉터의 기척을 숨기기 위해 설치했던 봉인은 지크프렉터가 제국을 배신한 시점부터 가동을 멈췄다고 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설계된 건지, 황실 누군가의 소행인지는 파악이 안 된 상태지만 그리드는 전자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바사라는 지크프렉터와 이 이상의 원한을 쌓는 걸 원치 않는 눈치였으니.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그랜드마스터 곁에 최대한 붙어 있다가 깨어나는 즉시 연락줄 테니까. 뭐? 왜 이렇게 친절하냐고? 친절하기는 개뿔. 난 그냥 원래 착해. 그리고 천사라는 놈들이 하는 짓거릴 방송으로 봤을 뿐이다. 화가 나더군.... 그랜드마스터께서 평생토록 아스가르드와 대적해온 이유가 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했다. 그러니까.... 응원한다. 언젠간 꼭 같이 아스가르드를 조지자.
지발.
현존 유일의 마장기 기사.
마장기 생산이라는 포부를 품은 그리드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재인 그는, 그리드가 그를 필요로 하듯 그리드를 필요로 하는 눈치였다.
피차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리드, 그랜드마스터께서 잠시 깨어났을 때 경고하셨으니까 참고해라. 너, 혹시 백호와 청룡의 봉인마저 풀 생각이라면 순서는 되도록 청룡부터가 좋다고 하더군.
-확실해? 청룡도를 지키는 놈이 양반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데 굳이 그놈하고 먼저 싸워야한다고? 근거가 뭔데?
-잠시 깨어나셨을 때 하신 말씀이라 내막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랜드마스터를 신뢰한다.
-흠....
그리드 또한 지크프렉터의 조언을 좌시할 순 없었다.
지크프렉터는 그리드의 우군이 확실했고, 괜한 말을 하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그리드는 지크프렉터의 조언에 뚜렷한 근거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국에 문(門)이 열렸습니다.”
미식의 주기를 앞두고 맛집을 수배하기 위해 초국과 씽국을 차례대로 방문했을 당시.
초왕과 씽왕은 그리드에게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문, 말입니까?”
“네, 얼마 전에 하늘에서 상서로운 빛이 내려오더니 까마귀와 까치가 잔뜩 몰려와 오작교를 놓았습니다.”
“빛을 따라 놓인 오작교는 가야에서부터 파국으로 뻗어나간 뒤에 사라졌는데, 이는 즉 가야와 파국을 잇는 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나 전설을 근거에 둔 이야기이긴 하지만....”
초왕과 씽왕은 신화를 실제로 목도해온 인물들이다.
그들이 전설을 불신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전설이자 신화인 그리드가 어찌 전설을 불신하겠는가.
‘일종의 워프 게이트가 연결된 건가?’
가야에서부터 파국으로 뻗어나간 오작교가 문을 열었다함은, 가야에서 파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워프 게이트가 열렸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옳을 듯하다.
여기까지 이해한 그리드는 지크프렉터가 왜 파국이 아닌 가야를 먼저 노리라고 조언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파국이 약하다고 먼저 쳤다간 가야에서 지원 오는 미르에게 다구리 맞고 뒤질 각인거군.’
환국은 이미 2개의 사신을 잃었다.
남은 2개의 사신마저 빼앗길 순 없다고 경각심을 품은 와중에 그리드가 새로운 신이 됐다는 소식까지 접했을 테니 철저히 방비했을 것이다.
그 방비라는 게 이번에 열린 문인 것이고.
“그 문을 통해 파국에서 가야로 이동하는 건 못하는 겁니까?”
“불가능합니다. 오작교가 양쪽에서 함께 뻗어나갔다면 서로 자유롭게 왕래했을 텐데, 이번 오작교는 가야에서 파국으로 뻗어나간 형태인지라....”
‘설마 도발하는 건가?’
파국은 가야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나, 가야는 파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구조.
가야에 들어올 테면 들어와 보라고 도발하는 듯하다.
아니면 애초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걸 수도 있다.
‘....후자에 가깝겠군.’
최강의 양반.
얼마나 오만할지, 굳이 직접 확인해보지 않아도 안다.
미르.
소문만 무성한 놈의 전투력은 어느 정도일까.
양반 중 최고의 무재를 타고났으며, 가람과 달리 게으르지 않았고 치우의 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모든 무술에 통달했고 무엇보다도 사신의 권능을 완벽하게 체화한 상태다.
우선 여기까지가 그리드가 알고 있는 미르에 대한 정보였다.
이 단편적인 정보만으로도 미르가 가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강자라는 사실을 유추하기 쉬웠다.
자신감으로 넘치는 게 당연한 것이다.
‘내게 승산이 없을까?’
그리드는 우선 가람과 1대1로 싸운다는 가정을 세워봤다.
아무런 외적 도움 없이 순수하게 기량을 겨뤘을 때, 지금의 자신은 가람을 이길 수 있을까.
몇 번이나 싸웠던 가람의 전투력을 토대로 시뮬레이션해본 그리드가 곧 결과를 도출했다.
‘가람은 이긴다.’
10번 싸워서 10번 다 이길 거라는 확신은 없다.
본래 전투라는 건 변수가 많은 법이고, 가람의 능력치가 워낙 출중했다.
하지만 10번 싸워서 8번, 9번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미르가 가람보다 정확히 얼마나 더 강한지는 모르지만, 아예 싸움이 안 될 수준일 거라고 짐작하긴 힘들었다.
애초에 그리드는.... 강하다. 아니, 강해졌다.
가람과 한창 싸우던 시절과 비교해도 몇 배나 더.
‘의외로 해볼만할 수도.’
자신감은 행동으로 직결됐다.
미식의 주기가 끝난 후.
지혜의 탑을 다녀와서 한동안 사냥에 열중해 펫과 소환수들의 레벨을 끌어올린 그리드는 곧장 동대륙으로 이동했다.
크라우젤이 동대륙에서 날뛰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라는 판단이었다.
‘우선.... 크라우젤이 돌아올 때까지 분위기 파악이나 해볼까.’
조금 전.
크라우젤이 두 명의 양반을 살해했다는 월드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가야는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일 것이다.
‘이곳이 가야인가.’
그리드가 가야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밤이었다.
오는 길이 제법 험난했다.
방위를 상실하게 만드는 결계가 길목마다 설치돼 있었고 산과 강마다 괴수들이 가득했다.
일반인은 절대로 가야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가야는 완전하게 고립돼 있었다.
타앗!
도약해서 성벽을 넘는 그리드의 은발이 은하수처럼 밤하늘을 수놓았다.
사막에 둘러싸여 있으나 도시엔 항상 눈이 내리는 가야의 밤은 밝았다. 땅에 닿는 달과 하늘 가득 떠오른 별들이 내뿜는 빛을 흡수한 눈길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밝음으로는 그리드의 모습을 포착하기 힘들었다.
그리드는 높은 민첩성을 활용해서 빠르고, 은밀하게 도시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눈 쌓인 담길 아래 그늘에 녹아들어 직진했다.
목적지는 도시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성터.
저곳에 미르와 청룡도가 있다.
운만 좋다면야 미르를 만날 것도 없이 청룡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며 속력을 높이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땅에 닿는 달.
거대한 보름달이 가로막듯 서있는 대로 중앙에 하나의 인영이 서있었다.
달을 등지고 선 놈은 새카만 그림자였기에, 그리드는 놈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이름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놈이 바로 미르다.
그 가람조차도 시기심을 표출했던 최강의 양반.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드님.”
“....!”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맑다.
정중히 인사하는 그의 태도에 놀란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멈칫 굳었다.
“당신의 신격은 특별합니다. 인간들의 염원으로 빚어진 것이죠. 인간이라는 종(種)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나, 당신의 기풍은 한울님이나 사신수와 비교해서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눈치 채이기 쉽습니다. 기운을 갈무리하고 싶다면 새로운 기술을 익히셔야겠지요.”
“....멀리 마중 나온 것도 그렇고, 굉장히 친절하군.”
그리드는 미르로부터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더욱 더 긴장했다.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상대일수록 까다로웠다는 사실을 상기한 것이다.
“당신에게 이 청룡도를 빼앗아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그 이후의 대화는, 친절은 없었다.
미르는 한 발 앞으로 내딛었고 그리드는 초월경에 진입했다.
쩌정! 쩌저저저저정!!
두 사람의 검과 도가 부딪칠 때마다 담벼락이 흔들렸다. 그 위에 쌓였던 눈들이 눈보라가 되어서 흩어졌다.
이를 악 문 그리드의 안색이 점차 굳어갔고, 그가 기습적으로 쏜 마법을 슬그머니 피하는 미르의 눈엔 이채가 피어올랐다.
짧지만 마치 영원 같았던 격전.
“허억.... 허억....”
수십 회 공방의 후폭풍으로 숨을 몰아쉬는 그리드에게 미르가 말했다.
“강하시군요. 하지만 아직은 부족합니다.”
콰르릉!!
그리드가 밟고 선 대지가 물결치더니 이내 솟구쳐 올랐다.
이 힘이 무엇인지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지신이다.
파지직!!
뇌광에 휩싸인 미르가 어느새 그리드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 힘 또한 무엇인지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뇌신이다.
쩌저저저저정!!
피를 토한 그리드의 몸이 차가운 눈밭 위를 나뒹굴었다.
‘죽고 시작하나?’
너무 세다.
상정했던 것 이상이다.
쿨럭, 피를 토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그리드의 곁으로.
“성격이 급하군.”
검성 크라우젤이 다가와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