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2화
“이곳이 마지막이라고?”
“....네.”
행복하다는 감상은 2번으로 끝이었다.
41번째로 들른 식당부터 삐걱거린다 싶더니, 레이더스는 종종 말없이 나이프를 내려놓곤 했다.
앞선 40곳의 식당과 비교해서 나머지 66곳의 식당이 크게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드가 느끼기엔 모든 식당이 완벽하게 맛있는 요리를 내놓았다.
다만 레이더스의 기준이 그리드보다 높았을 뿐이다.
수천, 수만 년을 존재하며 미식을 추구해온 그의 입맛이 그리드의 입맛보다 까다로운 건 당연했다.
‘레이더스의 입맛을 20번 연속으로 만족시킨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제야 절실히 알겠군.’
행복하다는 감상을 들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깨닫고 아쉬움을 달래는 그리드에게 레이더스가 말했다.
“덕분에 즐거웠다. 나흘. 안 그래도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유난히 더 짧게 느껴지는군.”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리드의 입장에선 지독히도 길었던 나흘이다.
종잡을 수 없는 드래곤과 함께 다닌다는 건 정신적으로 너무 큰 압박이었다. 나흘 내내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퀘스트가 끝난단 사실에 해방감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환하게 미소 짓던 그리드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흠.... 이대로 떠나기엔 아쉬운데.”
“....”
“내가 알기론 에트날 왕국 위에 그대가 나라를 세웠다지?”
“....네.”
“떠나기 전에 그대의 나라에 들러보고 싶네만.”
“왜 굳이....?”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미치광이 드래곤을 템빨국에 끌어들이고 싶을 리 없었다. 이대로 깔끔하게 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게 그리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가 없었다.
“신생 국가 아닌가. 새로운 문화가 싹텄을 테고, 여태껏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음식도 여럿 탄생했겠지. 새로운 식문화를 접해보고 싶은 것일세.”
레이더스는 백 년에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난다.
이대로 레어로 돌아가 잠들면 앞으로 백 년을 굶어야 한다는 뜻이다.
잠들기 전에 밥 한 끼 더 먹겠다는데 그리드가 무슨 권리로 막는단 말인가.
‘함부로 막으려고 했다간 화를 살 수도 있고....’
외통수다.
드래곤이라는 존재 자체가 너무 사기다. 항거 자체가 불가능하다.
속으로 한숨 쉰 그리드가 정중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안내하죠. 다만.... 딱히 음식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레이더스는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화내며 깽판을 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레이더스는 요리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조용히 식당을 떠났다. 눈치 없이 왜 음식을 남겼냐고 지껄였던 식당 주인은 그대로 머리통이 박살나 죽긴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식당 주인들에게 미리 주의를 주면 되겠지. 게다가 레이더스는 내가 네펠리나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눈치고.’
“네바르탄. 놈은 자신의 광증을 치료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협력할지도 몰라. 그 누군가가 자신의 여식을 보호해준 이라면 협력할 가능성이 더욱 더 높겠지.”
레이더스가 했던 말을 떠올린 그리드는 레이더스에 대한 경계심을 줄였다. 그가 템빨국에서 난동을 피울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했다.
스틱세이가 불쾌해할 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건 드래곤의 행보를 막을 정도의 명분이 되지 못한다.
하이엘프라는 대단한 혈통도, 대현자라는 훌륭한 직함도 드래곤을 상대로 내세울만한 명함은 아니었기에.
“....가시죠.”
결국 그리드는 레이더스를 데리고 템빨국으로 귀환했다.
걱정했던 트러블은 없었다.
“이건.... 트라우카 놈의 레어를 표현한 음식인가? 나를 도발하는 건가?”
극검이 추천해준 한식집에서 나온 순두부찌개를 보고 잠시 살기를 드러내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히 지나갔다.
레이더스는 템빨국산 쌀과 밀의 맛에 감탄하기 바빴다. 레인보우 포테이토도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다.
피아로를 뿌듯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이날.
레이더스는 정말로 식사만 마치고 템빨국을 떠났다.
네펠리나와 스틱세이는 물론이고 메르세데스와 피아로에게도 아무런 관심을 표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템빨국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
‘여섯 배.... 아니, 족히 여덟 배는 약해졌군.’
데미안.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모든 걸 잃었다.
레베카가 내린 신탁을 어긴 죄로 여신의 대행자라는 직업을 박탈당했고, 신앙을 바꾸며 교황의 지위를 내려놔 최초의 성검과 세컨드 클래스를 상실했다.
대신 템빨신교 교황라는 직함을 새로 얻었지만,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템빨신교의 레벨은 고작 1.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종교엔 신도도, 신앙도, 권한도 부족했다.
이런 작은 종교를 이끄는 교황에게 특별한 권능이 생길 리 만무한 것이다.
템빨신교 교황에겐 전용 스킬이 전무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평범한 교인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으음....”
라인하르트 근교의 사냥터.
예전에 그리드에게 받았던 무기를 휘둘러서 몬스터를 사냥해본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낮아진 능력치와 사라진 스킬들, 그리고 성검....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공격력은 전보다 3배 이상 낮아졌다. 방어력은 훨씬 더 심각하게 떨어졌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8배는 약해진 게 분명했다.
이대로는 동레벨의 평범한 랭커들과 싸워도 질 것이다.
‘그나마 패시브 스킬이 엄청 좋긴 한데.’
데미안이 스킬창을 열었다.
<템빨신의 가호>Lv.1
패시브
아이템의 착용 조건을 5퍼센트 완화시킵니다.
템빨신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의 착용 조건을 10퍼센트 완화시킵니다.
템빨신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을 착용 시, 아이템의 성능을 5퍼센트 향상시킵니다. 이 효과는 아이템에 귀속된 스킬에도 적용됩니다.
무려 공용 스킬이다.
템빨신교 성기사, 혹은 사제로 전직하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기본 스킬.
한데 성능이 엄청나다.
400레벨에나 착용할 수 있을 아이템을 380레벨, 혹은 360레벨부터 착용할 수 있게 해준다.
하물며 그 아이템이 그리드가 만든 것이라면 성능까지 상승시켜준다.
비록 5퍼센트에 불과했지만, 그리드가 만든 아이템의 능력치가 일반적인 아이템의 능력치를 월등히 능가한다는 점을 고려해봤을 때 5퍼센트로도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1레벨 스킬인데 이 정도....’
데미안은 장담한다.
조만간 거래소가 들썩일 것이다.
여태껏 사용 조건이 너무 높아 외면당했던 아이템들의 시세가 폭등하고 품귀 현상을 빚을 테지.
하지만 이 패시브 스킬 하나만 믿고 템빨신교로 전향할 사람이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닐 것 같았다.
‘이 외에는 딱히 큰 메리트가 없으니까.’
저벅.
데미안이 보폭을 밟았다.
유려한 동작이 마치 춤을 추는 듯하다.
“살(殺).”
쩌어어어엉!!
직선으로 뻗어나간 검광이 몬스터의 심장을 꿰뚫고, 잿빛으로 산화시켰다.
폭발적인 위력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표정은 어두웠다.
‘공격력 계수가 높긴 하지만 모션이 너무 커.’
<템빨신교 검무>Lv.1
템빨신 그리드의 위대함을 기리는 검무입니다.
물리 공격력이 20퍼센트, 마법 공격력이 10퍼센트, 치명타 확률과 치명타 피해량이 각 3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도검류 무기를 장비했을 경우에만 온전히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지팡이, 오브류 무기를 장비했을 경우 마법 공격력 상승효과만 적용됩니다.
★검무의 레벨이 오를 때마다 융합 검무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템빨신을 향한 신앙이 쌓일 때마다 검무에 마법 효과가 귀속됩니다.
<살(殺)>Lv.1
템빨신의 분노를 표현하는 검무를 춰 신벌을 내립니다.
단일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혹은 마법 공격력의 1,30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힙니다.
*마법 효과 미부여
스킬 자원 소모:신성력 1,2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분
고작 1레벨에 불과하지만 공격력 계수가 매우 높다.
융합 검무 시스템과 마법 효과 부여 효과로 성장 가능성도 높다.
10분이라는 긴 쿨타임에 아무런 불만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현재 활성화 돼 있는 다른 검무들, <연>, <파>, <제>, <회> 그리고 <초>도 살처럼 뛰어난 위력을 자랑했다.
아직 비활성화 상태인 <화>, <극>, <락>, <천> 등의 다른 검무들도 훌륭한 성능을 자랑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반드시 4회 이상의 보폭을 밟아야한다는 점.
스킬이 발동하기까지 딜레이가 너무 길다.
아무래도 ‘신을 재현한다.’는 검무의 기본 설정이 발생시킨 페널티 같았다. 신을 재현하는 행위가 쉬운 건 말이 되니까.
‘그러고 보니 초창기 그리드 님께서도 검무의 딜레이 때문에 애를 먹으셨지.’
검무의 보폭을 밟다가 경로를 읽혀서 쉽게 회피 당한다거나 동작이 차단당해 스킬의 발동이 멈춰버리는 등, 초창기의 그리드는 검무를 추다가 말고 욕설을 지껄인 일이 많았다.
한데 템빨신교의 검무는 초창기 그리드의 검무(파그마의 검무)보다 더 많은 보폭을 밟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엄청난 단점이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를 사냥할 때야 큰 무리가 없겠지만 PvP에선 하등 쓸모없는 스킬이 될 확률이 높았다.
‘검무의 레벨이 오를수록 보폭이 줄어들거나 나중에 부여되는 마법이 단점을 완화시켜준다거나 해야 그나마 실전성이 생길 것 같은데.’
물론 데미안쯤 되면 검무의 보폭을 회피 동작으로 응용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데미안 정도의 컨트롤 실력을 갖춘 사람은 20억 플레이어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다른 대부분의 교인들은 검무의 단점에 발목이 붙잡힐 것이며, 이는 템빨신교의 악명을 높여 종교의 확장에 걸림돌이 될 것이었다.
데미안이 근심하고 있을 때였다.
“파살.”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사냥 중이던 이사벨이 검무를 펼쳐서 몬스터 떼를 도륙했다.
이런 표현이 가당키나 할까 싶지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긴 팔과 다리를 시원시원하게 뻗어서 검무를 연계하는 이사벨의 동작엔 경건함과 화려함이 공존했다.
애초에 스킬 이펙트가 워낙 화려했다.
열 갈래로 뻗어나가는 검기의 파도....
최소 유니크 등급 스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휘황찬란한 이펙트였다.
“헐.”
벌써 융합 검무를 배우다니, 과연 이사벨 쨩이다.
레베카의 딸 출신인 그녀의 성장 속도는 플레이어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 기본 능력치가 워낙 뛰어난데다가 각종 보정 효과까지 누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도 빨리...!’
데미안이 사냥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일반인은 꿈에도 못 꿀 값비싼 버프 물약은 이미 진즉부터 복용 중이었다. 템빨신교 교황가 된 시점부터 그는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생산되는 버프 물약을 집중적으로 지원 받고 있었다.
그는 일단 빨리 검무의 레벨을 올려서 융합 검무를 배우고 싶었다.
여태껏 숱하게 목격하고 체험해온 융합 검무의 위력을 상기한 그는 더 이상 검무의 단점에 집착하지 않았다.
깨달은 것이다.
템빨신교의 검무가 그리드의 검무를 모태로 하는 이상, 그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템빨신교에 입교하려는 사람은 데미안이 걱정할 필요 없이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