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66화 (1,256/1,794)

템빨 64권 - 09화

[당신의 석상에 참배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템빨신 그리드의 석상>이 5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한 날.

번헨 열도 명예의 전당에 있는 <영웅왕 그리드의 석상>이 템빨신 그리드의 석상으로 승격했다.

비록 석상의 레벨은 초기화 됐지만, 석상 경배율이 최대치에 도달할 경우 그리드가 얻는 버프의 효과는 도리어 다양해졌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의 손재주 스탯이 10퍼센트 상승하고 아이템 제작 시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확률이 소폭 상승합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당신의 근력, 체력, 지력, 민첩성 스탯이 각 5퍼센트씩 상승하고 검무계열 공격 스킬의 시전 속도와 위력, 마법의 시전 속도와 재사용 대기 시간이 소폭 상승합니다.]

영웅왕의 석상은 손재주 스탯과 아이템 제작 확률, 그리고 검무의 시전 속도만 상승시켰던 반면 템빨신의 석상은 전투 관련 스탯 일체와 검무, 마법의 위력까지 상승시켰다.

아직은 상승폭이 낮았지만, 새로운 석상의 레벨이 기존 석상의 레벨에 근접하는 시점부턴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게 분명했다.

‘좋군. 손재주가 낮아져서 당분간 좋은 아이템을 만드는 건 자제해야겠지만....’

기존 영웅왕의 석상은 15레벨 즉, 만렙이었다.

만렙 기준 영웅왕 석상의 버프는 손재주 스탯을 30퍼센트나 올려줬던 반면 현재 5레벨에 불과한 템빨신 석상의 버프는 손재주 스탯을 10퍼센트밖에 올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리드의 석상(또는 동상)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템빨국 각지에 템빨신 신전이 세워진 여파다.

신전마다 템빨신의 동상이 세워졌으니, 사람들은 굳이 번헨 열도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그리드에게 참배를 올리는 게 가능해졌고 그만큼 동상과 석상의 레벨도 빠르게 오를 것이었다.(모든 동상과 석상은 레벨을 공유한다)

물론 유라와 지슈카의 홍보도 큰 도움이 됐다.

세계 최고의 플레이어인 두 미녀가 인터뷰와 SNS를 통해서 템빨신교를 홍보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템빨신 신전을 찾는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 추세다.

‘템빨신교가 망하지 않는 이상 동상 버프는 거의 항시 유지될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어.’

나는 어떤 신인가, 라는 고찰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졌다.

버프 효과가 전투 관련 스탯과 마법의 위력까지 올려주는 걸 보니 템빨신이란 제작의 신임과 동시에 다재다능한 전투의 신으로도 평가 받는 눈치다.

현재 보유 중인 직업들의 특징이 잘 반영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머레이 왕국의 변방 도시.

<힐그렘>이라는 낡은 간판이 걸린 여관 앞에 멈춰 선 그리드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미식룡 레이더스.

무려 태초부터 존재했던 고룡이 정말로 이런 작고 허름한 여관에 머문다는 말인가?

잘못 된 정보가 아닐지 진지하게 의심해보는 그리드에게 스틱세이가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투며 표정이며 딱딱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리드를 바라보는 눈빛엔 원망마저 담겨있었다.

미식룡은 단지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 하나로 세계수의 뿌리를 씹어 먹었던 광기의 화신.

스틱세이의 입장에서 미식룡은 불치병을 안긴 두려움의 대상이기에 앞서 부모의 원수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미식룡과 관계를 맺으려하는 그리드의 태도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요한 임무라기에 그리드를 백 번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끝내 이해했건만.

이곳에 오는데 굳이 자신을 대동해야했던 건지는 의문이었다.

“우리 엘프가 레베카 여신을 유일신으로 추앙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거겠죠.”

그래서 나를 일부러 괴롭히는 겁니까. 나는 당신을 믿고 신앙을 바꾸고자 노력 중이었건만, 이라는 뒷말을 간신히 삼키며 등을 돌리는 스틱세이에게 그리드가 씁쓸히 웃어보였다.

“오해하지 마. 내가 브라함이 아니라 당신에게 이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당당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니까.”

“.....”

“평소엔 어딜 가든 당신에게 부탁하다가 미식룡을 만나려고 할 때만 조용히 떠나버리면.... 당신에게 찔리는 게 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잖아.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

“나는 미식룡이 당신의 원수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 당신과의 의리를 등지면서까지 미식룡과 사이 좋게 지낼 생각 따위 추호도 없어. 이번 만남은 단순히 업무일 뿐이야. 부디 알아줘.”

“....알겠습니다.”

“그럼 며칠 후에 보자고.”

“무탈하시길.”

스틱세이의 표정이 풀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그리드가 여관 문을 열었다.

***

끼익.

스틱세이와의 솔직한 담화는 그리드의 긴장을 완화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드는 미식룡 레이더스의 이름에 더 이상 짓눌리지 않았다.

미식룡은 단지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당당하게 여관에 들어섰다.

“어서오슈.”

중년의 여관 주인이 그리드를 맞이해주었다.

썩 친절한 태도는 아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을 흘겨 그리드의 행색을 살피더니 곧장 용건을 물었다.

“귀족이신가? 귀하신 분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서 방을 구할 리는 없고, 무슨 용건으로 찾아오셨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흘 전부터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귀인이셨군요.”

여관 주인이 조용히 담배를 껐다. 갑자기 태도가 공손해진 그가 그리드를 2층의 가장 안쪽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레이더스 님, 기다리셨던 자가 찾아왔습니다.”

“....!”

드래곤이 왜 이런 허름한 여관에 머무는 것인가.

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여관 주인은 레이더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드래곤과 연이 닿아있는 인간이라니....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이 중년인이 사실은 네임드인 걸까?

쾅.

그리드가 놀라고 있는 사이 방문이 스스로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그리드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낡고 작은 여관 안에 있는 방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크고 화려했다.

황제가 머무는 궁전을 연상시킬 지경이다.

“.....”

홀린 표정으로 방에 들어온 그리드가 석상처럼 굳었다.

산해진미가 가득 차려진 기다란 테이블.

그 앞에 홀로 앉은 사내가 식사 중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다루는 동작이 고아하다.

방에 입장한 순간부터 배경음으로 깔리는 클래식이 사내의 품격을 높여주는 듯했다.

그리드는 압도당했다.

사내가 품은 마력.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보라색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충만하게 깃든 마력에 그리드는 숨 쉴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호흡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혀가는 그를 여전히 등지고 앉은 사내가 입 안에 넣은 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삼킨 뒤 말했다.

“힐그렘의 음식은 지난 천 년 동안 변치 않는 맛을 자랑한다네. 내가 칭찬했던 맛을 지켜내기 위해 대대손손 노력한 결과일 테지.”

“....”

얼굴이 붉다 못해 파랗게 질려가는 그리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용언(龍言).

사내가 입에 담는 한 글자의 낱말이, 모든 단어와 문장이 강력한 힘을 담고 세계에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강제력은 사내의 마력만큼이나 강한 억압이 되어 그리드를 짓눌렀다.

“100년에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바로 힐그렘의 음식이야. 내게 힐그렘이란 몇 안 되는 아니, 어쩌면 유일한 그리움의 대상인 걸세.”

스윽.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사내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기포가 일어나는 술을 잔에 채워 한 모금 머금은 뒤 중얼거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그릇을 비우지 못하게 됐단 말이지. 첫 술을 뜰 땐 정취에 젖어 맛을 음미하다가도 몇 술 더 뜨면 지루해지거든. 맛을 알기에 그립다가도 맛을 알기에 금방 질려버리는 거야.”

드륵.

의자를 뒤로 민 사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레이더스.

인간으로 폴리모프했기 때문일까.

본디 찬란하게 빛나야할 그의 이름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NPC들의 이름처럼 하얗게 젖어있었다.

“그대에게 고맙네. 질리는 음식을 먹으며 지루해하고 있던 차에 내게 새로운 진미를 소개해줄 자네가 찾아온 덕분에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됐어.”

“허억.... 허억....”

레이더스가 감사를 언급하는 순간 그리드를 짓눌렀던 위압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레이더스가 범할 뻔 했다는 ‘실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그리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레이더스의 설명이 이어진 까닭이다.

“조금 전까지 이 작은 여관을 부수고 힐그렘의 혈족들을 멸망시킬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만약 그랬다면 수백 년쯤 후엔 후회했을 텐데 말이지.”

“.....”

자신을 천 년 동안 섬겨온 일족을.

자신을 섬기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맛을 지켜온 일족을, 그 맛에 질렸다하여 멸망시키려 했다고?

그리드는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엘프들의 눈앞에서 세계수의 뿌리를 씹어 먹었다는 레이더스의 분신과 눈앞의 레이더스를 겹쳐 보며 순간적으로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표출하지 못하고, 실없이 웃었다.

과거에 늘 짓고 다녔던 비굴한 미소였다.

미식룡 레이더스라는 이름에 짓눌리지 않겠다던 다짐이 레이더스의 실체를 목격한 순간 무색해진 것이다.

드래곤의 무한한 힘과 파괴적인 본성은 그리드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고 그리드는 두려움에 빠졌다.

‘젠장.’

그리드는 스스로를 변호할 방법이 많았다.

드래곤은 악마와 다르다. 우호는 맺지 못할지언정 명확한 적이 아니다. 다소 비굴할지언정 웃는 낯으로 상대하는 편이 미래에 좋다. 지혜의 탑의 목적 또한 드래곤을 해치는 게 아니라 드래곤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폭주를 방지하는 것에 있지 않던가. 용살자 하야테를 비롯한 탑의 결사들조차 드래곤을 적으로 삼기를 두려워하는 마당에 나 혼자 뭐가 잘났다고 드래곤에게 적의를 드러내겠는가. 그래,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는 건 내 본성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판단이다....

그리드는 이런 식의 변명들을 충분히 늘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답답한 마음은 뭘까.

이를 악 물고 가슴을 움켜쥐는 그를 레이더스가 재촉했다.

“허기를 면하고 싶군. 지체할 것 없이 안내를 부탁하겠네.”

멋진 외투를 걸친 레이더스가 먼저 방을 나섰다.

그러자 황궁처럼 크고 호화롭던 방이 좁고 허름한 공간으로 축소됐다.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리드가 1층으로 내려가 보자 레이더스가 여관 주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100년 뒤에 나를 만날 너의 후손은 선조의 맛을 지키되 새로운 맛을 찾아야할 것이다.”

“새, 새겨 듣겠나이다....!”

말뜻을 눈치 채고 사색이 된 여관 주인이 힘차게 대답했다.

사시나무처럼 떨며 바닥에 이마를 찧는 그는 마치 오열하는 듯했다.

레이더스라는 저주에 속박 된 가문을, 자신과 후손의 운명을 원망하며.

‘드래곤....’

드래곤을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이 드래곤을 경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오만방자한 대악마들이 드래곤만큼은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와 설욕전을 준비 중인 환국의 신들이 드래곤과는 협력할 생각조차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그리드가 확신했다.

본디 드래곤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종족이다.

네펠리나를 사자로 삼아 템빨국과 템빨신교를 지켜줄 템빨룡 아니, 수호룡으로 만든 건 정말이지 두 번 다신 없을 행운이 작용한 결과였다.

‘미식의 주기 동안 되도록 사리자.’

레이더스 앞에서 눈에 띄는 행동은 금물이다. 괜한 어그로를 끌어서 좋을 게 없다.

다짐한 그리드가 애써 밝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첫 번째 행선지는 사하란 제국입니다.”

레이더스의 입맛을 만족시킬 확률이 가장 높은, 황제 공인의 맛집.

“타이탄으로 가시죠.”

“기대되는군.”

레이더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이미 타이탄의 대로 한가운데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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