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21화
데미안은 교황이기에 앞서서 여신의 대행자다.
절대신 레베카에게 선택 받은 인간인 것이다.
그의 심장을,
푸욱!
목을,
서걱!
레베카의 심복인 천사들이 찌르고, 베는 광경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데미안의 얼굴에도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데미안!!”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다가 잿빛으로 산화하는 데미안.
그를 붙잡고자 뻗었던 손을 허망하게 되돌린 그리드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드라시온을 돕는 건 제라툴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천상계 전체의 뜻이었나?”
천사는 빛의 여신 레베카의 창조물이며 천국의 합법적인 백성다.
제라툴의 사병인 무신의 추종자들과는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행동은 특정 개인이 아닌 천상계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황금을 박아놓은 듯한 눈동자.
일견하기엔 아름답고 찬란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감정하고 차갑다. 온갖 욕망에 찌든 악마들의 눈동자가 차라리 더 인간적으로 느껴질 지경.
오싹....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천사들의 눈빛을 마주한 그리드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나는 그때였다.
“천상의 일에 의문을 품지 말라. 의문은 의심이라는 독으로 변질되어 이단을 믿는 계기가 될지니.”
천사 하나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놀라운 사실은, 저 헛소리가 실제로 성서에 기록 된 신의 말씀이라는 점이었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대악마와 싸우는 인간들을 훼방 놓았고 너희들 천사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나선 데미안을 살해했다. 내 의심은 합리적인 것일 텐데?”
“신들께서는 인류를 자애로 보살펴오셨습니다. 그대들이 여전히 살아있음이 그 증거지요. 한데 의심이라니, 죄악입니다.”
“너희들이 드라시온을 돕는 것도 전부 인류를 위해서다?”
“그대들을 훼방 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악마를 도운 게 되는 겁니까? 정말이지 편협하고 어리석군요. 아니면 우리를 깎아내리려는 이단이거나.”
“그럼 너희들은 드라시온을 돕고 있는 게 아니다?”
그리드는 대화를 길게 이끌어나갈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지금은 전쟁 중이다.
이 순간에도 드라시온은 미쳐 날뛰고 있었고 템빨단원들이 사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의 비명이 사방 천지에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그럼 너희들과 우리가 손을 잡고 함께 드라시온을 조지면 되는 거겠지? 악마를 징벌하는 건 지상과 천상의 당연한 의무잖아. 안 그래?”
그리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두루뭉술하게 지껄이는 천사들이 급기야 궤변을 늘어놓지 못하게끔 대화를 주도하는 것이었다.
“....”
“....”
천사들이 침묵했다.
등장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인을 저지를 때도, 그리드와 대화를 나눌 때도 무표정했던 그들의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났다.
눈썹이 아주 조금 흔들리는 수준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그리드의 통찰력은 속이지 못했다.
세상에 그리드보다 통찰력 스탯이 높은 사람도 드물었으니.
이 새끼들이 곧 개소리를 지껄이겠구나, 그리드가 예상하는 순간이었다.
“악마를 징벌하는 건 우리의 의무입니다. 당신들은 물러나주세요.”
“여태껏 다른 악마들은 우리들 인간이 토벌했잖아?”
“당신들에게도 악마를 징벌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말했다시피 우리에겐 의무입니다.”
“다른 악마들을 토벌할 땐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 와서? 혹시 드라시온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건가?”
“당신도 아실 텐데요? 드라시온은 여태껏 당신들이 징벌했던 악마들보다 강력한 힘을 지녔습니다. 당신들의 힘만으로 드라시온을 징벌하기엔 너무 큰 피해를 입을 테니 저희가 나서는 게 옳은 거고요.”
“그런 이유로 데미안을 죽였다?”
“대화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는군요.”
“뭐가 달라져? 같은 맥락인데. 너희가 데미안을 죽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천상의 뜻을 거슬렀다느니 뭐니 하던데, 지금 좀 대화를 나눠보니까 데미안이 드라시온 토벌에 참전한 게 싫어서 그랬던 것 같네. 맞잖아?”
“이유야 어찌됐든 당신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죠.”
“그래? 말투가 꼭 데미안을 죽인 이유는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
“....”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진짜군. 차라리 다행이야. 우리가 이대로 드라시온 토벌을 진행한다고 해서 너희에게 뒤통수 맞고 죽을 일은 없을 테니.”
“.....”
결벽증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깔끔하게 정돈 된 천사들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리드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손해만 입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눈빛을 교환한 그들이 지상을 굽어보았다.
썩은 대지 위에 산처럼 쌓여가는 죽음, 강처럼 흐르는 핏물, 증오, 저주, 악취....
지옥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상의 풍경을 감흥 없이 살핀 끝에 레베카교의 성직자들을 찾아낸 그들이 차례대로 외쳤다.
“빛의 여신을 섬기는 형제들이여.”
“미약한 힘으로 거악과 맞서 싸우겠노라 나서 지상을 죽음과 원한으로 뒤덮은 어리석고 가여운 인간들을 전장 밖으로 인도하세요.”
이만 빠지라는 뜻이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왜 굳이 전쟁에 끼어들어 개죽음이나 당하냐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
성서에 따르면 천사는 순수한 존재다.
인간과 달리 ‘감정’에 오염되지 않는 그들은 악의를 모르는 절대선이라고 성서는 말해왔고 레베카교의 성직자들은 그 말씀을 믿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직자들은 천사의 살인을 목격했다.
빛의 여신 레베카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순교의 길을 걸어온 교황 데미안을 해치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의문을 품게 됐다.
감정을 모르므로 선이다, 라는 논리가 과연 옳은가?
감정을 모르는 이들이 과연 자애를 베풀 수 있을까?
의문은 의심이라는 독으로 변질되어 이단을 믿는 계기가 될지니....
신의 말씀이 성직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성직자들은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이 순간 품은 의심이 빛의 여신을 향한 믿음을 흔들리게 만들고 있음을.
“아아, 신이시여.”
의심해선 안 된다.
믿음이 흔들려선 이단에 빠지고야 말 것이다.
겁먹은 성직자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15명의 성직자들은 달랐다.
유독 화려한 예복을 갖춰 입은 그들은, 레베카교를 지탱해온 15인의 장로는 의심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천사들을 올려보았다.
“의심은 독이 아니오.”
전쟁의 소음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끔, 목에 핏대를 세운 장로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장의 모든 성직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기를 바라는 듯했다.
“여신의 뜻을 빙자하여 온갖 타락을 저지른 전 교황 드레비고를 의심하지 않고 믿었던 선배들의 과오를 우리는 똑똑히 목도하였소.”
“우리는 그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요. 의심함으로써 죄를 멀리할 것이오.”
“천사들이여! 교황의 목을 벤 그들의 행동이 정녕 여신의 뜻이란 말이오!!”
“신께서 의심하지 말라 하셨거늘 의심하겠다라. 그대들이 바로 이단이로군요.”
츠캉!
천사들이 데미안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었던 창을 곧추세웠다.
투명한 창날이 붉은 월광에 물든 모습은 이제 곧 장로들이 흘릴 피를 암시하는 듯해서 섬뜩했다.
무릎 꿇은 채 기도하던 성직자들이 애써 떨쳐냈던 의심을 재차 품기 시작했다.
천사란 신의 사자.
마냥 사랑하며 숭배해온 대상이다.
한데 이제 와서 두려워해야하는 이유가 뭘까.
그들에게 두려움을 품어야만 하는 이 상황 자체가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동안의 신앙을 부정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펄럭.
천사들이 날개를 펼쳤다.
순백의 깃털이 천천히 지상으로 떨어진다.
순간.
“....!!”
입으로 저주를 읊으며 거대한 양팔을 휘둘러 학살극을 벌이던 드라시온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관자놀이로 직격해오는 크리스의 천톤 검에 적중당해 휘청,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면서도 놈의 시선은 허공에 흩날리는 깃털에 고정돼 있었다.
“하얀.... 날개....”
출처 모를 기억 속에 존재했던 자신의 날개도 흰색이었다.
어둡고 불길한 지금의 날개와 달리 아름답고 고귀한 날개였다.
“나는....! 나느은!!”
인간들의 피와 살점을 거죽처럼 뒤집어쓴 흉측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드라시온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놈이 마구 흩뿌리는 검은 깃털들이 수천 마리의 괴조로 변해 까악까악 울었다.
혼란에 빠진 드라시온의 영향으로 그의 피조물이라 할 수 있는 괴조들도 갈팡질팡 못하는 눈치였다.
천사들의 표정에 처음으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초조함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신께 비노니.”
“저에게 힘을 빌려주소서.”
짧은 기도와 함께.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붉은 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면서 천사들의 창이 백열했다.
하얗게, 하얗게, 하얗게....
점차 더 강한 빛을 내뿜는 두 자루 창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지만 그건 축복과 거리가 멀었다.
너무 눈이 부신 나머지 사람들은 도리어 하늘을 올려보지 못하게 됐다.
“이단을 징벌하겠습니다.”
모든 인간이 고개를 떨궜음을 확인한 천사들이 창을 크게 휘둘렀다.
풍압에 흩날리는 그들의 머리카락은 금빛을 잃고 하얗게 새어있었다.
백화의 영향이다.
레베카의 딸들이 그렇듯, 천사들 또한 백화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의 수명은 무한하므로 부작용이 없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거대하고 난폭한 백색의 섬광이 전장 전체를 뒤덮었다.
천사들의 표적은 드라시온이 아닌 지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인 것이다.
‘저 개새끼들!’
도대체 무엇을 감추고 싶은 거지?
뭐 때문에 목격자들을 말살하려는 걸까.
천사들의 행태에 치를 떤 그리드가 <이십만대군 분쇄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천사들의 공격을 소멸시킬 작정이었다.
물론 대가는 크겠지만.... 후폭풍을 감당 못하고 죽을 확률이 높았지만 수만 명의 아군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꿀 수 있다면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다음엔 나의 힘이 되어줄 테니까.’
꽈드득!!
단 한 번의 참격을 위한 준비.
한껏 팽창한 근육이 뒤틀리며 그리드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으나 그리드는 멈추지 않았다.
“이십만대군.”
다음을 생각하자.
죽은 다음 곧장 다시 달려와서 우선 저 미친 천사들을 없애고 이 지긋지긋한 드라시온 레이드를 마무리하자....
“분쇄....”
계획하며 스킬을 발동시키려던 그리드의 행동이 멈췄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초월경이 발동한 까닭.
멈춘 세상 속에서, 그리드는 자신이 초월경에 돌입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됐다.
적야의 대도.
전쟁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가 전장을 질주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며 거대한 보자기를 펼쳤다.
처음에는 크루제가 남긴 기물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보자기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적야의 대도의 심상.
세상 모든 것을 반드시 훔치고야 말겠다는 대도의 의지가 빚어낸 심상이었다.
“나라 훔치기.”
촤르르르르르르르륵!!
제국과 템빨국의 병사들과 기사들, 혼란에 빠진 성직자들, 얼음에 갇힌 템빨단원들과 그들을 감싼 얼음이 깨지지 않게끔 집중 중인 브라함, 황제 바사라와 그녀의 곁에 선 공작들....
전장의 모든 사람들이 적야의 대도의 심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중에는 그리드도 포함돼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천사들이 떨어뜨린 백색 섬광이 전장과 충돌을 일으킨 시점에 그곳에 남은 존재는 대악마 드라시온과....
“꺄아아아아아악!!”
“크아아아아아악!!”
때마침 전장에 도착한 로제, 그리고 야탄교 신도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