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74화 (1,264/1,794)

템빨 64권 - 17화

한 덩이의 월야철.

그리드가 얻은 보상의 크기는 그 뛰어난 공적과 상반되게 작았다.

솔직히 말해서, 월야철과 탐욕(광룡철)의 융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월야철을 최소 세 덩이는 받아야겠다고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래는 이미 끝났다. 후회해봤자 늦었다. 설령 요구했었다고 해도 거부당했을 테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애써 마음을 달래보지만, 부질없게도 골치가 아프다.

한 덩이 월야철의 무게는 800g.

이마저도 제련하면 600g으로 줄어든다.

그리드가 가장 애용하는 형태의 무기는 장검인데, 600g의 금속으로 장검을 만든다는 건 상당히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검신의 용적과 무게중심이 아쉬워질 것이다. 즉 명품(名品)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브라함에게 별도로 단련을 부탁해야하고.’

월야철과 탐욕의 융합이 불가능한 이상 월야철은 별도의 마법 단련을 진행해야한다.

이래서야 브라함의 시간을 엄청나게 빼앗는 꼴이다.

부탁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흠....”

잠시 고민하던 그리드가 무형의 검을 손에 쥐어보았다.

헥세타이아의 소검과 완전히 똑같은 형태와 크기의 검을 가상으로 만든 것이다.

‘연, 살, 파.’

쿠웅-!

검을 쥐었다, 라는 가정을 세운 채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동작엔 격조가 있었다. 수천, 수만 번 반복해온 동작이 그의 육체와 혼연일체를 이뤘다.

누구라도 보고 반할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 유려한 광경이었다.

3좌 라드볼프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파그마의 경지는 진즉에 초월했군.’

바알과 계약하기 전의 파그마.

양반을 반면교사 삼아 약자들을 지키겠다는 사명을 품었던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긁어모았다. 필시 전설로 남을만한 강자였다.

하지만 굳이 그리드와 비교하자면 대장장이로서의 경지도, 검사로서의 경지도 모두 낮았다.

소위 말하는 재능의 차이가 아니다.

그리드를 천재라고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는 반면 파그마의 태생은 양반.

굳이 재능을 논하자면 당연히 파그마의 재능이 그리드의 재능보다 위였다.

그리드가 파그마를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혼자였느냐, 함께였느냐의 차이.’

주작의 심장, 현무의 등껍질, 용단, 그리고 강대한 마력.

그리드가 체화하고 있는 물질들과 능력은 누군가의 호의와 도움 없이는 얻기 힘든 것들이다.

그리드가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타인을 불신하여 혼자였던 파그마와 달리 그리드는 타인을 신뢰하며 공생을 이뤘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 역시 타인의 도움을 받아올 수 있었을 테지. 나를 돕고 월야철이라는 선물을 받은 것처럼.

라드볼프가 생각하는 동안 그리드는 소검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었다.

‘소검의 공격 거리는 너무 짧아. 검무의 범위가 줄어든다.’

대표적으로 연과 살의 적중 범위가 짧아진다. 장검을 쥐었을 때와 비교해서 한 걸음, 두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대상에게 공격을 적중시키기 용이해지는데 그리드는 그런 초근접전에서의 전투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마법과 갓 핸드를 활용하는 입장에선 당연히 적절한 거리를 확보하고 싸우는 게 유리하고 효율적이었다.

‘아니.... 이젠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그리드는 삼제 이정의 권술과 금나수를 익혔다.

혼투격(渾投擊)과 천지 뒤집기.

대상에게 접근해야 적중시킬 수 있는 이 2개의 스킬은 경직과 스턴을 유발한다.

특히 혼투격의 경우, 다음 연계 스킬을 ‘모션 없이’ 발동시킨다. 혼투격에 맞고 경직된 대상에 한해서라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그 전제 조건만 달성한다면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5융합 검무를 연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그리드는 초근접전에서야말로 가장 높은 DPS를 뽑아낼 수 있다.

‘그래.... 앞으로는 오히려 근접전을 선호해야하는 입장이다.’

근접전에선 당연히 장검보다 소검의 효용성이 올라간다. 리치가 짧은 무기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판단한 그리드가 아쉬움을 달랬다.

이 한 덩이의 월야철로 헥세타이아의 소검에 근접하는 최강의 소검을 만들어낼 거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언젠간 반드시.’

헥세타이아를 구한다.

지금으로썬 한없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반드시 이뤄야할 목표다.

나를, 내 소중한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위기에 빠진 은인을 외면할 순 없으니.

“라드볼프님, 거인족의 소중한 유산을 제게 선물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보물을 부끄러움 없이 쓰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잡은 그리드가 라드볼프를 똑바로 마주보고 말했다. 그 올곧은 시선에 라드볼프는 내심 놀랐다.

그리드는 마치 제국의 시조 사하란처럼 언제라도 지상을 지배할 수 있는 무력과 권력을 지닌 인물이다. 한데 그의 눈빛엔 그런 폭력적인 야망이 전무했다. 사하란을 범인으로 전락시킬 정도로 높은 이상을 품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야테 공께서 애착을 가지시는 이유가 있었군.’

피식 웃은 라드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월야철이 네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

자신도 모르게 상냥한 어조로 말하는 라드볼프였다.

그의 형제인 2좌 프론잘츠가 이 모습을 본다면 놀라다 못해 기겁할 일이었다.

***

“신이 된 것을 축하하네.”

지혜의 탑의 정상.

오래간만에 만난 하야테는 늘 그랬듯 그리드를 미소로 반겨주었다.

공손히 인사하는 그리드의 표정은 불편했다.

“과연 축하받을 일인가 싶습니다.”

그리드는 신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다.

사람들과 사리엘의 염원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저는 두렵습니다.”

과거, 그리드가 반신으로 진화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들과 적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반신은커녕 신이 돼버린 지금의 그는 언젠가 반드시 신과 적대하게 될 운명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분도 있고요.”

“치우를 말함인가.”

하야테 또한 치우를 알고 있다.

모든 인간을 통틀어서 치우의 끈덕진 시선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 바로 하야테였다.

소멸하길 바라며, 신살자의 탄생을 기원하는 신.

“네....”

“자, 한 잔 들게.”

그리드를 자리에 앉힌 하야테가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

상쾌한 향기가 그리드의 코끝을 스치며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차를 한 입 마시는 그리드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 하야테가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그대가 느낄 두려움을 이해하고 있네. 하지만 신이 된 걸 후회할 필요는 없다네. 그대도 알다시피 진정한 신이란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비롯하는 것. 그대가 바란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도, 될 수 없는 것도 아닐세. 자연히 신이된 것을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또한 아스가르드와 그대가 적대하게 된 것은 그대의 선택에 앞선 아스가르드의 판단. 신이 돼 더 큰 잠재력을 품게 된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일세.”

“....”

맞는 말이다.

그리드가 신이 되기도 전부터 아스가르드는 이미 인류를 적대했다. 그리드에게 아스가르드를 적대하게끔 강요했다.

그리드가 신이 됐다고 해서 아스가르드와 적대하게 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적대하게 될 운명이었던 셈이다.

사람들이 그리드를 신으로 추앙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다.

“게다가 아직 자네에겐 신살자가 될 자격이 남아있네.”

그리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역시.... 아직은 지위만 신이기 때문인 겁니까?”

“그래. 자네는 아직 신이라는 종(種)으로 진화하지 못한 상태이지. 사람들의 염원이 쌓이고 쌓여 완전한 신이 되기 전에 신살자가 된다면.... 그대는 신이라는 지위를 지닌 절대자로 진화하게 될 걸세. 아직은 치우와의 인연을 걱정할 단계가 아닌 게야.”

“그렇군요....”

치우의 쓸쓸한 눈빛을 떠올린 그리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드는 설령 그것이 치우를 죽이는 일이라고 해도 치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만큼 치우에게 입은 은혜가 컸으니까.

그리드의 마음을 헤아린 하야테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대는.... 정말로 곱군.”

“네??”

귀를 의심하는 그리드였다.

정조의 위기를 느끼며 뒤로 슬쩍 몸을 빼는 그에게 하야테가 덧붙였다

“마음 말일세.”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일 뿐입니다.”

마음이 곱다니.

인생의 절반 이상을 뒤틀려있던 그리드 입장에선 부끄러운 칭찬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지 못하는 그에게 하야테가 한 가지 말을 더 덧붙였다.

“언젠가 힘이 필요해지면 말하게. 내가 그대를 돕겠네.”

“....예?”

재차 귀를 의심한 그리드가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지혜의 탑의 1좌.

현존 유일의 절대자.

드래곤 슬레이어, 용살자(龍殺者) 하야테.

아득히 긴 세월동안 속세를 떠나있던 그가 나를 돕겠다고...?

“속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속세의 일에는 당연히 관여하지 않을 걸세.”

그리드가 놀라 떨어뜨린 찻잔과 찻물을 허공에 멈춰 세운 하야테가 그것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허공섭물의 경지였다.

“하지만 아스가르드는 속세가 아니지 않은가?”

“....!!”

그리드의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늘 온화한 표정을 유지했던 하야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 순간 거대한 압박을 느낀 까닭이다.

높디높다 못해 하늘을 가린 태산을 마주보고 선 기분이었다.

“탑이 긴 세월 동안 드래곤과 싸워온 이유는 속세를 지키기 위함이었네. 드래곤이 속세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라는 확신을 품고 그들을 경계하고, 때로는 비위를 맞춰가면서까지 인류를 지켜온 것일세. 한데 이번에 인류를 위협한 건 드래곤이 아닌 신이었지....”

그리드는 하야테로부터 뚜렷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분노였다.

“나는, 탑은 신들에게 실망했네. 그들을 좌시할 생각이 없어.”

“꿀꺽.”

그리드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탑의 결사들.

그들과 함께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헥세타이아를 구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극도로 흥분했다. 하지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스가르드는 ‘허락’ 없인 침범할 수 없는 영토.

지금 당장 힘이 생겼다고 해서 쳐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절대신 레베카와 무신 제라툴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 전혀 파악도 못한 상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하야테의 생각도 같았다.

“우선은 힘을 키우게. 당분간은 여태까지와 변함없는 삶을 영위하면서 때를 노리는 게 좋을 걸세.”

“....제가 더 빨리 강해지는 방법은 없을까요?”

그리드가 순수한 의문을 꺼냈다.

더 큰 전장의 무대가 다가오는만큼 어서 빨리 강해지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야테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늘 지금과 같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네.”

그리드가 걸어온 길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한 마디.

그 짧은 한 마디가 그리드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초조함을 버린 그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대 덕분에 미식의 주기를 잘 넘겼으니 내가 도리어 감사해야지. 다시 만나는 날을 기대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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