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3화
그리드가 어떤 손님과 함께 식당을 순회 중이라는 소식이 라인하르트 전체에 퍼졌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귀빈이기에 국왕 전하께서 친히 안내를 해주신단 말인가?
사람들은 손님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밝혀낼 도리가 없었다.
소위 말하는 윗분들도 대부분 손님의 정체를 모르는 눈치였다.
“뭐라고? 갔다고?”
손님의 방문 소식은 이단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단은 당연히 요리를 준비했다.
국왕 전하의 손님을 대접하는 건 궁전요리사-공식적인 직함은 아니지만 이단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의 의무였으니까.
한데.
“기껏 만찬을 준비해놨더니, 왜?”
손님이 떠나셨단다.
이단의 입장에선 황당한 소식이었다.
“하루 종일 식당만 찾아다녔다며? 템빨국 고유의 식문화를 체험하려고 찾아왔던 손님 아닌가?”
“정황상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왜 내 요리는 안 먹어보고 떠났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셨던 게 아닐지.”
이단의 주방은 사람들 사이에서 ‘훈련소’로 통한다. 병사나 기사들이 이단의 주방에 방문하는 이유는 ‘독 내성’을 올리라는 상부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단은 현실을 몰랐다.
한땐 예술가적 기질이 강해 대중의 입맛을 외면했지만 요즘은 세태와 타협하지 않았나.
이제 소금이라는 마법의 가루를 적극 사용하기 시작한 이단은 자신의 요리가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흠.... 아쉽군.”
손님에게 템빨국의 요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려줄 기회였건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이단이 슬슬 눈치를 보면서 물러나는 병사를 붙잡아 세웠다.
“여하튼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보답이랄 것도 없지만 차려놓은 음식이 많으니 실컷 먹고 가.”
“네? 저 오늘은 훈련 없는 날인데.... 경계근무 서야 됩니다....”
“훈련이랑 무슨 상관이야? 마침 점심시간인데 먹고 가라고.”
“근무 이탈하게 되면 징계를....”
“허허, 이 친구 보게. 내 요리가 아무리 맛있기로서니 설마 밥 먹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를까? 정 걱정 되면 내가 도중에 시간을 알려줄 테니 걱정 말고 식사하게.”
“....”
이단의 주방은 성내의 다른 어떤 주방보다 커다란 규모를 자랑한다. 독 내성 단련용 훈련소로 쓰이다보니 규모가 큰 편이 효율적인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단의 착각에 불을 지핀 듯했다.
어쩌면 이단은 자신의 요리가 인정받아서 주방을 크게 배정 받은 거라고 믿는 걸 수도....
생각하니 황당해서 혀를 내두른 병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배를 부여잡았다.
“악, 아악, 갑자기 배가.... 으으... 오늘 점심은 거르고 화장실에 진을 쳐야겠습니다....”
“갑자기?”
이단이 뭐라고 의심해보기도 전에 병사는 떠나버렸다.
홀로 덩그러니 남아 식탁 가득 차려진 만찬을 마주하게 된 이단은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근처 산에 난민들이 들어왔다고 했지....’
메디아, 벨토, 가우스, 로테몬....
근 10년간 멸망한 나라가 무려 다섯 개다.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과 대악마의 침공은 무수히 많은 난민을 발생시켰다.
대부분의 국가는 재정과 치안 등의 이유로 난민의 유입을 막고 있었지만 템빨국은 도리어 환영했다.
난민에 섞여 들어오는 적의 끄나풀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며, 재정이야 템빨단의 레이드 팀이 계속해서 불리고 있었다. 신생 국가인 템빨국은 일단 인구를 늘리는 게 가장 중요했다.
***
“드디어 도착했군....”
감시의 시선을 피하고자 몇 개의 강과 산을 넘었던가.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금지(禁地)를 돌파하기도 했다.
난민으로 위장해 국경을 넘고 템빨국에 잠입한 쥬다르교 성기사들은 오늘, 드디어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야메 경의 공일세.”
성기사들이 일제히 야메를 칭찬했다.
야메.
사교에 빠져 신을 배신한 변절자 토반의 뒤를 이어 쥬다르교의 제일 성기사로 등극한 플레이어다.
성기사 랭킹 5위인 그는 작금의 상황이 영 꺼림칙했다.
‘아무리 봐도 미친 짓 같은데....’
템빨신교가 탄생하고 템빨국에서 레베카 여신의 동상이 철거된 날.
쥬다르교에는 신탁이 내려왔다.
민간을 현혹해 신의 지위를 얻자마자 여신을 배반한 그리드를 엄중히 문책하라는 내용의 신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리드를 해치라는 명령은 없었다.
아주 오래 전 그리드에게 축복을 내린 기억 때문인지, 그동안 그리드가 쌓아온 공적 때문인지 쥬다르 신은 아직 그리드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그리드를 새로운 신으로 인정하되 아스가르드에 복종하게끔 만드는 게 쥬다르 신의 뜻 같았다.
‘하지만 그리드가 말을 듣겠냐고....’
템빨국에 템빨신의 신전을 세우는 것을 허가하나 템빨신의 신전 옆엔 삼신(레베카, 쥬다르, 도미니언)의 신전을 나란히 세워야한다.
템빨신의 동상 옆엔 템빨신의 동상보다 2배 이상 큰 삼신의 동상이 세워져야하며 이때 템빨신의 동상은 레베카 여신의 동상에 무릎 꿇은 형태여야 한다.
...신탁에 명시된 쥬다르 신의 뜻을 재차 확인한 야메가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한 종교의 제일 성기사인 그는 Satisfy에서의 신(神)이 어떤 개념인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아직은 미약할지언정 사람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신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드가 쥬다르 신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존의 신들에게 무작정 굴종하는 것은 사람들의 염원을 배반하는 일.
지금도 신도수를 늘리기 힘든 실정인 템빨신교의 앞길이 막혀버린다.
뻔히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그리드가 과연 쥬다르 신의 뜻을 받아들일까?
‘무조건 거부하겠지.’
애초에 쥬다르교의 사절단이라고 당당하게 입국하려던 걸 거부당해서 난민으로까지 위장한 상태다.
한데 성기사들은 그리드만 만나면 만사형통일 거라고 생각하는 실정이었으니 속이 답답했다.
연신 한숨을 야메의 어깨를 부단장이 두드려주었다.
“걱정 말게. 레이단의 어리석은 영주는 템빨왕에게 과잉충성을 바치느라 우리 사절단의 입국을 불허했으나 템빨왕 본인은 올바르고 현명했던 인물일세. 지금은 신이 됐다는 사실에 심취해 눈앞이 어두워져 죄를 범하고 있네만 우리를 만나 쥬다르 신의 뜻을 접하게 된다면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올바른 선택을 내릴 걸세.”
“.....”
그럼 좋겠다만.... 에라 모르겠다.
그리드에게 불호령을 듣게 될지언정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일단은 신탁을 수행하는 게 중요하다.
교황 데미안조차도 신탁을 거부했다가 목숨을 잃고 지위를 잃지 않았던가.
찝찝한 마음을 애써 다스린 야메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꼴들이 말이 아니구려. 나라를 잃고 떠돌다가 예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식사라도 챙겨 드시오.”
‘이단’이라는 이름의 NPC가 수풀을 헤치고 다가왔다.
인기척부터 평범하다 싶더니 별 특색 없는 NPC였다.
그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낸 건 도시락이었다.
“요리사요. 경계할 필요 없소.”
‘경계 안 했는데.’
쥬다르교의 제일 성기사는 쥬다르교의 최강자를 뜻하는 게 아니다.
레베카교에 템플러가 있듯 쥬다르교에도 여러 하부 조직이 있고 숨겨진 강자들이 있다.
지금 야메와 동행하고 있는 성기사들이 바로 숨겨진 강자에 속했다.
일반적인 칭호, 스킬, 마법, 아이템 강화나 연금술 등의 힘으로는 관여할 수 없는 세부 능력치들, 예를 들면 ‘스킬 대미지 내성과 증폭’, ‘무기 대미지 내성과 증폭’, ‘마나 혹은 정령 교감 능력’ 등을 상승시켜주는 광역 버프를 보유한 강자들.
서로 버프를 중첩시켰을 때 이들의 강함은 플레이어의 영역으론 도달하기 힘든 경지가 된다. 특정 조건을 만족시켜야 발동하는 버프까지 발동하게 되면 ‘마왕 토벌전의 그리드’, 혹은 ‘마왕 토벌전의 데미안’을 떠올리게 만들곤 한다.
세계관 최강급의 강자라는 뜻이다.
물론 ‘그리드 보유국’이자 ‘피아로 보유국’이고 ‘메르세데스 보유국’이며 ‘브라함 보유국’인.... 거기다가 란스티어 페이커와 궁성 지슈카 보유국이기도 한 템빨국 한복판에선 제아무리 이들이라도 기를 펼 수 없겠지만 어쨌든....
“하하, 경계하지 않습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귀인을 만나 기분이 좋네요. 템빨국은 풍요롭다 하더니 그 풍요가 백성들을 자애롭게 만드나보군요. 당신의 자애가 신의 은총을 부르길 기도합니다.”
이단이 산 중턱에 도달했을 때부터 그의 기척을 읽고 있던 야메의 일행들은 이단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쥬다르교의 정예 성기사쯤 되면 상대방의 적의쯤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을 섬기는 분들이신가 보군. 난 동방 출신이라 서방의 신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템빨신도 한 번 믿어보던가 하시오. 여러 신을 섬기고 여러 신께 기도를 올리면 더욱 더 축복 받지 않겠소이까. 하하, 그럼 이만.”
여러 신을 섬기는 건 쥬다르교의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쥬다르교의 탄생 배경 자체가 도미니언교와 함께 레베카교를 보좌하기 위한 것.
쥬다르교는 쥬다르 신뿐만 아니라 레베카 여신과 도미니언 신을 함께 섬기는 종교이니만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그래서 이번 사태에도 유연하게 대처하려는 것이다.
“음.... 그런데....”
이단이 떠난 후.
도시락을 먹기 위해 자리에 둘러앉던 성기사들이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우리는 난민으로 위장해서 국경을 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쭉 감시의 시선을 피해 오지를 골라 다녔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라야 정상인 것이다.
한데 저런 평범한 사람이 어찌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알고 도시락을 갖다 줬단 말인가?
“설마 템빨국에 발각된 건가?”
“그랬으면 지금쯤 우리는 템빨국의 군대를 만났겠죠. 순전히 우연 같습니다.”
“하긴.... 어서 식사부터 하고 템빨왕을 만나러 가세나.”
잠시 후.
독에 중독된 성기사들은 독을 정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소름 돋는 일이었다.
“....발각됐던 거군.”
“저희는 처음부터 템빨국의 손아귀 안에 있던 겁니다.”
“민간인을 시켜서 독극물을 보내다니.... 사악한지고....”
“어, 어쩌죠? 이미 우리는 감시당하고 있을 텐데 라인하르트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까요?”
“앞서 말했듯이 템빨왕 본인은 올바르고 현명했던 자일세. 우리를 감시하다가 독극물을 보내 경고한 자도 템빨왕이 아닌 그의 부하들이겠지.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가 답일세.”
방침을 정한 성기사들이 후줄근한 옷을 벗고 예복을 갖춰 입었다.
화려하기보다 실용적인 쥬다르교의 예복은 쥬다르교 교인들이 얼마나 활동적인지 알려준다.
일명 전투 사제.
레베카교 교인들과 달리 힐을 못 쓰는 쥬다르교와 도미니언교의 성기사와 사제들은 정말로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한다.
“만약. 정말로 만에 하나 라인하르트가 우리의 출입을 막는다면 쥬다르 신의 이름으로 철퇴를 휘두르는 걸 허용하겠네.”
“예!”
힘차게 대답한 성기사들이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보이는 라인하르트 성문을 향해 당당히 이동했다.
“우리는 쥬다르교의 사절단이오!”
“위대하신 쥬다르신의 뜻에 따라 템빨신에게 기회를 드리나니! 템빨신은 레베카 여신과 쥬다르신께 충성을 맹세하고 아스가르드에 복종하여 자신이 사도가 아님을 증명해야할 것이오!!”
신앙이 깊은 성기사일수록 포교활동에 익숙한 법이다.
쥬다르교 성기사들은 성문을 향하는 길에 펼쳐진 광활한 논밭에 수많은 농부들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농부들이 들을 수 있게끔 템빨신 위에 쥬다르신과 아스가르드가 있음을 소리쳐 외쳤다. 쥬다르교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나마 전파하려는 의도였다.
잠시 후.
“....”
“....”
야메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다른 성기사들과 함께 논밭에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전설의 농부 피아로가 나타난 것도 아니다.
다만.... 수많은 농부들이 있었을 뿐이다.
“노, 농민들의 실력이 어찌 이리도 고강하단 말인가...!”
“이 나라의 농민들이 난을 일으켰다가는 하루사이에 왕이 바뀌겠구나....!”
“뭐라는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만 지껄이는 불청객들을 농부들이 아니 꼽게 노려보는 그때였다.
“이자들인가?”
금발의 귀공자가 나타났다.
고고한 걸음걸이와 허리춤에 짊어진 명검을 보면 이름난 가문의 후계자쯤 되는 인물 같았다.
‘템빨국의 고위 귀족인가?’
성기사들이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템빨국이 자신들을 얼마나 경계하면 초반부터 고위 귀족이 행차했나 싶었다.
“어떻게 할까요? 블란드 님.”
“음.... 일단 난 감자를 캐야하는데.... 그냥 치안대에 인계하시오.”
“예!”
“....”
쟤도 농부였나?
템빨국은 풍족하다더니 농부들도 귀족처럼 차려입을 정도로 돈이 많은가 보다.
성기사들이 애써 생각할 때였다.
“이자들. 인가.”
거대한 사내가 나타났다.
상어의 모습을 형상화한 푸른 대검과 흑금색의 대검을 교차해서 등에 짊어진 그는 얼굴에만 수십 개의 흉터가 있었다. 엄청난 연륜이 느껴졌다. 이름난 대장군 같았다.
‘이제부터 진짜군....’
‘대장군쯤 되는 인물이 직접 행차할 줄이야....’
‘도대체 우리를 얼마나 경계하는 거지?’
“어떻게 할까요? 치안대장님.”
“.....”
긴장해서 마른 침을 삼키던 성기사들이 더 이상 생각하는 걸 관뒀다.
야메는 진즉부터 해탈한 상태였다.
사실 그는 신탁을 받았을 때부터 작금의 사태를 어렴풋이 예견했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템빨신교로 개종하는 게 맞겠다.’
대세를 파악하고 확신하는 야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