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1화
“맛있군.”
그리드의 유능함은 위대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다.
그리드는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참 많다.
하지만 이번 일은 예외에 해당했다.
미식룡 레이더스의 까다로운 입맛을 충족시킬 정도로 뛰어난 맛집을 고작 보름 만에 106곳이나 수배한 건, 순전히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었다.
‘역시 인맥이 최고야.’
칸을 만났을 때부터 깨달았던 불변의 진리다.
늘 곁에서 도와주는 동료들에게 새삼 큰 감사를 느끼며, 그리드는 왼쪽 팔을 들어 세웠다.
뻐엉━!
커다란 파열음이 진동한다.
건틀렛에 꽂힌 괴조의 부리를 뽑아낸 그리드가 괴조를 그대로 땅에 처박았다.
정수리부터 추락해 스턴에 빠진 괴조의 두 눈이 빙글빙글 돈다.
천지 뒤집기의 발현이었다.
400레벨이 넘는 정예 몬스터도 삼제 이정이 연마했던 금나수엔 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방비해져 방어력이 하락한 놈의 목을 열망의 무아검이 깔끔하게 잘라버렸다.
‘석상 레벨이 오르면 장갑부터 새로 만들어야겠어.’
알렉스의 신속 장갑은 뛰어난 옵션을 지녔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어력이 너무 낮다.
‘그건 그렇고 뭔 식당 앞에 자꾸 몬스터가....’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산의 전경을 살폈다.
유실라트 산.
규모 면에선 특별할 게 없는, 단지 제법 큰 산이다.
하지만 산을 이루는 건 나무가 아닌 고약한 암벽들.
산세가 무척 험했다. 부유 계열 마법이나 스킬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이 산은 인적이 드물었다. 득실거리는 몬스터 떼가 증거다. 카오스 산맥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굳이 이런 산에다가 식당을 차렸단 말이지?’
현역 시절에 유명했던 검호, 혹은 대마법사라도 됐었나?
직접 음식을 만들고, 서빙하기 바쁜 산장 주인을 경악스레 바라보는 그리드와 달리 레이더스는 태연하게 식사를 즐길 뿐이다. 드래곤의 입장에선 인간이 아무리 대단해봤자 결국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이 식감은.... 오우거의 가죽인가?”
“허, 어찌 아셨소? 오우거 가죽을 드셔보기라도 한 거요?”
“가끔 별미로 즐겼다. 이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즐겁거든.”
“오우거 가죽은 너무 질겨서 인간의 저작력으로는 씹을 수가 없는데.... 이 가죽도 비법 소스에 5년을 절여놓아서 그나마 부드러워진 건데....”
“나도 당연히 절여놓았다가 먹었지 않았겠나.”
사실이다.
하지만 가죽을 연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을 풍부하게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레이더스는 오우거의 가죽쯤 100겹으로 겹쳐도 씹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산장 주인은 속내를 모른다. 멋대로 해석하고, 믿었다. 왕년에 한가락 했을 그조차도 레이더스의 정체가 드래곤일 거라곤 상상 못했다.
당연하다.
현재 레이더스는 자신의 마력을 완벽하게 갈무리하고 있었다. 마력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갔다간 산의 몬스터들은 물론이고 식당 주인도 겁에 질려 오줌을 지릴 테니 편안한 식사를 위해서라도 마력을 숨겨야했다.
“허....! 단순한 미식가가 아니라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신 분이셨구려!”
산장 주인의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레이더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자신이 만든 요리의 진가를 알아주는 손님을 만난 것에 순수하게 감탄하며 기뻐했다.
‘거 참.... 그건 그렇고 페이커는 이런 곳에 식당이 있는 걸 용케 알아냈군.’
이클립스를 손에 넣으면서 그동안 이클립스가 쌓아온 정보력까지 온전히 흡수했다더니, 그 덕분인 듯하다.
페이커가 란스티어가 된 무렵부터 쭉 들떠있는 라우엘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리드가 20여 마리의 몬스터를 추가로 사냥했을 무렵이었다.
그리드가 뭔 짓을 하든 관심 없이 산의 경치를 감상하며 만찬을 즐긴 레이더스가 드디어 식기를 내려놓고 평상에서 일어났다.
“훌륭한 식사였다. 몬스터를 재료로 만든 요리들은 대개 잡내를 잡지 못하게 마련인데 인상 찌푸리는 일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음식에 조예가 깊은 손님을 만나 오래간만에 기쁜 마음으로 요리했소. 이런 괴팍한 곳에 차려놓은 산장을 어찌 알고 찾아와 요리를 내놓으라기에 처음엔 수상쩍게 보았소만, 이제 보니 대륙 최고의 식도락가쯤 되시겠구려.”
‘괴팍한 장소라는 걸 알고는 있었군.’
왜 굳이 이런 곳에서 장사를 하는 걸까.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라지만 쉽게 납득이 안 된다.
덥썩, 마침 날아온 돌멩이를 낚아챈 그리드가 그걸 힘껏 던지자 암벽 아래서 비명이 울렸다.
그리드에게 새총을 쐈던 대왕 고블린의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평범한 돌멩이도 그리드가 쥐는 순간 흉기가 되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무기’라는 판정을 받는 시점부턴 <그리드식 전투술>의 영향을 받게 되니까.
“호위의 실력도 훌륭하고....”
산장 주인은 은거한지 꽤 오래 된 눈치였다.
신이 되기 전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레이더스의 몸종쯤으로 오해하는 걸 보니.
쯧, 불쾌해서 혀를 찬 그리드가 냉큼 뛰어내려서 고블린의 등을 짓밟았다. 이미 그의 손에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검이 쥐어져 있었다.
푸욱!
그리드가 발악하는 고블린의 척수에 검을 꽂아 넣는 순간이었다.
“크아아악!!”
위에서 비명이 터졌다.
깜짝 놀란 그리드가 암벽 위를 올려 보자 레이더스의 손에 심장이 꿰뚫린 산장 주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엥?”
갑자기 왜 살인이야?
레이더스의 뜬금없는 기행에 당황하던 그리드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자신을 위해 천년 동안 요리해온 일족을 단지 질린다는 이유로 멸망시키려고 했던 레이더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 저놈은 애초에 저런 놈이다.
별 이유 없이 다짜고짜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미치광이.
놈이 한 번 보여줬던 호의에 속아 놈의 본질을 잊어선 안 된다.
‘어?’
상기하던 그리드가 산장 주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단도를 뒤늦게 발견했다. 독을 잔뜩 먹어 날이 검게 물든 단도였다.
“끄륵.... 빌어먹을, 네놈, 실력을.... 숨기고....”
피거품을 토하며 간신히 말을 잇던 산장 주인이 이내 부르르 떨며 명줄을 달리했다. 잿빛으로 산화한 놈이 남긴 것은 하나의 수첩이었다.
“가지.”
레이더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네가 잠시 한 눈을 파는 동안 산장 주인이 나를 기습했다. 그래서 당연히 죽였다. 라는 식의 구질구질한 설명 따위 하지 않았다. 길가의 개미를 밟아 죽인 인간이 이유를 해명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이건....’
앞장서 걷는 레이더스의 뒷모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그리드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수첩을 주웠다.
도대체 관리를 어떻게 한 건지, 지독한 악취가 풍기는 수첩이었다.
[<인육귀의 살인 수첩>을 획득하였습니다.]
<인육귀의 살인 수첩>
등급:레전드리
최악을 넘어 전설이 되어가는 살인마 ‘인육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저질러온 살인 행각을 고스란히 기록해놓은 일지입니다. 인육을 맛있게 조리하는 방법도 함께 적혀있습니다.
글러시안 왕가에 이 수첩을 증거물로 제출하면 왕가의 보물을 현상금으로 얻을 것입니다.
무게:5
[인간의 가죽으로 만든 수첩입니다. 지독한 원념과 병균이 병증을 일으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전설이 되어가는 살인마....였다고?’
아그너스라는 존재가 증명하듯, 전설은 영웅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다.
악업을 쌓아 전설이 되는 사도(邪道)가 존재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만약 오늘.
인육귀가 레이더스에게 칼날을 겨누지 않았고, 그러므로 살아남았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이번 산장이 40번째로 들른 식당이었다.
그리고 레이더스는 여태껏 먹은 모든 요리를 흡족해했다.
또 다시 행복하다는 감상이 나올 차례인 것이다.
실제로 레이더스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다.
다음 목적지까지 마법으로 이동하지 않고 두 발로 직접 땅을 밟아 걷는 것도 여운을 즐기기 위한 행동 같았다.
그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 일말의 희망이 깃들었다.
“혹시 저자의 정체를 알고 계셨던 겁니까?”
“정체라. 인육을 먹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었네. 놈의 요리에 잡냄새가 없던 이유는 인간의 골수와 지방을 끓여 만든 육수 덕분이었으니까.”
“....!”
전설의 살인마라는 예정된 재앙을 없애버린 레이더스의 모습은 그리드에게 기대감을 심어주었었다.
레이더스는 처음부터 인육귀를 죽일 계획이 아니었을까? 인간들이 만든 요리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김에 인간 사회에 공헌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건 아닐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단순한 우연이었을 뿐이다.
인육귀가 레이더스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면, 인육귀는 죽지 않았다.
인간을 재료로 쓴 요리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맛있게 먹은 레이더스가 인간을 위해 싸워줬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다.
‘하긴.... 고작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는 정도로 드래곤을 감화시키는 게 가능했다면 대악마나 신들이 진즉에 드래곤을 회유했겠지.’
드래곤은 오로지 혼자서 존재하는 생물이다....
하야테의 말을 떠올린 그리드가 잠시나마 품었던 미련을 깔끔하게 접었다.
레이더스와 같은 편이 된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재차 상기하며, 레이더스의 미식 주기가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다. 드래곤과의 동행은 영 불편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산의 중턱까지 내려오고 나서야 레이더스가 입을 열었다.
“이틀 내내 맛있는 요리들을 먹었더니 행복하군. 내 입맛을 만족키기 위해 평생 동안 궁리하고 연구했을 그대의 노력이 갸륵해 한 가지 정보를 주겠네.”
평생?
‘보름인데.’
심지어 맛집을 찾기 위한 노력은 그리드가 아니라 그리드의 동료들이 다했다.
하지만 묻어두는 편이 좋을 진실이다.
[미식룡 레이더스에게 행복하다는 감상을 들었습니다!]
[특수 조건을 달성하여 특수 보상이 발생합니다!]
“그대는 드래곤을 같은 편으로 삼고 싶은 거겠지?”
“....!”
천금보다 귀한 정보가 레이더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려 한다.
잡념을 털어내고 집중력을 끌어올린 그리드가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드래곤, 특히 태초부터 존재했던 고룡은 절대로 타인과 협력하지 않아. 덧없이 파괴되고 또 다시 탄생하기를 반복하는 세상을 지켜보면서 세상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개념인지 느껴왔기 때문일세.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우리들 입장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지.”
드래곤이 타인과 협력하지 않는 이유는 혼자서도 아쉬울 게 없어서일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달랐다.
Satisfy 세계관에서 ‘세계’란 주기마다 파괴되고 탄생하기를 반복하는 개념.
어쩌면 드래곤은 지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은 무자비한 드래곤들도 어쩌면 ‘첫 번째 세계’에서만큼은 인간들을 아끼고 사랑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의 예외가 있네. 네바르탄. 놈은 자신의 광증을 치료해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협력할지도 몰라. 그 누군가가 자신의 여식을 보호해준 이라면 협력할 가능성이 더욱 더 높겠지. 협력이라고 해봤자 단발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네만, 단 한 번의 도움일지언정 판도를 뒤바꿀 힘을 발휘할 테고.”
광룡 네바르탄.
악룡 번헬리어와 더불어 가장 악명 높은 드래곤의 이름이 여기서 튀어나올 줄이야.
짐짓 당황하는 그리드의 주변 풍경이 예고도 없이 바뀌었다.
41번째로 방문할 예정이었던 식당의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네바르탄의 광증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피.”
끼익.
그리드에게 말도 없이 매스 텔레포트를 써서 장소를 바꾼 레이더스가 지체 않고 식당 문을 열었다.
“수만, 수억의 피를 빨아들여도 변질되지 않을 마리로즈의 피가 유일한 해독제가 될 걸세.”
[특수 보상으로 ★히든 퀘스트★ <마리로즈의 피>를 얻었습니다.]
<마리로즈의 피>
★히든 퀘스트★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의 피를 얻어 광룡 네바르탄에게 수혈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보상:네바르탄의 광증 치료. 네바르탄과의 호감도 상승.
템빨국의 안전과 헥세타이아의 구출을 위해선.
그리고 세계의 멸망을 막아내기 위해선 신들과 싸워야할 듯한 흐름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이때 마침 네바르탄의 협력을 얻을 수도 있단 가능성이 제기되자 그리드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네바르탄은 어디에 있죠?”
“그건 아무도 모르네. 정신 나간 상태로 아스가르드를 배회할 수도, 지옥불 강에서 온천을 즐길 수도 있겠지.”
“.....”
마리로즈의 피를 얻는 것만 해도 실현하기 힘든 일이다.
설령 피를 얻을지언정 네바르탄을 찾아내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기도 했다.
그리드는 영 찝찝했다.
이 퀘스트를 과연 보상이라고 표현해도 좋을지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