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4권 - 02화
[신을 위해서 싸우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에게 신이란 세상 모든 것보다 존엄한 존재였다.]
[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새하얀 불꽃에 자신의 생명을 불태우며, 소녀는 그것이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배웠기에 믿는 수밖에 없었다.]
[믿으므로 모진 고통을 감내했다.]
[꺼져가는 생명을 느끼고 두려움에 흐느끼면서도, 소녀는 신을 의심치 않았다.]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그를 만나기 전까진.]
[새하얀 불꽃을 잠재우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소녀는 비로소 신을 알았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몰랐던 희망을 품으며, 사람들이 말했던 신의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는, 소녀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
“....”
죽어가는 이사벨을 살리기 위해 여신의 성수를 바치고 리파엘의 창을 봉인했었지....
서사시의 내용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해본 그리드가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이사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건강한 혈색이 보기 좋다.
모진 고통과 슬픔에 떨었던 가여운 소녀는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현재를 선물해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한 그리드는 어떤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떨쳐냈다.
신이라니.
말도 안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자리다.
애써 책임을 외면하는 그리드의 곁으로 한속봉과 수애 부녀가 다가왔다. 그들의 뒤에는 주작단을 비롯한 동대륙 출신의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치열한 전쟁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그들은 매우 초췌한 상태였다. 수애의 아름다운 얼굴엔 지독한 화상이 번져있었고 어떤 젊은 무사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하나 같이 강건했다.
[신에게 복종했던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신이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믿었다.]
[그렇게 배웠기에 믿는 수밖에 없었다.]
[믿으므로 모멸을 견뎌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고자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신들을, 그들은 감히 비난하지도, 의심하지도 못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어서 상처부터 치료하지 않고 뭣들 해?”
서사시는 그리드에게 가장 중요한 시스템 중 하나다.
매일 서사시만 기다린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상처 입은 동료들을 외면하면서까지 서사시에 집중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 무사를 부축하고 수애의 얼굴에 물약을 뿌린 그리드가 세희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전하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가 단지 신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가 아닐까 의심했어요.”
수애가 고백했다.
주작궁이 사라졌던 날 느꼈던 절망을 그녀는 생생히 기억한다.
양반들에게 어떤 비난과 처벌을 받게 될지 근심하며 온종일 두려움에 떨었더랬지.
그리드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가람에 의해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됐을 때는 순순히 삶을 포기했었다.
[신의 의지가 만든 철창을 베어내는 그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은 비로소 신을 알았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잃었던 존엄을 되찾으며, 신의 구원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는, 백성들의 새로운 신이 되었다.]
주작궁 제작자의 행방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채 사형 집행일을 기다렸던 한속봉 부녀.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동대륙의 수많은 사람들이 양반의 횡포에 시달렸었다.
그리드를 믿고 따랐던 대장장이들도 결국 양반의 손에 죽고 말았다.
“....”
서사시의 내용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해본 그리드가 수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끔찍한 화상이 그녀의 미모를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보다 아름다웠던 시절의 그녀보다 지금의 그녀가 훨씬 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서사시가 이어졌다.
[신을 잃은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신이란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가짜 신들의 폭력에 짓밟히면서도 그들이 끝내 옛 신의 땅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신을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면서도 그들이 옛 신의 땅을 버리지 못했던 이유는 어둠에 갇힌 신들이 영영 잊힐까 근심해서였다.]
[그는, 그들의 신이 되어주었다.]
[가짜 신을 징벌하고 옛 신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은 한 줌의 땅을 지켜냈다.]
[차라리 내가 신이 되겠노라 선언했다.]
“....”
그때의 선언은 홧김에 한 행동이다.
더러운 양반들이 자꾸만 신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배알이 꼴려 ‘너희가 신이 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되는 게 낫겠다.’라는 느낌으로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와 그걸 설명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애초에 이번 서사시는 그때의 외침과 관계가 없다. 서사시가 그리드를 신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그리드의 선언에 호응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바람에 호응해서였으니까.
[그는 이미 누군가의 신이다.]
....
...
[템빨왕 그리드가 서사의 열 번째 페이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새로운 신화가 태동합니다.]
신화.
전설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전설이 영원히 전승될 기록이라면, 신화란 영원히 전승될 믿음이다.
물론 그리드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은 아직 미약했다.
신들의 실체를 알고 실망했다는 이유로 마냥 그리드를 신격화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고, 그리드의 힘을 목도하거나 그리드의 구원을 직접 체험했던 사람들만이 그리드에게 신앙을 품었다.
이번 전쟁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 정도가 그리드에게 신앙을 품었다는 뜻이다.
물론 플레이어는 제외다.
플레이어의 믿음마저 신의 탄생에 기여한다면, Satisfy에는 이미 수많은 신이 범람했을 것이다. 돈과 명성만 있으면 누구라도 신이 될 수 있었을 테지.
[누군가가 당신을 인신(人神)이라고 칭송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덕신(德神)이라고 칭송합니다.]
[누군가가 당신을 무신(武神)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리드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그리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인신이라 하였으며, 누군가는 그리드의 인덕에 주목하여 덕신이라 하였다. 그리드의 무력에 매료된 누군가는 무신, 그리드의 기술에 매료된 누군가는 대장장이의 신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당신을 템빨신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리드를 템빨신이라고 칭했다.
그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이명이 템빨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지?’
불안을 느낀 그리드가 부정해보려 했으나.
[지금부터 템빨신의 신화가 시작됩니다!]
그리드의 신명(神名)은 그리드의 의지와 관계없이 정해지고 말았다.
“푸웃!”
긴 전투에 지친 몸을 달래고자 물을 마시던 플레이어들이 월드 메시지를 보고 놀라 물을 토한다.
“아.... 아아....”
라우엘은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왜 ‘갓리드’가 아니냐며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드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그리드
레벨:441
직업:파그마의 후예, 지공, 서사시의 마검사
칭호:전설이 된 자 외 44개
평범하다.
남들보다 직업이 1~2개 더 많다는 점과 칭호가 2~3배 더 많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플레이어의 상태창과 비교해서 큰 차이점이 없다.
다만 지위 카테고리에서 ‘국왕’ 옆에 새롭게 추가 된 항목이 범상치 않았다.
지위:템빨신
유일한 존재입니다.
명백히 신으로 분류되나, 아직 신격이 낮은 탓에 불사를 누리거나 신의 권능을 발휘하진 못합니다.
*신격을 높이기 위해선 종교를 만들고 신도를 모아야합니다.
“....흠.”
신이라는 건 종족이 아니라 지위로 분류되는 건가?
아니, 반신(半神)은 명백히 종족이었다. 신으로 진화할 수 있는 종족.
‘근데 나는 종족은 인간이고 지위는 신....’
종족 자체가 신인 것하고 지위가 신인 것하곤 어떤 점이 다른 거지?
‘뭐 차차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고 이거 정말 환장하겠네.’
그리드가 신이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단 하나다.
신들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아서였다.
실제로 그리드가 신이 되자마자 템빨국 전역에서 재앙이 시작됐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지금이라도 당장 신을 때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건 때려 치고 싶다고 해서 때려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템빨신을 뵙습니다.”
“조용히 해.”
웃음을 참으며 템빨신을 연호하는 동료들에게 핀잔을 준 그리드가 새롭게 활성화된 시스템들을 살펴보았다.
신도들에게 신탁을 내리고 신의 사자를 임명할 수 있는 등 여러 가지 기능이 활성화돼 있었다.
이렇게 보니 신이 된 것이 실감이 났다.
당장 느껴지는 능력치의 변화는 없었지만 말이다.
“제게 템빨신님을 섬길 자격이 있을까요?”
머뭇거리고 있던 사리엘이 용기를 쥐어짜 묻는다.
아니, 당신은 진짜 천사잖아....
진짜 천사를 거느리고 다니다간 빼도 박도 못하고 스스로를 신이라고 인정하는 꼴이 되는데 과연 옳은 일일까?
신들과의 관계를 절대 수복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신살자의 탄생을 바랐던.
내가 초월자로 남기를 바랐던 치우의 바람도 걸린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그리드의 곁으로 적야의 대도가 다가왔다.
“그대에게 어떤 선물을 받을지 결정했다.”
“말씀하십시오.”
적야의 대도는 본래 엄밀히 따지면 적이었다.
하지만 드라시온을 토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협력한 것이다.
적야의 대도를 회유하기 위해 그리드가 내건 조건은 대도가 원하는 선물을 무엇이든 준다는 것이었고.
만약 탈수나 갓 핸드를 달라고 하면 어쩌지....
긴장한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이번 레이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던 건 적야의 대도의 활약 덕분이기도 했기에 그리드에겐 대도의 부탁을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마냥 긴장한 채 대도의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에게 대도가 손을 내밀었다.
“그 검을 주게.”
“네.”
손에 쥐고 있던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긴 그리드가 열망의 무아검을 꺼내서 대도에게 건넸다.
당연히 대도는 열망의 무아검을 받지 않았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그리드가 이번에는 염룡검을 꺼내서 건넸지만 대도는 이 또한 받지 않았다.
“그 소.검. 말일세.”
“....저기, 대도님. 이 소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리드가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헥세타이와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부터 시작해 헥세타이아가 이 소검을 지상에 내린 대가로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까지 모든 내용을 대도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알았으니까 내놓게. 다만 신이 직접 만든 신물이라는 점을 참작해 조건을 걸지.”
적야의 대도에게는 충분한 무력과 실력이 있다. 이렇게 굳이 말로할 것도 없이 그리드의 손에서 소검을 훔쳐가는 건 힘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소검을 강제로 빼앗지 않고 좋게 말로 해결하려는 이유는 그리드와 굳이 척을 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나 또한 자네에게 선물을 주겠네. 다만 내가 어떤 보물들을 갖고 있는지 자네는 전혀 모를 테니까 불공평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건 내가 자네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일세. 그리고 만약 자네가 헥세타이아 신을 돕기 위해 천상으로 향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 이 소검을 임시로 대여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선물로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주십시오.”
“....응?”
대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귀를 의심하며,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마음 깊이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