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08화
세상은 유라에게 궁금한 게 참 많다.
여전히 몇 안 되는 전설 클래스 전직자 중 한 명이며, 거의 유일하게 지옥에서 활동하는 플레이어인 그녀에게 질문할 거리야 차고 넘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유라는 모든 질문에 침묵해왔다.
과거에는 많은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며 대중과 가까이 지냈던 그녀도 이젠 지칠 대로 지쳤다.
“몇 년째 변함없는 미모를 자랑하고 계신데요. 동안을 유지하는 비결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시시콜콜한 질문과,
“조부이신 이진명 회장의 은퇴 시기가 정재계의 화두에 오르고 있습니다. 소문으로는 이진명 회장께서 유라씨를 후계자로 낙점했다는데, 이진명 회장께서 은퇴하시게 되면 유라씨는 플레이어 생활을 청산하고 기업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민감한 집안 이야기,
“영우씨와 데이트하시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고 있습니다. 두 분의 관계는 양가에서 공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결혼 소식을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사생활을 캐묻는 질문이 인터뷰 내내 뒤따랐으니 유라의 입장에선 불쾌하기만 했다.
템빨단에 가입한 뒤론 정말이지 인터뷰의 인자도 듣기 싫어졌을 지경.
“....Satisfy와 관련된 질답은 전부 끝난 것 같으니 인터뷰도 이만 끝내도록 하죠.”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걸 참고 애써 미소를 그린 유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등진 배경은 한창 공사 중인 템빨신 신전이었다.
한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거절해왔던 그녀가 이번 인터뷰에 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간접적으로나마 템빨신교를 홍보하기 위함이다.
“아.... 그러고 보니 템빨신교는 아이템 내구력 저하를 방지하는 버프를 준다죠?”
이대로 인터뷰를 끝내기엔 아쉬웠던 기자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서 화제를 바꿨다.
유라 입장에선 보람 있는 결과였다.
“네, 굳이 템빨신교의 사제로 전직하지 않고 종교만 개종해도 얻을 수 있는 버프에요. 템빨신의 동상에 기도하면 무려 8시간이나 버프가 유지 되죠.”
“상당한 메리트군요. 수리 키트를 이용한 자가수리는 아이템의 최대 내구도를 하락시킬 확률이 있어서 정 급하지 않은 이상 다들 꺼려하잖습니까. 수리 키트 자체가 소모품치고 비싸기도 하고요.”
“그렇죠. 그래서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사냥터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실정인데 템빨신교에 가입하면 최소 8시간 이상을 사냥에만 열중할 수 있는 거예요. 재물을 아끼면서 레벨 업에 더 열중할 수 있으니 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이득이고요.”
“하지만 다른 종교의 버프 효과와 비교하면 많이 초라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군요. 레베카교는 전투에 도움이 되는 버프를 무려 9개나 부여해주고 야탄교는 경험치 획득량을 올려주는 등 사냥 효율 자체를 크게 높여주지 않습니까.”
“상대적으로 차이가 나는 이유는 아직 템빨신교의 레벨이 낮아서 그래요. 템빨신교도 신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레벨이 올라갈 테고 버프 효과가 늘어나겠죠. 그 효과 대부분이 아이템과 관련될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요.”
마침 지나가던 후로이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특정 아이템의 등급을 잠시 동안 상승시켜주는 버프라던가, 타 직업군의 아이템도 장착할 수 있게끔 해주는 버프라던가, 아이템 획득률을 높여주는 버프라던가.... 사냥 효율을 높여주는 건 기본에다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버프가 앞으로 템빨신교에 계속해서 추가될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빨리 템빨신교에 가입해서 교인 등급을 높여놔야 나중에 추가될 혜택들을 더 빠르게 누릴 테고요.”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냐니? 예의 없이 타인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 것으로 모자라 호의를 갖고 다가온 사람을 무턱대고 의심부터 하는 자식 놈의 꼬라지를 보면 부모님께서 참 슬퍼하시겠군요.”
“네?”
당연히 잘못 들은 거겠지?
남의 인터뷰에 멋대로 난입한 것으로 모자라 부모님을 함부로 언급하는 후로이의 모습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석이 있었다.
미쳐도 제대로 미친놈이 아닌 이상 저럴 리 없다는 의심이 기자의 머리를 지배하며 기자로 하여금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어색한 적막이 흐를 때였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한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
[완전하기에 혼자를 고집하는 고고한 종족이 그의 종을 자처하였다.]
[여태껏 그 어떤 신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을 이뤘음에 다른 신들이 질투하였고, 그를 섬기는 이들은 감격하며 기도를 올렸다.]
.....
....
[템빨왕 그리드가 서사의 열한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새로운 신화의 서막이 템빨신교 교인들의 가슴을 웅장하게 만듭니다.]
[템빨신교의 명성이 잠시 하늘을 찌릅니다!]
[호기심 많은 이들의 신앙이 흔들립니다.]
[신앙이 흔들린 자들 중 일부가 템빨신교에 입교하였습니다.]
“....혼자를 고집하는 고고한 종족?”
여태껏 그 어떤 신도 이루지 못했던 위업?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거지?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기자의 머릿속에서 후로이라는 존재는 이미 지워지고 없었다.
서사시의 내용을 해석해보고자 노력하는 그에게, 정확히는 그가 쓴 기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유라가 말했다.
“새로운 템빨신의 사자로 드래곤이 임명됐나 보네요.”
“네? 드래곤요? 그 드래곤??”
“이 추세면 템빨신교의 레벨 성장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되겠죠. 조금이라도 더 혜택을 얻으려면 한시 빨리 템빨신교에 가입하시는 걸 추천 드릴게요.”
“아, 네....”
넋 나간 표정으로 유라의 말을 받아 적던 기자가 문득 깨달았다.
유라를 인터뷰한 내용보다 템빨신교와 관련한 내용이 수첩을 더 많이 채우고 있었다.
***
“김치~”
찰칵!
유라가 남쪽 신전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지슈카는 동쪽 신전에서 인터뷰 중이었다.
그녀는 유라와 달리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아예 기자회견을 열어서 여러 개의 언론을 동시 소집, 그들을 대상으로 템빨신교를 노골적으로 홍보한 것이다.
심지어 그리드의 석상 앞에서 연신 스샷을 찍으며 그걸 실시간으로 SNS에 전송시켰다.
템빨신 곁에서♥
#플레이어최초신 #GOD리드 #템빨신교 #그리드♥지슈카 #템빨왕 #템빨신교가입시버프지급
“....”
기자들의 표정이 영 떨떠름했다.
궁금한 게 많을 테니, 찾아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지슈카의 말만 믿고 냉큼 달려왔건만.....
‘인터뷰 내내 템빨신교만 홍보하다니.’
‘이 와중에 하트 남발하는 것 봐라.’
기레기라는 비난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게 기자들이다.
특히 Satisfy 기자들은 연애부 출신 기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멘탈이 콘크리트였다. 남을 입맛대로 요리하는데 있어선 이골이 난 족속들이기도 했다.
한데 빌어먹을, 지슈카의 마이페이스는 그들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질문을 꺼낼 때마다 그녀의 기백에 눌려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바람에 자극적인 기사는 하나도 건지지 못했다.
‘끝까지 유라한테 부탁해 볼걸.’
기자생활 10년 동안 이만큼 커다란 무력감을 느껴본 게 도대체 얼마만이란 말인가....
그들이 한탄하는 바로 그때였다.
[템빨신 그리드가 열한 번째 서사시를 써내려갑니다.]
하늘이 축복을 내리셨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거리를 건진 기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서사시의 내용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네펠리나를 설득하는데 성공한 거구나!’
서사시를 보고 상황을 파악한 지슈카의 만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가━
“미친 건가?”
....이내 사라졌다.
차가운 음성을 듣고 움찔 놀라는 지슈카를 한 노인이 경멸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말씀이 심하시네?”
석상에 매달려서 스샷 몇 번 찍었다고 초면인 사람한테 돌았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
석상에 뺨 좀 부비고 뽀뽀 좀 했기로서니 미친놈 취급을 당해야하는 건지, 불쾌하고 화가 난다.
그나마 상대방의 연배가 높아 차마 욕으로 되갚아주진 못하고 작게 투덜거리는 지슈카에게 노인이 재차 말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이쯤 되자 지슈카도 울컥했다.
“아니, 뭘 자꾸 미쳤다고....! 영감님 나 알아요?!”
“그대 말고 그대들이 섬기는 왕 말일세. 칼 만들다가 망치로 본인의 머리를 찧기라도 한 건가? 대체 드래곤의 뭘 믿고 사자로 삼은 거지?”
“.....”
내가 아니라 그리드한테 뭐라고 하던 거였구나.
깨닫고 화를 삭이던 지슈카가 문득 다시 도끼눈을 떴다.
내 남자가 욕을 먹었다고 생각하자 자신이 욕 먹은 것처럼 기분 나쁜 그녀였다.
그녀가 노인에게 삿대질 했다.
“아니 당신, 도대체 누군데 자꾸 함부로 말하는 거....?”
언성을 높이던 지슈카가 흠칫 놀랐다.
노인이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가 펄럭이는가 싶더니 노인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기 때문.
‘뭐, 뭐야?’
마법이 아니었다.
이건....
‘순보?’
초월자를 상징하는 궁극의 보법.
최근에야 그리드 때문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본래 순보는 좀처럼 쉽게 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평범한 플레이어는 게임 접을 때까지 구경 못해볼 수도 있는 기술이 바로 순보였다.
한데 다짜고짜 나타난 노인이 순보를....
그리드를 향했던 노인의 비난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해진 지슈카가 기자들을 뒤로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침입자야! 왕비와 왕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대장간 지구의 경비 병력도 늘리도록 해!!
지슈카의 공지가 템빨단원들을 라인하르트로 소집시켰다.
같은 시각, 네펠리나의 침소.
“와구와구.”
뱃속에 블랙홀이 들었나.
통째로 요리된 닭을 한 입에 넣고 뼈째 씹어 먹는 작은 소녀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그리드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노인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해츨링을 숨기고 있었다니. 신격을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축하해주러 왔다가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군.”
펄럭.
로브를 벗어던지며 정체를 드러내는 노인, 다름 아닌 검성 비반이었다.
“해츨링의 모가지에 달린 척추뼈도 성체와 똑같이 27개였던가. 죄다 요절을 내주지.”
그리드가 아차 싶었다.
탑의 결사들에게만큼은 네펠리나의 정체를 꽁꽁 숨겨 뒀어야하는데 서사시가 뜨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잠깐....! 이 아이는 제 동료입니다!!”
검을 뽑아 쥐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비반에게 그리드가 소리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드래곤의 위험성에 대해선 누누이 말해왔을 텐데. 해츨링은 아직 약해 인간에게 협조적인 모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성체가 되는 순간 본색을 드러낼 걸세. 아직 해츨링일 때 없애놔야 후환이 없어.”
무쌍심법이 활성화되며 찬란한 검기가 비반의 검신에 피어오른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네펠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내, 내게 칼을 겨누다니! 무엄하다!!”
“흥!”
콧방귀 뀐 비반이 반월형의 참격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콰르르릉!!
천장을 무너뜨리며 쇄도해온 강력한 마법이 비반의 검과 충돌을 일으켰다.
“....!”
묵직한 충격에 감탄한 비반이 마법사의 위치를 포착하기 위해 기감을 확장하다가 등을 돌리며 검을 세웠다.
흰 깃털 하나가 그의 시야에 아른거렸다.
쩌저저정!!
비반의 몸이 뒤로 몇 걸음이나 밀려났다.
연속적인 충격에 놀라 요동치는 팔 근육을 진정시키며 시선을 올린 비반이 두 명의 아름다운 사내를 목격했다.
흰 날개를 활짝 펼친 금발의 미남자와 지팡이를 어깨에 짊어진 은발의 미남자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사....”
그리고 브라함인가?
“내 상대로 손색이 없군.”
히죽 웃은 비반이 검을 고쳐 쥐는 순간이었다.
철썩!
누군가의 손이 비반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따끔한 고통에 눈시울을 붉힌 비반이 뒤를 돌아보자 제시카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말랬죠?”
“아, 아니, 해츨링이....”
“미식룡처럼 통제 가능한 드래곤도 있는데 해츨링이라고 없겠어요? 특히 저 아이는 광룡의 딸이에요. 하야테 님께선 저 아이를 도리어 지켜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야테 공께선 저 해츨링을 알고 계셨나?”
“그리드 님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치 채셨다는데요.”
“근데 왜 나한텐 아무 말도 안 해주셨던 겐가?”
“또 서두만 듣고 탑을 뛰쳐나갈까봐 염려하셨던 게 아닐까요?”
“.....”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사람이었나.
의기소침해져서 말문을 닫는 비반이었다.
그를 보고 한숨 쉰 제시카가 그리드에게 목례했다.
“아시다시피 미식의 주기는 이미 시작됐어요. 하지만 레이더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데 늦어서 이제야 찾아뵙게 된 점 사과드립니다.”
“안 그래도 6일 전에 레이더스의 레어를 방문했는데 아무 것도 없기에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주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레어에서 떠난 눈치더군요. 현재 레이더스는 머레이 왕국에 있어요. 자세한 위치는 여기에....”
제시카가 그리드에게 지도를 건네주었다.
지도에 체크 된 위치를 확인한 그리드는 당연히 스틱세이를 찾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