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07화
『이틀 내내 세상이 떠들썩하죠? 랭킹 1위 플레이어 그리드가 전 세계 최초로 신화 등급 클래스를 얻었기 때문인데요. 전설 클래스만 해도 대부분의 상태이상에 저항하고 5초 불사 효과를 얻어 무적이라고 불리는 상황에 신화 클래스의 위력은 얼마나 더 대단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입니다, 신. 상상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게 분명한 거죠. 기본적으로 스탯 각성 효과가 상승해서 공격력과 생존력이 강화되고 모든 공격이 광역으로 적용된다던지 하는 식으로 혼자서 다수를 압도하는데 특화될 것 같군요.』
『마왕 토벌전에서의 그리드를 떠올리면 되는 걸까요? 확실히.... 그때 그리드가 보여줬던 무력은 신이나 다름없었죠.』
『전투력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대장장이 능력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신화 등급의 대장장이가 된 이상 앞으로는 신화 등급 아이템을 쉽게 생산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신화 아이템을 쉽게 생산한다라.... 상상만 해도 소름 돋는군요. 만약 그렇게 되면 템빨단, 템빨국, 템빨신교 3개 세력은 핵병기를 보유하게 될 거라고 표현해도 무방하겠는걸요?』
『템빨신교의 상황은 어떻죠? 템빨신교가 탄생하면서 템빨신교 성기사와 템빨신교 사제라는 신규 직업이 추가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템빨단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워했던 플레이어들이 템빨신교에 입교하는 걸 노리고 있을 것 같은데요.』
『예상과 달리 템빨신교에 가입하는 플레이어는 현재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Satisfy에서 종교의 입지는 신도의 숫자와 비례하며 여기서 말하는 신도란 NPC를 뜻하는데, 레베카교의 눈치를 보는 탓인지, 아니면 신앙이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인지 템빨신교에 입교하는 NPC 숫자가 의외로 적거든요. 미래가 불투명하니 플레이어들도 망설일 수밖에 없는 거죠.』
『플레이어는 신도로 카운트 되지 않는 겁니까?』
『신도의 숫자가 100만 명을 달성하기 전까진 숫자가 카운트 되지 않습니다. 종교는 신도의 숫자가 10만, 50만 단위로 늘어날 때마다 특혜를 누리게 되는데 초반부터 플레이어의 숫자가 카운트 될 경우 플레이어들이 합심해서 특정 종교를 육성하는 게 가능해지니까요.』
『특정 개인이나 단체가 권력과 재력으로 종교를 강화하고 장악하는 걸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이군요.』
『네, 맞습니다.』
『취지는 이해하지만... 신도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상 플레이어가 템빨신교에 가입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숫자가 카운트되지 않을 뿐이지 신도로서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은 전부 누릴 수 있거든요.』
『음, 어찌됐든 템빨신교가 성장하기 위해선 교황의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그렇죠. 뿐만 아니라 템빨신교 성기사와 사제라는 신규 직업의 성능도 중요한 지표가 될 겁니다. 아무래도 직업에 메리트가 있어야 종교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고....』
채널 어디를 틀어도 템빨신과 템빨신교 이야기뿐이다.
『연애도 템빨입니다. 멋진 옷을 입고 좋은 향수를 뿌려야 이성에게 더 큰 매력을 어필할 수 있으니까요. 자, 제 코디 보세요. 멋지죠?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상품이 신체의 단점을 보완해주기 때문에....』
『육아는 템빨이죠. 이 보행기 하나면 우리 아이들을 마음 편히....』
홈쇼핑을 틀어도 템빨.
『단언컨대 완벽한 공기청정기. 가전은 템빨입니다.』
『요리의 끝을 장식하는 멋. 놋그릇이라는 템빨 하나가 당신의 식탁을 아름답게 가꿉니다.』
CF마다 템빨.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템빨이란 용어가 이젠 긍정적인 의미로 일상 깊숙이 침투해 있었다.
누군가는 그리드가 세상을 바꿨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원래 인생은 템빨인데 뭘 새삼스럽게.’
더 좋은 필기구를 쓰는 학생이 공부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더 좋은 차를 타는 사람이 쾌적한 드라이빙을 즐기는 법.
자고로 템빨이란 예로부터 중요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았을 뿐.
생각하며 TV를 끈 신영우가 외투를 걸쳤다.
‘그건 그렇고 신도를 일단 10만 명이라도 채워놔야 할 텐데.’
템빨국의 백성만 해도 수백만이다. NPC만 계산했을 때 그렇다.
아무래도 그렇다보니 신도를 모으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신앙이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평생 교회만 다니던 사람에게 당장 내일부터 절에 다니라고 하면 누가 순순히 따르겠는가?
템빨국 백성들이 그리드를 존경하며 충성한다지만 종교는 또 다른 문제였다.
‘현 상황에서 신도를 늘리려면 신들의 실체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동대륙을 다녀오는 게 가장 빠르겠지.’
서대륙의 인간들은 대부분 레베카를 섬기고 있으며 레베카를 향한 신앙과 그리드를 향한 신앙은 대립되는 실정이다.
반면 동대륙의 인간들은 사방신을 섬기며 사방신은 그리드와 공생하는 관계다.
당장 그리드가 품고 있는 주작의 심장이 공생관계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 중 하나였다.
‘게다가 사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가끔 사당에 들러 기도를 올릴 뿐이지 따로 종교 활동을 안 하니까 템빨신교에 입교하는데 부담이 적을 거다.’
부아아아아앙!!
자동차 전용 도로를 질주하는 십삼이의 배기음이 영우의 답답한 마음을 뻥 뚫어주었다.
물론 규정 속도는 준수하는 신영우였다.
법규를 지키는 건 당연한 의무였으니까.
“앗! 죄, 죄송합니다! 세탁비를 물어드릴 테니....”
“세탁비는 지랄 염병 떨고 앉았네!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알아? 네깟 알바 놈은 1년 평생 일해도 구경조차 못할 옷인데....!”
스트레스를 풀 때 가장 좋은 코스는 드라이브와 미식이다.
튀긴 고추와 땅콩이 넉넉히 들어간 향라새우가 땡겨 강남의 한 중식집을 찾은 영우가 자리에 앉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명품 시계를 도드라지게 코디한 남자 하나가 식당 종업원에게 별에 별 쌍욕을 지껄이고 있었기 때문.
종업원이 테이블에 음식을 놓다가 재스민차를 쏟은 눈치였다.
몇 년 째 게임을 하며 눈썰미가 좋아진 영우는 남자의 옷깃이 살짝 물들어 있는 걸 순간적으로 파악하고 쯧, 혀를 찼다.
‘한 번 빨면 괜찮아질 텐데 뭔.’
굳이 세탁소에 갈 일도 없다.
요즘 세제와 세탁기가 얼마나 좋은데.
“네가 그따위로 어리바리하니까 알바 따위나 하면서 사는 거야!”
아주 그냥 지랄 났다.
인력소를 전전하던 시절, 젊은 놈이 벽돌이나 나른다고 멸시하던 인간들이 떠오른다.
타인의 직업을 쉽게 평가하고 비하하는 그런 놈들 때문에 노가다가 부끄러웠었다. 정당한 노동으로 돈을 벌며 기술까지 배웠으니 도리어 자랑스러워할 일이었는데.
괜히 울컥한 영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닥치고 꺼져.”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진상을 피우는 놈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대한민국의 망신 같으니.”
극검이라는 닉네임으로 활동 중인 대한애국협회장 강대한이었다.
사나운 표정으로 진상을 쫓아낸 그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영우와 시선을 마주치고 굳어 섰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오늘 미팅이 있는데 손님께서 중국 음식이 드시고 싶다고 해서....”
아무래도 한식집이 아닌 중식집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걸리는 눈치였다.
영우는 못 본 채 해주었다.
하지만 영우가 못 본 척 해준 게 부질없게도, 이날 사건은 SNS에 급속도로 확산됐고 9시 뉴스에서도 다뤄졌다.
인터뷰에서 단지 그곳에서 미팅이 있었을 뿐이다, 라는 헛소리만 반복하는 강대한의 모습은 짤방으로 편집 돼 한동안 인터넷 밈이 되었다.
***
“영광입니다.”
메르세데스는 감격했고,
“템빨신의 사자로서 만인의 귀감이 되겠나이다.”
피아로는 비장했으며,
“흥, 나보고 네 부하가 되라는 말이냐? 뭐, 내가 아니면 딱히 인재가 없어 보이니 내키지 않아도 당분간은 맡아주마.”
브라함은 투덜거리면서도 받아들였다.
3명의 템빨신의 사자가 탄생한 날이다.
‘이제 총 4명.’
다음으로 네펠리나를 설득할 차례다.
네펠리나까지 사자로 임명하게 되면 템빨국과 템빨신교는 늘 안전할 수 있다.
내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다른 신들의 저주가 내릴지라도 사자들만의 힘으로 충분히 극복해낼 것이다.
그런 확신이 생길 정도로 템빨신 사자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네펠리나.”
보름 내내 대장간에 틀어박혀 지냈다.
라구엘의 창에서 디바인 스톤을 추출하는데 무려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고, 그 뒤로는 이정의 수련도구 세트를 분해, 재조립하며 이해도를 높였다. 천사의 고리와 깃털의 사용처도 분석해 봤는데 아쉽게도 아직 파악하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더 많은 종류의 광물을 매개로 삼아서 연구해봐야 할 듯싶다.
“네펠리나....?”
슬슬 네펠리나가 깨어날 시간이라는 라우엘의 연락을 받고 침소를 찾아온 그리드가 짐짓 놀라 멈춰 섰다.
드래곤.
아마도 아니, 분명히 세계에서 가장 고등하고 위대한 생물.
외모에서조차 결점을 찾기 힘든 그 완벽한 존재가 울고 있었다.
잔뜩 움츠린 작은 어깨와 바들바들 떨리는 가녀린 팔이 가엾다는 감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왜, 왜, 뭔데?”
그리드의 기척은 처음부터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울음을 그치지 못했던 것일 테지.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낸 네펠리나가 뺨을 부풀리고 묻자 그리드가 조용히 다가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
악몽이라도 꾼 거냐고, 괜찮은 거냐고 그리드는 묻지 않았다.
책임 질 수 없는 말을 섣불리 꺼내봤자 신뢰를 잃을 뿐이었으니까.
“쿠흥!!”
손수건을 건네받은 네펠리나가 거하게 코를 풀었다.
먹는 게 많아서인지 콧물 양도 많다.
완전히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을 갓 핸드로 돌려받은 그리드가 바로 용건을 꺼냈다.
“내 사자가 되어줘.”
“으응?”
조막만한 얼굴을 갸웃거린 네펠리나가 이내 눈썹을 좁히고 그리드를 살펴보았다.
“뭐야? 새끼 신이 됐네?”
“새끼 신?”
“이제 막 태어났으니까 새끼 신이지. 내가 해츨링인 것처럼.”
“네가 성체가 되듯이 나도 진짜 신이 되어갈 수 있는 건가?”
“그야 당연하지. 대신 많은 기적을 일으켜야겠지만.”
신이 지위에 그친 것은 아직 성장 단계에 있었기 때문인가.
종족 자체가 신이 되는 건 바라지 않지만, 클래스만큼은 신화 등급이 됐으면 하는 게 그리드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결국 계속 성장해야한다는 뜻이군.’
아직도 앞길이 까마득하다는 생각에 헛웃음을 흘리는 그리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난 네펠리나가 옷을 챙겨 입었다.
“내가 해츨링이라서 만만해 보였나보네. 새끼 신 따위가 나를 종으로 삼겠다니.”
“종이 아니라 동료가 돼달라는 거야.”
“신의 사자가 언제부터 신의 동료였어? 쫄따구지.”
“그건 사전적인 의미일 뿐이고....”
“어찌됐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쫄따구로 보인다는 거잖아. 여태껏 그 어떤 신도 드래곤을 사자로 삼은 적은 없는데 욕심도 많네.”
“.....”
“그래서.”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갖춰 입은 네펠리나가 다음으로 챙긴 건 식기였다.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서 나이프와 포크를 챙겨드는 모습을 보니 곧 병사들이 가져올 소와 닭이 어지간히 기다려지는 눈치다.
“내가 네 사자가 되면 나한텐 어떤 이익이 있는데? 말을 해봐. 설명을 들어야 고민도 해보지.”
“....거절하려는 거 아니었어?”
“거절해봤자 설득하려고 준비했을 거 아니야. 마침 나도 더 이상은 악몽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고.”
아버지를 광증에 빠뜨린 바알과 대악마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노리고 덤벼드는 드래곤들....
네펠리나가 때려죽이고 싶은 놈들은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두려웠으니까.
특히 태초부터 존재했던 염룡은 자신이 이대로 무럭무럭 자라봤자 상대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드의 예상대로 네펠리나에게도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너를 강하게 만들어줄게.”
“풋, 네가? 나를? 그거 아니? 드래곤이 신들의 사자가 되지 않는 이유는 단지 자존심이 상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메리트가 없어서야. 대개 신들은 사자의 잠재력을 개방시켜서 사자를 강하게 만들어주는데 드래곤은 스스로의 잠재력을 이미 100퍼센트 이끌어낼 수 있거든. 네가 나를 꼬시려면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할 게 아니라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강한 동료들을 만들어 주겠다는 비교적 현실적인 약속을 내세워야지.”
“난 할 수 있어.”
“....?”
“너를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네가 의지할 수 있는 강한 동료들도 이미 곁에 있고.”
“흐음.”
네펠리나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바다처럼 깊은 그녀의 눈동자가 그리드를 빤히 관찰했다.
그리드의 기운을 토대로 여태까지 그가 쌓아온 업적들을 낱낱이 파악하고, 웃었다.
“든든한 동료들 중 하나가 바로 너겠네.”
“....!”
“좋아, 사자로 부린답시고 귀찮은 심부름만 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해주면 제안을 받아들일게. 너도 알다시피 난 대부분 먹고, 자는데 시간을 써야 해서 바쁜 몸이거든.”
드래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이 그리드와 손을 잡았다.
드래곤이 누군가를 섬긴다는 건 세계가 탄생한 이래 최초였다.
아직 해츨링에 불과한 어린 드래곤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