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4화
템빨국 백성들은 그리드가 신이 되는 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드를 비난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그리드를 향한 믿음은 레베카 여신에게 쏟았던 신앙보다 견고한 것이었다.
신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후로이의 선전(宣傳)을 아직 백퍼센트 신뢰하진 못했지만, 그들은 레베카 여신의 동상과 신전을 철거한 그리드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신화 속에만 존재했던 천사(사리엘)의 실체가 그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훨씬 더 긍정적이었다.
플레이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신화 등급 아이템과 클래스의 가능성을 엿보고 있었다. 그리드가 신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황하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시기와 질투도 없었다.
누군가가 최초의 신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면, 그 누군가는 반드시 그리드일 거라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래,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얼떨결에 ‘신의 부인’이라고 칭송 받게 된 아이린조차도 이 급변한 정세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변하고 있었군.’
쥬다르교의 사절단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교단의 자체적인 판단이 아닌 ‘신탁’을 위시해서 찾아온 그들은 그리드에게 커다란 경각심을 심어주었다.
‘신들이 주목하고 있었어.’
템빨신의 탄생을 놓고 신들은 의외로 별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리드가 신이 됐던 날 템빨국을 뒤덮었던 재앙 이후 신들이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히 신벌을 막은 거냐며 더 큰 재앙을 내리기는커녕 신들은 침묵했다. 큰 에피소드가 진행될 때면 종종 그리드에게 ‘말’을 전달했던 레베카 또한 잠잠했다.
특히 탐욕에 깃든 신들의 축복이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레이더스의 반응을 토대로 알 수 있었던 ‘인신’의 미약한 힘을, 어쩌면 신들은 묵과하기로 결정한 게 아닐지 그리드는 기대했었다.
하지만 쥬다르교 사절단의 방문은 그리드의 기대감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사절단은 뭐라는데?
눈과 손을 봉하는 이정의 수련 도구는 그리드에게 완전한 제약을 주지 못했다.
카오스 산맥의 5번째 능선.
두건으로 눈을 가린 그리드는 가만히 앉아 바느질 중이었고, 열 개의 갓 핸드와 염룡검이 비행하며 노에, 랜디, 템빨골, 엘핀스톤 등과 함께 몬스터를 사냥 중이었다.
400레벨 초중반대 몬스터들은 그리드가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충분히 사냥이 가능했다. 물론 그리드가 직접 사냥할 때와 비교하면 속도가 현저히 느렸지만 이정의 수련 도구 세트가 주는 경험치 버프 때문에 효율이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게다가 펫과 소환수의 레벨도 잘 올랐고 말이다.
-전하를 신으로 인정하되 기존처럼 레베카 여신을 섬기라 말했다고 합니다.
-합니다?
-아직 제가 직접 만나질 못했어요. 사절단이 논밭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농민들에게 붙잡히는 바람에 아직 성에 도착하지도 못했거든요. 조금 전에 쥬드 경이 마중하러 갔습니다.
-농민들에게 붙잡혀...?
템빨단의 간부인 토반이 불과 얼마 전까지 쥬다르교의 제일 성기사였다.
그리드는 쥬다르교의 전력을 나름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사절단에 포함될 정도의 고위 성기사라면 필시 굉장한 실력자였다. 쥬다르교 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세계관 최강자’급은 아니더라도 제국의 공작 다음을 논하기엔 손색이 없었다.
한데 농민들에게 붙잡혔다고??
당황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설명했다.
-쥬다르교의 성기사들이 강한 건 광역 버프 스킬이 충분히 중첩됐을 때의 이야긴데 사절단은 다섯 명밖에 안 됐어요. 충분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데다가 마침 레이단 출신의 농부들이 근무하는 시간에 찾아왔던지라....
-아....
그리드가 상황을 파악했다.
레이단 출신의 농부들.
그들은 피아로 밑에서 무려 10년 이상을 노동한 농부들이다. 온갖 혹독한 노동을 체험하며 자연스럽게 단련돼왔다.
농부들의 평균 레벨을 300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들의 레벨은 무려 400에 근접했고 농기구를 다루는 솜씨는 기사들의 검술과 비견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했다.
게다가 ‘평범한 백성’이라는 출신성분상 숫자도 많다. 그리드가 단언컨대 그들은 서대륙 전체에서 손꼽힐 정도의 무력집단이었다.
-쥬다르교 사절단 입장에선 운이 나빴군.
-그렇죠.... 사절단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잘 달래서 돌려보낼까요?
-음....
이정의 수련 도구 세트를 찬 상태로 어디까지 사냥이 가능할까.
그리드는 충분히 테스트해본 뒤 지혜의 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하야테에게 미식의 주기를 잘 마쳤다는 보고도 올릴 겸 3좌 라드볼프를 만나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전달할 계획이었다.
급할 건 없는 일이다. 지혜의 탑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일정을 바꿔가면서까지 쥬다르교의 사절단을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들과 직접 마주보고 앉아 대화해봤자 불쾌하기만 할 테니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핵세타이아.
그의 안부를 간접적으로나마 듣고 싶었다.
-아니, 지금 내가 가지.
귀환 주문서를 써서 프론티어에 복귀한 그리드가 워프 게이트를 이용했다.
라인하르트와 프론티어를 잇는 마도공학의 정수.
위대한 스틱세이의 작품이었다.
템빨국 전역에 설치하기 시작한 워프 게이트는 템빨국의 경제를 수십 배 성장시킬 전망이었고 템빨단원들의 활동 반경을 극적으로 확대시켰다.
***
“내가 쥬다르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라인하르트.
쥬다르교의 사절단은 어딘가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농부들에게 쥐어 터진 충격이 꽤나 큰 모양이었다.
“아.... 당연히 신께서 실망하시겠지요.”
잠시 멍하니 있던 사절단 대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썩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
“실망하면 어떻게 되는데?”
“쥬다르는 지혜와 건강을 관장하는 신. 쥬다르 신의 분노를 산다면 템빨국에 역병이 창궐할 것입니다.”
“내 동생이 성년데.”
“.....”
“소식 못 들었어? 얼마 전에 창궐했던 역병은 이미 내 동생이 잠재웠어.”
“....그, 성녀가 역병을 잠재운다고 해도 이미 한 번 병에 걸린 백성들은 총기를 상실하여 템빨국의 발전을 저해시킬 것입니다. 저 가여운 자가 산 증인일 테지요.”
사절단 대표가 힐끔, 시선으로 쥬드를 가리켰다.
쥬드에게 호송됐다더니, 그 짧은 사이에 쥬드가 백치라는 걸 파악한 눈치였다.
“저 친구는 원래 저런데.”
“.....”
“그리고 템빨국엔 대현자 스틱세이가 있다. 병에 걸려 총기를 잃었던 백성들은 이미 스틱세이가 전부 다시 교육시켜서 정상으로 돌려놨고.”
“.....”
사절단 대표가 입을 다물었다. 쥬다르 신의 무서움을 설파해봤자 무의미할 정도로 완벽한 방비를 갖춰놓은 템빨왕의 철두철미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얼핏 전능하다 느껴질 정도. 과연 괜히 신이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결국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쥬다르 신께서 말씀하시길.”
“?”
“만약 템빨신이 당신의 뜻을 거부한다면 축복을 거둘 거라 하셨습니다.”
결국 협박인가.
피식 웃은 그리드가 탐욕에 깃들어 있는 쥬다르 신의 축복을 점검했다.
소유자의 방어력 15퍼센트 상승.
항시 유지되는 패시브다.
방어력이 높은 그리드에겐 특히 더 큰 도움이 되는 엄청난 버프 효과다.
거기에 레베카의 축복은 생명력 회복 속도를 300퍼센트, 도미니언의 축복은 공격력을 15퍼센트 상승시켜주고 있다.
이 모든 버프를 잃었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드의 전투력은 지금과 비교해서 크게 줄어들 것이다.
“레베카 여신과 도미니언 신의 뜻도 같나?”
“삼신은 일심동체이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내가 신들의 축복을 얻은 건 그 옛날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를 징벌했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동에 따른 대가인 셈인데 그걸 빼앗아 가는 건 너무 치졸한 거 아닌가?”
“치졸하다니, 말씀을 삼가주십시오. 게다가 신을 위해 싸우는 것은 우리들 인간의 당연한 의무이건만 노동이라는 표현은 너무 저급한 듯합니다.”
“인간이 신을 위해서 싸우는 게 왜 의무지?”
“신들의 자애가 있기에 인간이 존재할 수 있으니 인간이 신께 보답하는 건 당연한 의무 아니겠습니까?”
사절단 대표의 사상이 흡사 광신도 같다고 비하하기엔 애매하다.
저자가 유난히 극성인 게 아니다. 아마 대부분의 인간이 저런 사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릇된 사상이다.
신이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니까.
야탄이 주기마다 세계를 파괴하는 건 레베카의 공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굳이 왜 자꾸 세계를 파괴하는 건진 아직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리드는 신들의 자애 덕분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실을 모르는 사람과 논쟁을 벌여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답답한 마음을 진정시킨 그리드가 본론을 꺼냈다.
“한 가지만 묻지. 내가 쥬다르 신의 뜻을 따른다면.... 헥세타이아 신의 처우는 개선되는 건가?”
순간.
“으윽....!”
사절단 대표가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경기를 일으켰다.
그리고 거대한 존재가 그리드의 눈앞에 강림했다.
새하얀 빛을 내뿜으며 서서히 떠오르는 사절단 대표.
그의 머리 위에 표기됐던 이름이 ‘쥬다르’로 바뀌었다.
-그리드. 인간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작은 신이여. 그대가 가진 모든 것을 아스가르드에 바친다고 해도 헥세타이아의 처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감옥에 갇힌 헥세타이아는 잊힌 끝에 소멸하리라.
헥세타이아는 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게 만든 장본인이다.
만약 헥세타이아가 그리드를 돕지 않았다면 진실의 전장에 있던 모든 인간들은 천사들의 손에 죽었다. 템빨신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신들의 치부는 영원히 가려졌을 것이다.
신들에게 있어서 헥세타이아는 배신자였고 신앙을 약화시킨 원흉이었다. 그를 용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스가르드의 뜻을 확인한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의 축복....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인간의 몸을 빌려 강림했던 쥬다르 신의 의지가 다시 천상으로 돌아갔다.
[쥬다르 신의 축복을 잃었습니다.]
[도미니언 신의 축복을 잃었습니다.]
“....”
여신의 축복은 왜 소멸하지 않는 거지?
의외의 결과에 놀랄 뿐, 그리드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신의 변덕에 일희일비할 생각이 없었다.
“브라함.”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리드가 브라함을 찾아갔다.
그리드처럼 신격을 쌓아가고 있는 존재.
어쩌면 머잖아 마법의 신이 될 그에게 그리드는 의지하고 있었다.
“슬슬 새로운 광물을 만듭시다.”
예전부터 계획했던 일이다.
파그마와 브라함이 서로 협력해서 새로운 광물을 창조했듯, 그리드 또한 브라함과 새로운 광물을 창조할 자격이 있었다.
“제가 탐욕과 디바인스톤을 하나의 광물로 제련해볼 테니까 메테오로 단련해주세요.”
“....양심 없나?”
마법단조.
광물에 마법이라는 속성을 입히는 가장 원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방법은 복잡하지 않았다.
광물을 망치가 아니라 마법으로 단련하면 된다.
다만 횟수가 문제였다.
“나보고 메테오를 1만 번 쓰라고?”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 다만 27년하고 145일이 걸릴 텐데 기다릴 수 있나?”
“.....”
쿨타임을 생각 못했다.
템빨로 메테오를 난사할 생각에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당황해서 입을 다문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물었다.
“탐욕과 디바인스톤을 하나로 융합시키는 건 가능한 일인가?”
“네.”
즉답하는 그리드의 표정은 확신에 차있었다.
3좌 라드볼프.
지혜로운 전사라고 칭송받았던 고대 거인족의 생존자.
마장기를 탄생시킨 그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탐욕과 디바인스톤의 융합도 꿈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