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22화
-태초의 레베카는 일곱 천사를 빚어 자신을 돕도록 하였다.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
로제와 야탄교 신도들에게 드라시온을 토벌하라는 신탁을 내린 그녀는 로제에게 꽤 큰 호감이 있는 눈치였다.
이번 임무만 무사히 완수하면 악마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모자라 의식의 일부를 로제의 여정에 동행시켰다. 그러면서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쥬다르와 도미니언, 제라툴과 에루아스, 헥세타이아와 질런.... 현존하는 신들 또한 레베카와 일곱 대천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결과물이란다.
‘레베카는 이미 천사라는 걸작을 만들었으면서 왜 굳이 또 다른 신들을 만든 거죠?’
-신격을 유지하기 위해선 인간들에게 그들의 염원을 이뤄줄 존재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낀 게 아닐까 싶구나. 천사는 레베카에게 필요한 도구일 뿐, 인간들이 바라는 이상향과는 거리가 머니까 말이다.
레베카는 사랑과 미래를, 쥬다르는 지혜와 건강을, 제라툴은 힘을, 도미니언은 승리를, 헥세타이아는 기술을, 질런은 평화를.
이미 많은 신들이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겠노라 약속했고 그 대가로 기도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로도 인간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킨다는 게 불가능했다.
지상에 범람하는 신들이 바로 증거다.
인간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토착신들 말이다.
인간의 바람은 너무나도 다양했고, 그들의 바람이 담긴 기도에 호응하여 탄생한 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만약 레베카가 다른 신들을 만들지 않고 유일신을 꿈꿨다면 그녀의 신격은 지금보다 훨씬 더 약했을 것이다.
천상의 신들을 향하는 기도는 결국 레베카를 찬탄하는 기도로 통하는 반면 지상의 신들을 향하는 기도는 레베카와 관계없는 것이었기 때문.
‘그렇군요....’
아모락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로제가 의문에 휩싸였다.
대천사와 신들의 탄생 신화가 왜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 영문 모를 노릇이었다.
얼마나 더 길을 걸었을까.
로제와 야탄교 신도들이 드디어 전쟁터에 도착했을 무렵, 잠시 잠들었던 아모락트의 의식이 다시금 깨어나 입을 열었다.
-그리고 드라시온은 레베카가 빚은 천사 중 하나였단다.
‘네?’
그 흉측한 악마가.
무려 제11위의 대악마가 천사였다고?
-가장 고결한 천사였다. 인간들의 기도에 담긴 감정과 욕망에 오염되어 일곱 개의 죄를 범한 신들을 비난하기 전까진.
‘설마 신들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악마로 타락한 건가요?’
-칠악성이 반기를 들었던 시점이니만큼 레베카는 두려웠을 것이다. 오직 자신을 위해 만든 강력한 도구가 칠악성의 편에 서게 되면 천상의 모든 신들이 토벌당하고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드라시온의 진짜 이름은 사리엘. 죄의 길로 유혹당하는 인간들의 영혼을 지켰던 천....
번쩍━!
“....!?”
사리엘.
인간이 잘못을 범하지 않게끔 감시하고 다스리는 역할을 맡았던 가장 고결한 천사.
감시의 시선을 신에게 돌린 죄로 천상에서 쫓겨나 지옥으로 추락한 죄악.
지금은 악마로 존재한다지만 언제 다시 변모할지 모를 그를 아모락트가 경계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듯하다.
생각하며 이야기를 경청하던 로제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붉었던 하늘이 갑자기 백광에 휩싸인다 싶더니 너무나도 찬란한 빛이 그녀의 시야를 괴롭힌 까닭이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 또한 짙어지는 법. 천상의 신들이 또 다시 더러운 짓을 범하려나 보구나.
아모락트의 탄식이 들려왔고,
“으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야탄교 신도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비명을 지르기는 로제도 마찬가지였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살과 뼈가 타들어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로제를 엄습했다.
[아모락트와의 계약이 당신의 죽음을 늦춥니다.]
“으, 으윽....”
죽음에 도달하는 피해를 입을지라도 살아남게 해주는 스킬.
아모락트와의 계약에 의거해서 얻은 ‘언데드화’ 스킬 덕분에 살아남은 로제가 떨리는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산처럼 거대했던 대악마 드라시온도, 드라시온을 에워싼 채 함성과 비명을 내지르던 수만 명의 병사들도 모두 흔적도 없이 소멸한 상태였다.
거짓말처럼 고요해진 전장에 존재하는 사람은 오직 로제뿐이었다.
아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흠칫 놀란 로제가 시선을 올려보자 눈부셔 똑바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밝은 휘광에 휩싸인 두 명의 천사가 보였다.
로제는 알 수 있었다.
저 두 명의 천사가 전장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는 사실을.
그만큼 강력한 기운을 발산하는 존재들이었다.
“대천사....”
라구엘과 우미엘.
천사들의 찬란한 이름을 시야에 담고 벌벌 떠는 로제의 귓가에 아모락트의 탄식이 들려왔다.
-저놈들.... 사리엘을 한 순간 천사로 인정하여 삼위일체를 이뤘구나.
천상 즉, 아스가르드의 천사들과 신들은 셋이여야만 비로소 완전한 조화를 이루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대악마가 지상에 함부로 올라올 수 없듯이 천사와 신들 또한 함부로 지상에 내려올 수 없다.
만약 셋 이상의 천사와 신이 지상에 내려올 경우 지상은 그 신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혼돈에 빠질 것이다.
아모락트가 드라시온을 한시 빨리 토벌해야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다.
아모락트는 작금의 상황을 예측했다.
단 두 명의 천사가 내려와 드라시온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고 그 힘으로 드라시온을 멸망시키는 상황을 말이다.
아모락트 입장에선 아쉬운 일이었다.
-아쉽군.... 인간들에게 드라시온의 실체가 알려져야만 신들의 본성이 전파되고 천상의 위신이 추락했을 텐데.
드라시온은 반드시 인간의 손에 토벌됐어야한다.
놈의 새하얀 영혼을 세상 전부가 목도했어야했다.
하지만 이 순간 존재하는 목격자는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아모락트와 로제 단 둘뿐이었으니 아쉬움이 크다.
아모락트가 입맛을 다시는 그때였다.
스륵.
모든 것이 소멸해 잿더미로 변한 전장 한복판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허리 굽은 노인이었다.
하늘 위 천사들과 로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노인이 보자기를 꺼내 펼치자 수백 아니,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현장을 가득 채우며 나타난 까닭이었다.
그들 모두가 목격했다.
쩌적. 쩌저적.
죽어가는 드라시온의 거죽에 발생한 균열 사이로 드러나는 투명한 피부와 금안과 금발.
그리고 순백의 날개를 말이다.
“나는....”
울컥.
입과 코에서 붉은 피를 쏟으며 드라시온이 뭔가를 말하려했다.
“나는 사리....”
“닥치세요!!”
하늘 위 천사들이 얼굴을 종잇장처럼 일그러뜨렸다.
천사와는 거리가 먼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드라시온에게 창을 겨눈 채 다급히 하강하는 놈들의 앞길을 그리드가 가로막았다.
“잠재력 개방. 용(龍).”
[파그마의 검무 <용(龍)>이 일시적으로 그리드의 검무로 진화합니다.]
“감히 천사의 앞길을 가로막는 겁니까!!”
천사들이 콧방귀 뀌었다.
일갈하며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삼위일체를 이루면 수만 명의 인간을 몰살시킬 수 있는 신력을 자랑하는 천사들이다.
개인의 힘으로도 한 명의 인간쯤은 손쉽게 해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천사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천사 위의 신들보다 더 높은 곳에 도달해있는 유일신 치우에게 인정받은 인물.
천사와 비교해서 결코 꿀리지 않는 인간이었다.
“용회극(龍回極).”
까가가가가가가가가강!!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기세로 날아오른 그리드가 천사들의 창을 검으로 휘감아 돌리자 날카로운 창날이 천사들의 가슴을 찔렀고, 당황하는 천사들의 머리 위까지 도달한 그리드가 회전하며 내리친 검격엔 어깨를 베였다.
주춤거리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그리드가 이번엔 하강했다.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
“....!”
“....!”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백광을 발하던 천사들의 두 눈이 뒤집혔다.
용의 이빨에 물리고, 뚫리고, 베이듯 전신을 난도질당한 놈들이 급기야 지상까지 추락해 처박혔다.
“허억.... 허억....”
천사들은 죽지 않았다.
하지만 큰 상처를 입은 탓에 잠시 움직이지 못했고 그리드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무저갱에 쓸쓸히 존재했던 정체모를 악마와 대면했을 때처럼 두 눈에 슬픈 동정을 품은 그가 드라시온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붉게 충혈 됐던 악마의 눈은 이제 없다.
다른 천사들의 눈처럼 금색으로 빛나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리엘의 커다란 눈동자가 눈물로 일렁거렸다.
“사리엘.... 대천사 사리엘....”
주륵.
급기야 사리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에게 죄를 물었다는 이유로 기억을 잃고 지옥으로 추방당했던 그녀는 드라시온으로 존재했던 시절 동안 자신이 범해온 모든 죄를 기억하고 있었다.
“신들의 죄를 밝히지 못하고, 일곱 선인을 돕지 못하고, 인간들을 해쳐온 나를.... 나를 인간인 그대가 벌해주세요.”
촤르르르르르륵!!
그리드를 비롯한 전장의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인간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천사시절 사리엘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울부짖는 사리엘을 지옥으로 떠미는 제라툴의 모습과 그를 방관하는 다른 신들의 모습이 하나도 빠짐없이 인간들의 뇌리에 새겨졌다.
마침 몸을 일으킨 라구엘과 우미엘이 그리드를 비롯한 인간들의 면면을 샅샅이 훑었다.
서슬처럼 퍼런 눈빛이 모두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리드 또한 위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대들 또한 죄인이 되었군요.”
“그대들의 영혼까지 소멸시키겠습니다.”
선언하는 라구엘과 우미엘의 창이 다시 하얗게 백열하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히 적야의 대도에게 향했고, 숨을 헐떡이고 있던 대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노인네를 얼마나 혹사시키려고.... 두 번은 무리일세.”
결국.
“너희들이라도 피해라.”
브라함이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저주에서 해방된 템빨단원들을 가두고 있던 얼음을 깨뜨리며 급히 마력을 수복한 그가 홀로 두 명의 천사들을 마주보고 섰다.
동시에.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뜬금없는 알림창이 그리드의 시야에 떠올랐고,
쿠오오오오오오오!!
하늘 저 멀리서부터 굉음이 들려온다 싶더니,
쿠우우우우우웅!!
한 자루의 검이 그리드의 발치에 떨어져 꽂혔다.
그 검의 정체를 그리드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잊을 리 없는 무기였다.
<헥세타이아의 소검>
등급:신화
내구력:무한 공격력:28,990
*공격 속도 80퍼센트 상승.
*물리, 마법 공격력 200퍼센트 상승.
*모든 속성 공격력 200퍼센트 추가.
본인에게 자부심을 갖고 의욕을 품어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었던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가 열심히 제작한 소검입니다.
사용 조건:초월자
무게:1,100
[헥세타이아의 행동에 천상의 신들이 분노합니다!]
[무신 제라툴이 헥세타이아를 영원의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빌어먹을!’
헥세타이아가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그리드가 모를 리 없다.
욕설을 토하며 다급히 검에 손을 뻗는 그에게 천사들이 달려들었다.
“인간! 그 검을 만지지 마세요!”
본래는 더 큰 백광을 모아 전장을 뒤덮어야했을 천사들의 창이 오직 그리드를 노리고 쏘아졌다.
퍼펑!!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학....!”
그리드의 시야가 아찔해진다.
이 순간에도 사리엘을 이용해 삼위일체를 이룬 천사들의 능력치는 그리드가 전혀 감당하지 못할 경지에 올라있었다.
죽음의 경계에서,
[<헥세타이아의 소검>을 장착하였습니다.]
“....살(殺).”
푸우우우욱!!
그리드가 간신히 내지른 소검이 섬전 같이 뻗어나가 라구엘의 심장을 꿰뚫었다.
“으악....!”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라구엘은 자신의 죽음을 의심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우미엘은 황급히 날개를 펼쳐서 하늘로 도망쳤다.
‘뭐 이딴 전개가....’
천사를 죽이다니.
대악마를 레이드하려다가 황당한 종지부를 찍게 된 그리드가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어마어마한 보상 내역이 시야에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그는 이 순간이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헥세타이아의 소검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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