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76화 (1,266/1,794)

템빨 64권 - 19화

“큭, 왜 하필 지금 모래폭풍이....”

“무시하고 쫓아. 드디어 찾은 놈을 이렇게 놓칠 순 없다.”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쳐 죽여주지.”

사색(四色)의 도포가 요란하게 펄럭인다.

장렬한 모래폭풍이 사막을 질주하는 양반들을 짓누르며 시야를 가렸지만 부질없게도 양반들의 달리기는 점차 빨라졌다.

천변지변이 만물을 휘어잡는다 한들 반신을 통제하긴 힘든 것이다.

‘고작 이 정도로 우리를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양반 예음.

청룡도의 수호자로 선택돼 가야에 머물고 있는 미르의 오른팔.

사실 그녀는 이번 일정을 쉽게 생각했다. 미르가 청룡도를 지키고 있는 이상 소문의 그리드도 감히 가야를 침범하진 못하리라 판단했다. 가야에서 지내는 동안 미르에게 수학하며 단련에나 열중할 계획이었다.

한데 반년 전, 그리드가 아닌 다른 인간이 가야에 숨어들었다.

검성 크라우젤.

처음에 놈은 은밀하게 움직였다. 전대 검성 뮐러의 비급을 찾아 헤매는 듯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과감하게 움직인다 싶더니 양반들을 시해하기 시작했다.

놈에게 죽은 양반의 숫자가 무려 셋이다.

하나 같이 갓을 벗지 못한, 아직 자격을 얻지 못해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한 양반들이라곤 하지만 절반은 신의 피가 흐르는 위대한 존재를 고작 인간 따위가 학살한 것이다.

예음은 크라우젤을 용서할 생각이 결단코 없었다.

“....!?”

잠시 분노에 매몰된 탓일까.

우선 빨리 모래폭풍을 돌파하기 위해 내달리던 예음은 자신의 뒤를 따르던 양반 중 하나의 기척이 사라졌단 사실을 한 발 늦게 인지하고 말았다.

“멈춰!!”

“....!”

예음의 날카로운 외침이 양반들을 정지시켰다.

“윽!”

걸음을 멈춘 탓에 모래폭풍의 압박이 더욱 거세진다. 몇 걸음 밀려나다가 간신히 멈춘 양반들은 서로가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기척으로 느꼈다. 바로 곁에 있는 동료를 눈으론 보지 못했다. 그만큼 황사가 짙었다.

“닻별이 사라졌다.”

“....?”

예음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양반들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처음엔 넷이었던 자신들의 숫자가 어느새 셋으로 줄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폭풍에 삼켜져서 멀리 날아간 건가?”

“그럴 리가. 길을 잃었겠지.”

“아니....”

예음이 왔던 길을 되돌아보았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예리한 감각은 아직 방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사냥 당했어.”

“뭐?”

“검성이 저 안에 있다.”

“.....”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

점차 거세지는 모래폭풍.

닻별과 크라우젤이 지금 저 안에서 싸우고 있다.

코끝을 스치기 시작한 혈향은 필시 닻별의 것일 테지.

두 사람의 싸움은 크라우젤의 기습으로부터 시작됐을 테니까.

“말도 안 돼. 예음, 사냥 당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아.”

양반들이 부정했다.

예음의 말은 마치.... 크라우젤이 모래폭풍이 올 걸 미리 알고 우리를 여기까지 유인했다는 것처럼 들렸기에.

검사 따위가 그런 선견지명을 가졌을 리 없다.

설령 도사처럼 도술을 부려 모래폭풍의 출현을 예측했을지라도, 이 강력한 모래폭풍 안에서 자유롭게 무력을 행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보다 몇 배나 뛰어난 감각과 시력을 지닌 우리조차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흡.”

불신을 키워가던 양반 하나가 헛숨을 들이켰다.

철을 혀로 핥은 듯한 맛이 난다 싶더니 꿀렁, 끈적이고 뜨거운 액체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으, 윽....”

휘청,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자신의 목에 박힌 것을 양손으로 거머쥔 양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검이었다. 차가운 검이 자신의 목을 관통하고 있었다.

“....놈!!”

양반은 쉽게 죽지 않는다.

설령 심장을 찔릴지언정 물리적 충격에 잠시 멈칫할 뿐이다.

목에 박힌 검을 뽑아낸다. 뻥 뚫린 구멍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침에도 살아남은 양반이 허리띠마냥 두르고 있던 연검을 빠르게 풀었다. 동시에 채찍을 휘두르듯이 내리쳐 자신을 기습한 놈에게 반격했다.

하지만 강력한 모래폭풍이 얇은 연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검신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얇은 양반의 연검은 여러 형태를 소화하며 변칙성을 갖지만 질량이 낮다.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며 궤도가 뒤틀렸다.

순간, 양반은 깨달았다.

저 두더지 같은 새끼가 하필 모래폭풍 속에서의 싸움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벽력.”

파직!

응축된 검기가 벼락을 일으킨다.

가속의 발판이 마련됐음을 암시하는 광경이었다.

모래폭풍 속에 웅크린 사냥꾼, 검성 크라우젤이 가속을 얻은 몸으로 다음 검술을 연계시켰다.

“광란 검.”

━쿠와아아아앙!!

폭음이 터졌다.

동시에 한 줄기 번개로 변해 모래폭풍을 돌파한 크라우젤의 신형이 양반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쿨럭....!”

쾅!! 콰쾅!! 쿠콰콰콰콰쾅!!

폭음이 연계된다.

그때마다 크라우젤의 신형은 양반의 시야에서 흐릿하게 사라졌고 동시에 양반의 앞으로, 뒤로, 옆으로 나타나 양반의 몸을 검으로 난도질했다.

“.....!”

양반은 어느새 비명을 지르는 일조차 잊었다.

넝마가 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선 놈의 몸을 다시 한 번 꿰뚫고 나타난 크라우젤이 촤하학,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그 순간.

콰쾅!!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모래폭풍 속에 휘몰아치던 분진이 연소와 폭발을 무차별적으로 반복했다.

크라우젤이라는 번개가 일으킨 열과 압력의 영향으로 발생한 분진폭발이다.

폭풍의 영향권에 있는 공간을 모조리 초토화시키는, 대마법의 위력을 재현하는 듯한 폭발의 연쇄였다.

“....!!”

또 한 명의 동료가 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살피던 예음이 폭발에 놀라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오직 하늘을 찾아 비행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폭풍에 짓눌리고 있는 반면, 그녀를 뒤쫓는 폭발의 연쇄는 도리어 폭풍을 타고 가속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예음이 폭풍의 영향권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을 폭발이 집어삼켰다. 가공할 파괴력이 깃든 폭발은 그녀의 도포를 갈기갈기 찢고, 피부를 불사르고, 뼈를 부셨다.

하지만 예음은 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이를 악 물고 고통을 감내하며, 폭발의 영향을 받아 좌우로 잠시 흩어진 폭풍 사이를 노려봤다.

금룡포를 입은 사내가 보였다.

반신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은 와중에도 예사로운 놈의 표정이, 예음은 괘씸해 미칠 노릇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심기체 중 기만 갖췄던 놈인데, 어느새 심과 체까지 갖춰 이런 난장을 만들 수 있게 됐단 말인가.

“너....! 너 거기서 기다려!!”

여전히 연계되는 폭발 속에서 간신히 쥐어짜 외치는 예음에게,

“아니, 어머니께서 찾으신다.”

“....?”

크라우젤은 황당한 핑계를 지껄이며 등을 돌렸다.

“멈춰! 멈추라고!! 이...! 이 쥐새끼얏!!”

잠시 귀를 의심하며 멍해졌던 예음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함쳤다. 어설프게나마 욕설도 뱉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크라우젤은 이미 폭풍 너머로 사라졌다.

이 광활한 사막의 어딘가로 숨어들었을 녀석을 다시 찾아내기 위해선 또 다시 몇날 며칠을 고생해야하는 것이다.

***

사막 북쪽의 협곡.

초감각의 도움을 받아 모래폭풍을 간신히 벗어난 크라우젤이 일단 급한 대로 몸에 붕대를 감았다.

닻별이라는 이름의 양반을 처음 습격했을 때 급소를 찔린 바람에 물약만으론 상처가 회복되질 않았다. 한동안 붕대로 지혈해야 회복이 진행될 것이었다.

“아쉽군....”

부족했다.

닻별의 반격을 피하지 못한 바람에 체력과 스킬의 소모가 너무 컸다.

본래의 목표는 예음을 제외한 세 명의 양반을 암살하는 것이었지만, 두 명으로 만족해야했다. 두 번째 기습 대상의 목을 베어 넘기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짜버렸다.

‘모래폭풍까지 이용한 게 이 정도....’

한 달에 한 번뿐인 기회. 아니, 앞으로 두 번 다신 노리지 못할 기회를 아쉽게 날렸다.

‘뮐러의 비급을 외면한 대가인가.’

크라우젤은 뮐러의 비급을 이미 여러 권 손에 넣었지만 그 비급을 익히진 않았다.

남들은 어리석다 욕할지 몰라도, 그에겐 아직도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검성이란 뮐러의 후예가 아닌 바로 나, 크라우젤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각인시키고 싶다는 목표였다.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최고의 위업을 달성하고 싶게 마련 아닌가.

현재의 크라우젤이 노릴 수 있는 최고의 위업은 뮐러와 최소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그리드와 나란히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착실히 나아지고 있다.’

크라우젤은 가야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던 뮐러의 비급마저도 찾아냈다.

가야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에 남아 양반들과 싸워온 이유는 당연히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처음 예음과 싸웠을 때 눈치 챘다.

양반과 싸우면 초감각 스탯의 숙련도가 굉장히 빠르게 오른다.

네임드 보스 몬스터, 혹은 네임드 NPC와 싸울 때와 비교해도 배 이상은 빨랐다.

그만큼 힘든 상대이긴 하지만.... 크라우젤은 초감각의 단련을 의무라고 판단했다.

초월경.

0.1초 단위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움직이는 경지.

그러므로 체력과 정신력의 소모가 극심한 그 최고위의 경지에 도달하고, 통제하는 길은 초감각을 갈고닦는 거라고 뮐러가 말했으니까.

통제.

완벽한 제어.

Satisfy 최강의 전투 클래스인 검성은, Satisfy에서 ‘유일’하게 초월경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직업’이다.

초월의 격을 쌓아 초월경이라는 ‘경지’를 이룬 초월자들은 초월경을 사용할 때의 반동을 견디지 못하는 반면 검성은 견뎌낼 수 있다.

전직 퀘스트를 통해 엿봤던 과거의 뮐러가 했던 말이니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한 정보였다.

“.....”

드디어 상처가 회복됐다.

명상 스킬을 멈춘 크라우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양반 사냥에 맛 들렸어? 반신 죽였다는 월드 메시지를 도대체 몇 번이나 띄우는 거야?

귓속말이 들려왔다.

언제 들어도 반가운 목소리다.

-필요에 의해서 하는 일이다.

-대단하다, 대단해. 지금 어디야?

그리드였다.

거침없이 질문하는 그에게 크라우젤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가야에 머무는 중이다.

-어? 나도 가야에 볼 일이 있어서 온 건데.

-....

크라우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가 ‘볼 일’을 운운하는 순간 그가 동대륙의 사신들을 해방시켰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불길함에 휩싸였다.

가야에 봉인된 청룡도.

사신의 무기가 크라우젤의 뇌리를 스쳤다.

-간만에 얼굴 한 번 보자. 가야에 도착해서 연락할게.

-....그래, 시간이 맞으면 만나도록 하지. 오늘은 바빠서 이만.

-잠깐, 어차피 곧 도착.... 응?

그리드가 당황했다.

‘귓속말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알림창이 뜬 까닭이다.

크라우젤은 예음에게 거짓말을 했던 게 아니다. 진짜로 어머니 때문에 로그아웃 했다.

오래간만에 떡국이 드시고 싶다는 어머니의 전날 밤 말씀을, 효자인 그가 잊을 리 없다.

미국은 어느덧 아침.

잠시 후에 일어나실 어머니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미각을 지키기 위해서 크라우젤은 직접 떡국을 끓일 계획이었다.

‘미르.... 그가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인지 말해줘도 그리드는 도전할 테지.’

실패할 걸 뻔히 알아도 반드시 도전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그리드 역시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게 익숙한 인물이니까. 나와 닮은 그가 실패를 두려워할 리 없다.

하지만 굳이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도와줘야할까?

당연히.

‘도와줘야지.’

피식 웃은 크라우젤이 정성껏 떡국을 끓였다.

***

‘접속 제한 시간에 걸렸나? 설마 나랑 노는 게 싫어서 일부러 피하는 건 아니겠지?’

대화 중 로그아웃한 크라우젤을 그리드가 살짝 의심했다.

안 그래도 몇 달 전에 언쟁이 있었다.

그리드는 크라우젤과 국대전에서 다시 한 번 만나 재대결을 해보자는 입장이었고, 크라우젤은 어차피 싸워봤자 자신이 질 게 분명하며, 국대전은 참가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입장이었다.

그리드는 크라우젤이 패배를 확신하는 부분엔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국대전에 참가하는 게 시간 낭비라는 주장에 대해선 공감했다.

국대전 보상은 과거와 변하지 않았다.

최고 보상이라고 해봤자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 혹은 사신의 숨결급 제작 재료다. 숨결을 써서 신화급 아이템도 노릴 수 있는 그리드와 달리 크라우젤의 입장에선 별 메리트를 느낄 수 없는 보상인 것이다.

대회에 참가하는 자체만으로 기업들의 후원을 얻어 부가적인 수입을 얻을 순 있지만, 단순한 재화는 크라우젤급 랭커에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미 그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부호니까.

‘국대전 보상을 상향해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상향될 가능성은 낮다.

국대전 보상이 유지돼야만 크라우젤 같은 최상위 랭커들이 국대전을 외면하고 중견급 랭커들이 활약할 무대가 갖춰진다. 만약 S.A그룹이 최상위 랭커들을 섭외하겠답시고 보상을 상향할 경우 독과점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국대전은 나도 관둬야겠지.’

크라우젤이 참가하지 않는 국대전은 그리드에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숨결은 어차피 템빨단원들이 구해다준다.

국대전 참여 의사를 묻는 우편에 거절의 답변을 보낸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곧 가야다.

‘우선.... 크라우젤이 돌아올 때까지 분위기 파악이나 해볼까.’

지난 두 달 동안 사냥에 집중하는 한편 미르의 정보를 수집했다.

결론은, 미르는 여태껏 만난 적 중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상대라는 것이다.

혼자선 솔직히 벅차보였다. 기사들을 소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상대 같았다.

청룡의 봉인을 풀고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동대륙을 방문한 그리드는 크라우젤과의 파티 플레이를 꿈꿨다.

과연 성사될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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