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05화
“신조차도 드래곤은 통제 못 한다고 들었는데.... 과연 네펠리나가 사자의 자리를 수락할까?”
신의 사자(使者)를 직역하자면 신의 심부름꾼 즉, 따까리다.
그리고 드래곤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하고 자존심이 센 생물이다.
네펠리나가 그리드의 사자가 될 확률은 매우 낮아보였다.
실제로 여태껏 그 어떤 신도 드래곤을 자신의 것으로 삼지 못했다.
지슈카는 회의적이었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네펠리나는 보통의 드래곤하고 입장이 달라.’
네펠리나의 목적은 복수다. 무수히 많고 강한 적들이 그 아이의 앞길에 도사리고 있었다.
타고난 힘을 완벽하다고 믿으며 충분히 만족하는 다른 드래곤들과 달리, 네펠리나는 타고난 것 이상의 힘을 갈구할 운명인 셈이다.
[당신은 총 7명의 사자(使者)를 임명할 수 있습니다.]
[신의 사자는 신을 상징하는 권능을 계승하며, 사자 개인의 개성에 영향을 받는 고유 특성 하나를 추가로 개방합니다.]
<템빨신의 사자>
템빨신이 만든 아이템을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착용하는 아이템의 위력을 크게 증가시킵니다.
“네펠리나는 내 사자가 되는 걸 긍정적으로 검토할 거야. 만약 거절한다고 해도 꾸준히 설득해 봐야지.”
템빨신의 사자가 계승하는 권능은 템빨.
대장장이인 그리드와 환상의 케미를 이룬다.
그리드가 좋은 아이템을 만들면 만들수록 그 아이템을 쓰게 될 사자들도 강해지는 것이다.
네펠리나에게도 분명히 매력적인 제안이리라.
“그럼 사리엘에 브라함, 피아로, 메르세데스, 거기에 네펠리나까지, 다섯 명의 사자는 정해진 거네.”
이제 남은 사자의 자리는 단 2개뿐.
이쯤 되자 지슈카는 불안해졌다.
템빨단원 중 전설은 4명.
지슈카 외에도 페이커, 유라, 유페미나가 또 있다.
지슈카는 자신이 그들을 제치고 남은 2자리 중 하나를 꿰찰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하나 같이 쟁쟁한 실력자들이었으니까.
특히 유라의 성장세가 압권이었다. 그녀가 쏘는 탄환은 드라시온의 두꺼운 가죽을 꿰뚫고 치명상을 입혔을 정도이니 자신의 화살과는 명백히 차원이 달랐다.
물론 레벨이 오를수록 격차를 좁힐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지.
‘게다가 유페미나의 잠재력은 세계관 최강급이고 페이커도 만만치 않아.’
근심하는 지슈카.
그녀의 태도를 보고 그녀가 사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가 선을 그었다.
“지슈카, 미안하지만 플레이어를 사자로 삼을 생각은 없어.”
앞으로 신들과 대적할 가능성이 생긴 그리드는 아군 전력을 최대한 강화시켜야할 의무가 생겼다.
그래야만 나라를, 백성을, 동료들과 가족을 지킬 수 있었다.
단 일곱 명만 지정할 수 있는 사자의 자리에 플레이어를 임명하는 건 솔직히 말해서 비효율적이었다.
템빨단원들이 아무리 강해봤자 네임드급 NPC를 넘어서기엔 아직 역부족이었으니.
“효율의 문제야. 그런 의미에서 메르세데스를 사자로 임명하는 게 옳을까 고민하고 있을 정도니까 기분 나빠도 이해해줘.”
“기분이 나쁘긴 무슨. 기분 나쁘면 염치가 없는 거지.”
지슈카의 얼굴이 붉어졌다.
실력도 없는 주제에 사자의 자리를 넘본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물론 그녀가 사자의 자리를 노린 이유는 그리드와 보다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였고 또한 그리드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였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사자가 되기를 바랐던 게 아니다. 애초에 사자가 된다고 해서 뭐가 좋은지도 아직 그녀는 몰랐다.
욕심 없는 순수한 호의였던 것이다.
그리드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아직 완전히 성장하지 못한 템빨단원들에게 사자의 자리를 넘겨주고 싶진 않았다.
난처한 표정을 짓는 그리드에게 지슈카가 말했다.
“네가 그런 표정 짓지 못하도록 내가 더 강해질게. 실력으로 당당하게 사자가 돼주겠어.”
자신만만한 미소다.
지슈카의 당찬 선언이 그리드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고마워. 기대하마.”
템빨단원들은 충분히 성장해왔다.
대천사 사리엘과 드래곤 네펠리나, 그리고 브라함 등의 네임드들이 워낙 특출할 뿐이다.
그리드는 템빨단원들을 믿었다. 언젠간 그들 또한 자신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해 네임드들을 넘어서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들은 20억 명의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고의 재능과 성실함을 겸비한 실력자들이니까.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선 이걸 양산할 필요가 있는 거고.’
이정의 수련 도구들.
잠시 착용해본 경험에 따르면 사용 난이도가 너무 높다.
운신 자체가 힘들어지니 종합적인 전투력이 10배 이상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앞으로 되도록 이 수련 도구 세트에 익숙해질 계획이었다.
직접 사용하며 수련 도구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조금이나마 개선해서 새로운 버전의 수련 도구 세트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리고 애들한테 나눠줘야지.’
이정의 수련 도구를 얻은 건 정말 큰 수확이다.
아이템을 이용해서 더 빠른 성장을 도모한다는 발상은 템빨이 추구해야할 본질에 가까웠다.
‘수련 도구를 만드는데 익숙해지면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훈련용 무기에도 경험치 상승 옵션을 부여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일단 원리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의욕을 다진 그리드가 우선 대천사 사리엘의 정보를 확인했다.
새로운 동료의 정보를 파악하는 건 당연한 절차다.
이름:사리엘
나이:알 수 없음 성별:중성
종족:대천사
★원거리 공격에 면역. 모든 버프 스킬의 효과를 50퍼센트 상승 적용 받음.
직업:템빨신의 사자
★템빨신이 제작한 아이템을 제약 없이 착용 가능. 착용 아이템의 위력이 대폭 증가.
칭호:최초의 일곱 피조물
*모든 상태이상에 면역.
*불멸. 사망 시 즉시 부활(다른 칭호 ‘타락천사’의 영향으로 이 효과는 현재 봉인 된 상태입니다.)
칭호:감시자
*대상의 암흑 속성 마법과 스킬을 봉쇄.
*최근 살인을 저지른 대상을 공격 시 높은 확률로 ‘단죄’ 발동.
칭호:타락천사
*자신이 신성 속성 마법과 스킬 사용 시 일정 확률로 발동 취소.
*신성 속성 공격에 취약.
*아스가르드 입장 시 모든 능력치 50퍼센트 하락.
*아스가르드에서 보관 중인 예비 신체들과 싱크로 불가.
*지옥 입장 시 모든 능력치 20퍼센트 증가. 단, 높은 확률로 악마화하고 폭주.
레벨:550
근력:4,278 체력:4,139
민첩:4,278 지력:4,139
통찰력:6,050 매력:20,511
지력 수치가 압도적으로 높은 대신 다른 능력치는 아쉬운 브라함과 상반된다.
기사답게 모든 능력치가 출중한 메르세데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능력치 밸런스가 훌륭했다.
‘스탯이 아름다울 지경이네.’
보유 스킬 목록은 더욱 더 대단했다.
모든 종류의 마스터리 스킬을 숙지하고 있었으며 숙련도 등급이 최하 S였다. 암흑 속성 마법을 제외한 모든 마법에 숙달했을 뿐만 아니라 일정 시간 동안 무적 상태에 돌입하는 <기도>스킬과 대상의 죄를 밝히는 <사안(邪眼)>스킬도 보유했다.
가장 압권은 감시자 칭호와 사안 스킬의 효과로 활성화되는 <단죄>스킬의 위력이다.
높은 확률로 대상을 즉사시키는 일격필살기인데 재사용 대기 시간이 없다.
‘조건부 활성화 스킬인 점을 감안해도 이쯤 되면 사기군.’
만약 대악마 드라시온이었을 때 단죄 스킬을 남발했다면 우린 진즉에 전멸하지 않았을까.
드라시온이었을 때의 그녀는 도리어 힘이 봉인 된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아니, ‘그녀’라고 칭하는 건 좀 아닌가.
그리드가 사리엘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작고 갸름한 얼굴과 도톰하고 붉은 입술, 크고 깊은 눈동자, 길고 풍성한 속눈썹....
‘어딜 봐도 여자긴 한데.’
그리드의 시선이 급기야 사리엘의 가슴에 고정됐다. 투명하고 얇은 천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사리엘의 입장에선 수치심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하지만 천사는 감정이 없다. 타락천사인 사리엘은 그나마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지만 그나마도 인간과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수치심을 느끼기는커녕 온화한 미소를 그린 사리엘이 나긋나긋 입을 열었다.
“보기 불편하시면 가슴을 평평하게 바꿀까요?”
육신을 남성체로 바꾸겠다는 뜻이었다.
그리드가 냉큼 고개를 저으려는데 지슈카와 유라가 동시에 소리쳤다.
“응! 바꿔!”
“네! 바꿔요!”
“....”
***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탈피합니다.]
[짙은 사기와 마기가 새로운 육신과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
[종족이 악마로 변경됩니다.]
[능력치가 변경되고 신규 능력치가 추가됩니다.]
[새로운 마법과 스킬들이 개방됩니다.]
[지옥 군주가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아모락트가 로제에게 인간을 도와 드라시온을 토벌하라는 신탁을 내렸던 이유는 신들의 본성이 만천하에 공개되길 바라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은 이뤄졌다.
비록 로제는 아무런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신탁을 완수한 셈이 됐고, 꿈에 그리던 진화(進化)를 맞이했다.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를 초월하는 경지에 등극한 것이다.
본래라면 기쁨을 만끽해야할 순간이었다.
하지만 로제는 전혀 만족하지 못했고 그러므로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드는 신(神)이 되지 않았는가.
그와 비교하면 악마가 된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질투와 초조함에 휩싸인 로제가 아모락트를 재촉했다.
“지금 당장 저 자를 죽여야 하는 거 아닌가요? 천사도 아니고 반신도 아니고 신이에요, 신! 인간 따위가 신이 됐다고요!! 이대론 엄청난 후환이 될 거예요!!”
로제에게 그리드는 천적이다.
그리드가 강해질 때마다 그녀의 명줄이 줄어든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 심지어 신이 된 것이다.
두렵고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아모락트가 진정시켰다.
-본디 인신(人神)은 범람하는 법이다.
인간을 신격화하는 일은 흔하게 이뤄진다.
뛰어나게 강한 사람을 보면 무적이라고 칭송하고 뛰어나게 지혜로운 사람을 보면 모르는 게 없다며 존경한다.
예사롭게 발생하는 오류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인간은 무적일 수가 없다. 평생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도 아직 모르는 게 많다.
-대표적인 예가 뮐러지.
수백 년이 지나도록 불멸하는 뮐러의 설화들은 이미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설 속 뮐러는 패배를 모르는 무적이며, 모든 면에서 훌륭한 성인이다. 어떤 간계에도 넘어가지 않는 지혜와 어떤 유혹에도 빠지지 않는 선함을 지닌 존재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하며 완벽한 존재로 그려진다는 뜻이다.
-인간들은 늘 그랬다. 뮐러를 비롯한 수많은 위인들의 능력을 과장하고, 업적을 미화시키며 신격화시켰지. 그리드라는 저 아이도 그런 식으로 탄생한 인신에 불과한 것이다. 끝내 진짜 신격에는 도달하지 못할 가짜 신 말이다. 하니 너무 경계할 필요 없다.
설령 모든 인간들이 그리드를 신이라 칭송하게 될지언정 그리드는 진짜 신이 될 수 없다.
신이라는 지위를 얻을 순 있어도 종 자체가 신이 되는 건 아니니까.
태생이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다.
신이라는 존재가 단지 인간의 믿음과 염원만으로 탄생하는 것이었다면 여태껏 존재했던 인신들은 모두 소멸하지 않고 신이 됐을 테지. 동대륙의 양반들도 마찬가지다.
-인간에서 탈피한 그대가 인신 위에 서리라.
예언하듯 단언한 아모락트가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이제부턴 그곳이 로제의 새로운 무대였다.
‘내가 그리드를 넘어설 거라고?’
두근, 두근.
로제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환희 웃으며 지옥문을 넘는 그녀는 아모락트의 호의에 속아 망각하고 있었다.
아모락트의 이명은 분쟁의 대악마.
놈에게 선의란 없다. 놈은 다만 끊임없는 싸움을 부추길 뿐이다.
-범람했던 인신 중에 사자를 거느린 인신은 없었지만 말이지....
로제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은 아모락트의 의식 파편이 혼잣말을 남기고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