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10화
라 드로는 타이탄 최고의 레스토랑이다.
요리를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로 뛰어난 맛과 품질을 보장했다.
제국의 명망 높은 귀족들도 예약 없인 방문하지 못하는 그곳에 그리드와 레이더스가 마주보고 앉았다.
둘 외엔 손님이 없다.
레스토랑을 통째로 점거한 까닭.
레이더스의 마법에 세뇌당해 다른 손님들을 모조리 내쫓은 오너가 직접 음식을 날랐다.
슥.
예리한 나이프가 식기를 긁지 않고 고기를 자른다.
처음 한 점은 소금에 찍어서, 다음엔 소스를 뿌려서, 또 다음은 가니쉬를 곁들여서. 아, 이 향신료도 함께 먹으라고 내놓은 건가?
다양한 방법으로 고기를 음미한 레이더스가 이내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지방 함량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부위를 써서 풍미와 감칠맛을 극대화시켰군. 자칫 느끼할 수도 있었는데 소스의 산미가 균형을 잘 잡아줘. 가장 칭찬할 부분은 가니쉬다. 치아와 닿는 순간 녹아버려 부족한 식감을 얇게 포 떠 튀긴 뿌리채소가 심심하지 않게 채워주는군.”
그리드도 나름 궁리해본 뒤 감상을 말했다.
“그냥.... 맛있군요.”
레이더스의 파괴적인 본성을 엿보고 위축돼있던 그리드조차 활짝 웃게 만들 정도로 라 드로의 음식은 훌륭했다.
마음 같아선 라 드로의 주방장에게 매일 도시락을 부탁하고 싶을 정도.
업무를 볼 때나 사냥할 때면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워온 그리드가 이런 욕구를 느낀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템빨궁의 요리사들도 실력이 좋긴 하지만 이 정도엔 미치지 못하지. 월드 클래스 요리사를 수배해서 고용해야하나?’
빌어먹을 이단....
이단이 요리만 잘 했어도 이런 고민은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리드가 투덜거리는 사이 디저트를 비운 레이더스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맛있는 식사였다.”
[미식룡 레이더스에게 맛있다는 감상을 들었습니다! (1/60)]
미식의 주기 퀘스트는 단순하다.
레이더스를 최소 80곳 이상의 음식점으로 안내해서 ‘맛있다.’는 말을 60번 들으면 클리어다.
첫 음식점부터 맛있다는 감상을 듣는데 성공한 그리드였지만,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행복하다는 감상을 기대했는데....’
맛있다를 넘어서는 감상.
레이더스가 ‘행복하다.’고 말할 때마다 특별한 보상이 찾아올 거라고 퀘스트는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라 드로는 그리드가 큰 기대를 걸었던 식당이다.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의 요리를 만드는 레스토랑은 서대륙 최고의 레스토랑 중 하나라고 표현해도 무방했으니까.
‘라 드로에서 행복하다는 말을 못 들은 이상 다른 식당에서도 행복하단 말은 듣기 힘들겠군.’
그리드가 큰 아쉬움에 휩싸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멘탈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바로 잡았다.
우선 퀘스트를 성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히든 보상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그래, 퀘스트만 클리어하면 된다. 시작부터 맛있다는 감상을 들었으니 첫 단추를 잘 꿴 셈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미소를 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레벨이 너무 빨리 오른다 싶더니....’
라 드로 내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아 예약까지 1년이 걸린다는 귀빈실.
귀빈실의 한쪽 벽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대형 창틀에는 타이탄의 웅장한 경치가 화폭처럼 담긴다. 그리고 그 화폭 안에 그리드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국에도 템빨신의 신전이 세워진 것이다.
드라시온 레이드에서 신들의 실체를 목격한 사람들 대부분이 제국인이라곤 하지만 설마 템빨신교로 개종했을 줄이야.
‘레베카 여신에게 실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섬길 필요는 없었을 텐데.’
아스가르드의 신들 외에도 신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대지의 신 가리온이다.
땅에 감사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들의 염원으로부터 탄생한 가리온은 아스가르드 출신이 아님에도 대륙인들에게 사랑 받고 존경 받는 신이다.
비록 치우와 달리 절대적인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리드보단 가리온이 훨씬 더 유명하고 대단한 신인 건 맞았다.
‘다른 신도 많은데 나를 선택해준 게 고맙군....’
바사라 황제와 공작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일 테지.
마음으로나마 감사를 보내는 그리드를 레이더스가 재촉했다.
“다음으로 안내할 곳은 어디지?”
레이더스 또한 그리드의 동상을 뻔히 봤을 텐데도 별 흥미 없는 눈치였다.
드래곤에게 있어서 갓 태어난 인신이란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음은 해산물 어떠십니까?”
“해산물도 좋지만 밀가루나 쌀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해산물과 탄수화물을 같이 조리한 요리야 많다.
“바로 안내해드려도 될까요?”
레이더스는 라 드로의 모든 메뉴를 맛보았다.
족히 30인분은 되는 양을 먹어 치운 것이다.
조심스레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레이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했다고 해서 위장까지 인간과 같은 건 아니잖나. 개인적으론 쉴 틈 없이 진도를 나갔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리드는 레이더스와의 동행이 영 불편했다.
이 무시무시한 드래곤을 어서 빨리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이곳입니다.”
지도를 꺼낸 그리드가 메디아를 지목했다.
한때 해상왕국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번헨 열도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쥬앙데르크 제위 시절 제국에게 멸망하고 흡수당해 현재는 제국령에 속한다.
“가지.”
좌표 검색은 고난도의 마법이다. 달랑 지도 한 장 보고 좌표를 검색하는 건 대마법사라고 해도 최소 수 분을 소요했다.
하지만 레이더스는 이미 메디아의 좌표를 특정하고 매스 텔레포트를 전개했다.
눈 한 번 깜빡하는 사이에 목적지에 도착한 그리드가 혀를 내둘렀다.
‘미치겠네.’
이쯤 되면 브라함과 견줘도 좋을 아니, 어쩌면 브라함 이상의 마법 실력 아닌가?
언젠가 보았던 번헬리어의 능력치가 99,999의 근력과 체력을 자랑했던 점을 상기한 그리드는 드래곤과 적대하는 일이 결단코 없어야한다는 사실을 재차 깨달았다.
‘일단.... 지상에서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는 게 너무 커.’
신은 천상에서, 대악마는 지옥에서만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는 반면 드래곤은 장소에 구애되지 않는다.
지상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드래곤인 셈이다.
“맛있군.”
메디아에서 여러 음식을 차례대로 맛본 레이더스가 흡족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행복하다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에서도, 또 다음 목적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드는 하루 동안 총 20군데의 식당으로 레이더스를 안내했지만 레이더스의 감상은 맛있다 수준에서 그쳤다.
‘그나마 실패는 없어서 다행인가....’
애써 아쉬움을 달래는 그리드를 레이더스가 칭찬했다.
“그대는 나를 조금도 실망시키지 않는군. 지난 미식 주기들과 비교해봤을 때 이번 미식 주기가 가장 행복하다.”
순간.
[미식룡 레이더스에게 행복하다는 감상을 들었습니다!]
[특수 조건을 달성하여 특수 보상이 발생합니다!]
“...??”
행복하다는 감상을 듣는 걸 반쯤 포기하고 있던 그리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미식의 주기 퀘스트의 목적은 맛있다는 감상을 60번 듣는 것이다.
한데 퀘스트는 레이더스를 ‘최소’ 80곳 이상의 음식점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한다.
맛있다는 감상을 설령 60번 연속으로 듣더라도 20곳의 식당을 더 찾아가야한다는 뜻.
의문인 부분이었는데, 이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최대한 특수 보상을 노려보라는 안배였구나.’
레이더스의 행복하다는 감상은 맛있다는 감상이 20회 ‘연속으로’ 누적돼야 발생하는 히든 시스템....
퀘스트가 80곳의 식당을 방문하게끔 유도한 것은 히든 시스템을 발동시킬 확률을 높여주기 위한 배려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배려가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 퀘스트의 난이도가 사실 엄청 높기 때문.
‘확실히.... 동료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맛집을 찾으려고 했으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겠지.’
특히 페이커가 인솔하는 템빨그림자단의 도움이 컸다.
이클립스 출신이 대거 합류한 템빨그림자단의 정보 탐색 능력은 대륙 최고 수준.
그들이 아니었다면 단기간 내에 이토록 수준 높은 맛집들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싶다.
“신세를 졌으니 보답을 해줘야겠지.”
무한한 마력이 깃든 레이더스의 시선이 그리드를 관조한다.
“흐음.... 파그마의 후예였군.”
“.....”
이제 알았나?
나름 유명해졌다고 믿었는데 드래곤의 관심을 끌기엔 아직 부족했나 보다.
‘오히려 다행인가?’
드래곤의 관심을 사봤자 좋을 게 없을 테니.
그건 그렇고 레이더스가 파그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파그마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새삼 깨닫는다.
“이걸 주지.”
아공간을 연 레이더스가 작은 바늘을 꺼냈다.
황금색 바늘이었다.
“이건....?”
바늘의 정보를 읽은 그리드가 놀라 눈을 부릅떴다.
바늘 자체의 성능도 성능이지만, 레이더스가 굳이 이 바늘을 줬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내가 가끔 심심할 때 쓰던 물건일세. 지금의 그대에겐 이게 가장 큰 선물일 듯하군.”
[<미식룡의 바늘>을 획득하였습니다.]
<미식룡의 바늘>
등급:신화
내구력:없음 공격력:350
*천, 가죽 재단 속도 80퍼센트 상승.
*재단 기술의 숙련도 상승 속도가 2배 상승.
*모든 종류의 천과 가죽, 비늘을 꿰뚫을 수 있음.
*재단기술로 제작하는 아이템에 보통 확률로 마법 귀속.
미식룡 레이더스가 식탁보를 만들 때면 사용하던 바늘입니다. 골드 드래곤의 비늘을 갈아 만든 것으로 레이더스의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무게:0
그리드에겐 몇 년째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전직 퀘스트가 있다.
<재단 기술 단련>
전직 퀘스트
대장 기술에 이어서 재단 기술까지 습득한 당신의 발전가능성은 더욱 더 커졌습니다.
만약 대장 기술과 재단 기술을 결합하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대장장이로써 당신의 저변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재단 기술을 활용하기 어렵습니다.
중급 재단 기술과 당신의 대장장이 기술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재단 기술을 대장장이 기술과 결합하기에 손색이 없을 수준까지 단련시키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재단 기술을 고급 마스터까지 단련.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벨 6. 장인급 재단 기술 개방.
무려 6개의 레벨을 보상으로 주는 전직 퀘스트....
그리드는 이 퀘스트를 깨기 위해서 지난 수 년 동안 매일 틈만 나면 팬티를 만들어왔다.
머리엔 멋진 왕관을, 등엔 화려한 망토를 두른 채 꼼지락꼼지락 팬티를 만드는 일은.... 솔직히 말해서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이 바늘만 있으면....’
재단 기술의 경험치를 지금보다 몇 배나 빠르게 쌓을 수 있으리라.
지긋지긋한 팬티 제작으로부터 조만간 해방되는 것이다.
‘심지어 마법을 귀속 시킨다니.’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늘을 건네받은 그리드가 레이더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오신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소인의 부족한 점을 알아보시고 도움을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드래곤의 본성이 흉포하다곤 하나 무작정 나쁜 놈은 아니었구나....
깨달으며, 레이더스에게 품었던 거부감을 어느 정도 떨쳐내는 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