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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54화 (1,244/1,794)

템빨 63권 - 20화

‘흡기공이 독이 될 수도 있구나.’

궁극의 무공 중 하나.

타인의 기(氣)를 빼앗는 이정의 무공에 카일은 지독한 무력감을 맛봤었다.

뇌전을 빼앗기고 처참히 짓밟히면서, 이정이야말로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임을 깨달았다. 브라함과 이정이 싸우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한데 그런 이정을 그리드가 쓰러뜨린 것이다.

둠의 영향을 받아 언데드가 된 이정에게 성스러운 불꽃을 강제로 흡기시켜 죽음으로 인도한 그리드의 판단력에 카일은 감탄하고 전율했다.

둠이 없었어도 그리드가 이정을 이겼을까, 하는 일차원적인 의문은 품지 않았다.

이곳은 수천, 수만의 의도가 교차하는 전장.

변수야 끊임없이 발생한다.

그중 치명적인 변수에 즉각 대응해 승리를 거머쥔 그리드가 이정보다 한 수 위의 실력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쿨럭....”

쇠사슬에 엮여 날아온 낫에 등을 찍힌 카일이 입에서 피를 토한다. 순백으로 염색한 비단 의복이 완전히 붉게 물들었을 정도로 그의 몸 곳곳엔 깊은 상처가 새겨진 상태였다.

이정과 싸운 직후 혼자서 27인의 무신의 추종자를 상대하는 건 그에게도 벅찬 일이었다. 아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대로는 죽는다.’

자신은 이미 할만큼 했다.

그리드가 이정에게 집중할 수 있게끔 시간을 벌어주었으니 이젠 활로를 모색할 차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살아날 틈을 찾기 힘들었다.

멀쩡히 살아남은 12명의 무신의 추종자는 카일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카일이 한 발 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12종의 무기가 그를 난도질할 것이었다.

“....”

카일이 집중했다.

이정과의 싸움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꿨던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포기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나를 죽여!!”

지상에서부터 전장을 꿰뚫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름이 카츠였던가.

혈액을 무기로 다루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템빨국의 인사가 그리드에게 간절히 소리치고 있었다.

딱 보니 최악의 상황에 놓인 듯했다.

드라시온의 저주에 당해 꼭두각시가 되어 아군을 학살 중이었다.

애타게 죽음을 바라는 모습이 납득됐다.

그가 내린 피의 비에 꿰뚫린 병사들이 흘린 피가 이룬 웅덩이로부터 탑처럼 거대한 창이 솟아나고 있었다.

저것이 드라시온의 의지에 호응하여 대학살을 일으키는 순간 썩은 대지의 악취를 묻을 정도로 뚜렷한 혈향(血香)이 하늘까지 진동할 것이었다.

“저도 죽여줘요!!”

울먹이는 여인의 외침도 함께 들려왔다.

전장 북쪽에 눈보라를 일으켜 수천 병사를 얼려버린 그녀는 스스로에게 혐오를 품은 눈치였다. 얼음왕국의 마녀라도 된 심정인 듯했다.

“핫....”

살고 싶어 발악하는 모두와 죽고 싶어 절규하는 저들.

상충하는 의지가 빚어내는 혼란이 지옥도가 따로 없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모든 상황을 외면 중인 무신의 추종자들은 감정을 거세당한 괴물 같아 소름 돋았고, 뭐가 그리도 슬픈지 피눈물을 흘리는 드라시온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어 오싹했다.

이곳이 정녕 지상이란 말인가.

혹시 우리는 이미 죽어 지옥에 떨어진 게 아닐까.

의심하는 카일과 병사들을 비롯한 전장의 모든 사람들의 귓가로 무뚝뚝한 음성이 스며들었다.

“프로즌 크리스탈.”

“....!”

카일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전장 북쪽을 지배하고 있는 혹한의 냉기를 한 점으로 끌어 모은 듯한 극한의 냉기가 그의 전신을 뒤덮은 까닭이었다.

쩌저적!!

급기야 결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얼음이 탄생해 그 안에 카일을 가뒀다.

카일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육신의 완전한 봉쇄였다.

‘이게 무슨....!’

멈춘 육신과 달리 의식은 멀쩡히 흘렀다.

두꺼운 얼음 속에서, 카일은 자신에게 온갖 무기를 꽂아 넣는 무신의 추종자들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

안절부절 못하던 카일이 깜짝 놀랐다.

무신의 추종자들 중 어떤 누구도 자신을 가두고 있는 얼음을 꿰뚫지 못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병장기를 위시한 폭발적인 무공들이 전부 하나 같이 얼음에 흡집조차 내지 못했다.

‘아....!’

카일이 드디어 눈치 챘다.

이 얼음은, 나를 지켜주기 위한 마법임을.

그 사실을....

‘브라함?’

‘브라함!’

카일과 마찬가지로 얼음 속에 갇힌 다른 두 명의 사람들도 눈치 채고 있었다.

전장 북쪽의 유페미나와 전장 중심부의 카츠.

얼음 속에 갇힌 두 사람이 손 끝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신세가 되자 그들이 불러일으켰던 눈보라와 피의 비가 모조리 거짓말처럼 멈춰버렸다. 원치 않는 살육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우.....”

혼돈이 멈추고 고요가 내려앉은 전장.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브라함이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날뛰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그리드가 이정과 사투를 벌이고 지상에선 드라시온이 미쳐 날뛰는 동안 브라함도 가만히 있던 건 아니다.

메르세데스의 혜안과 자신의 지식을 결합시켜서 드라시온의 권능을 분석했다.

대상에게 상처를 입히고 저주를 전염시켜서 꼭두각시로 만드는 드라시온의 저주가 짧게는 20초, 길게는 3분가량 유지된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며 생물을 언데드로 취급하는 둠의 지속 시간은 공통적으로 2분 동안 적용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공교롭게도 파훼법은 찾지 못했다.

드라시온의 저주와 둠은 마력으로부터 파생한 마법이 아닌 절대적인 의지로부터 비롯한 힘이었기 때문이다.

격의 차가 어지간히 크지 않은 이상 다른 존재의 심상을 부정하고, 파훼하는 식의 개입은 본래 불가능에 가까운 법.

결국 브라함이 내린 선택은 간단했다.

둠에 대응하는 건 포기한다.

다만 저주에 걸려 미쳐 날뛰는 놈들만큼은 힘으로 억압한다.

바로 이런 식으로.

“프로즌 크리스탈.”

쩌어엉━!

“....!!”

마침 드라시온의 발톱에 베이고 저주에 빠진 반트너와 극검이 유페미나, 카츠, 카일과 마찬가지로 얼음 속에 갇혀버렸다.

“프로즌 크리스탈.”

드라시온에게 마법을 반사 당해 저주에 빠지기 시작한 라엘라와 제드노스도 얼음 속에 갇혀버렸다.

브라함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깨어지지 않는 얼음.

그 어떤 마법도, 물리적인 힘도 이 얼음을 부수지 못한다.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한 것으로 모자라 히드라와 양반들을 토벌하며 신격까지 쌓기 시작한 브라함의 마력은 그만큼 견고했기에.

‘저럴 수가!’

대마법사 리칠리아가 경악했다.

브라함이 보여준 프로즌 크리스탈의 활용법이 기상천외해서가 아니다.

대상을 얼리는 프로즌 크리스탈의 활용법은 본래부터 다양했다. 적을 제압하는 용도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아군을 지키는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프로즌 크리스탈이 흡수할 수 있는 데미지엔 본래 한도가 있었다. 일정량 이상의 데미지를 입는 순간 깨지기 마련이었다.

한데 브라함의 프로즌 크리스탈은 절대로 깨지지 않았으니 경악할 수밖에.

“너희가 그리드를 도와라.”

전장에 깨지지 않는 얼음이 늘어날수록 브라함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마법의 유지를 위해 소모하는 정신력과 마력이 그에게 부담을 가중시킨 까닭이다.

다수의 프로즌 크리스탈을 유지하면서 다른 종류의 마법을 사용한다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애초에, 불과 몇 년 전의 브라함이었다면 이딴 귀찮은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한심한 놈들의 기분이 어찌됐든, 보잘 것 없는 병사들이 몇 명이 죽어나가든 전혀 개의치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시온을 노리고 공격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브라함은,

“프로즌 크리스탈.”

카일이라는 녀석이 언젠간 그리드에게 도움이 될 인재라는 사실을 알고 지켜야할 필요성을 느꼈을 정도로 그리드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드가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리드가 무엇을 원할지 생각해 보고 행동했다.

그 결과가 지금이다.

브라함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이런 자신의 모습이 썩 나쁘지 않다고 느끼면서.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브라함에게 대답한 메르세데스가 피아로와 함께 몸을 날렸다.

온갖 기세가 담긴 검무를 펼치며 드라시온과 싸우고 있는 그리드를 돕기 위해 은익을 펼치고, 고구마 줄기를 휘두르며 전장에 난입했다.

그들이 있기에.

“.....”

브라함은 조연을 자처할 수 있던 것이기도 했다.

브라함은 그리드와 그의 기사들이 지닌 실력을 믿었다.

자신이 없어도 드라시온과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더군다나.

“우리도 합류하겠다!!”

그리드의 동료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메르세데스와 피아로 외에도 아직 건재한 템빨단원들과 제국의 공작들이 그리드에게 힘을 보태고자 발 벗고 나서고 있었다.

심지어 황제 바사라조차도 현역시절처럼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 그리드와 함께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도 있는 눈치였다.

“둠은 15초 뒤에 끝나요!!”

브라함과 함께 둠의 지속시간을 분석했던 메르세데스가 귀중한 정보를 전파했다.

아무 것도 못하고 무력감에 휩싸여있던 성녀 루비와 레베카교의 성직자들이 일제히 정신을 차리고 전선의 용사들을 주목했다.

정확히 15초 후.

“힐!”

“정화!”

루비와 성직자들이 동시에 전개한 회복 마법들이 드라시온과 격돌 중인 그리드 일행을 불시에 회복시켰다.

둠의 유지가 끝나는 시간을 알고 기다렸다는 듯한 그들의 행동에 드라시온이 동요할 정도였다.

콰쾅!

쿠콰콰콰콰쾅!!

둠에도 재사용 대기 시간이 있는 듯했다.

둠이 끝나고도 한동안 둠을 쓰지 않고 싸우는 드라시온을 상대로 그리드와 그의 동료들은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드라시온의 거체가 몇 번이나 쓰러져 썩은 대지를 진동시켰다. 물론 그리드 일행도 계속해서 치명상을 입었지만 성녀와 수백 명의 성직자가 밀어주는 힐 세례 덕분에 위기는 모면했다.

“쿠아아아아아!!”

전투가 지속되고 드라시온의 몸에 상처가 늘어날수록 드라시온은 이성을 잃어갔다. 급기야 짐승처럼 포효하며 지상에 지옥을 강림시켰으니 3페이즈의 시작이었다.

바로 그때.

“지옥 규제.”

지옥문을 열고 유라가 나타났다.

드라시온이 기껏 발동시킨 필드 마법을 봉쇄하고 신화급 무기 알렉스의 마법공학총을 연사하는 그녀의 활약 덕분에 레이드 난이도가 급격히 하락했다.

바로 그때.

“둠!”

드라시온이 재차 권능을 발동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며 긴장하는 그리드 일행의 머리 위에서 새로운 인물의 외침이 들려왔다.

“성검 소환!”

“....!”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전쟁터를 뒤덮는 찬란한 백광이 악의를 멸한다.

빛의 여신 레베카가 인간에게 친히 하사한 신물이 위력을 발휘하자 드라시온의 둠이 허망하게 소멸했다.

“왜 이제 왔나!!”

교황 데미안.

당연하게도 그는 이번 레이드에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한데 참전이 너무 늦었다.

“....데미안?”

데미안을 반기면서도 책망하듯 소리치던 토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른 일행들도 똑같이 당황했다.

“.....”

다시 고요해진 전장에 깃털이 나부낀다.

드라시온의 검은 깃털과 상반되게 새하얀 깃털이었다.

쨍강!

백광에 휩싸인 검.

이제는 데미안을 상징하는 무기가 된 <최초의 성검>이 주인을 잃고 땅에 떨어져 맥없이 나뒹군다.

“데미안!!”

하늘 위.

두 명의 천사가 데미안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고 있었다.

“천상의 뜻을 거스른 그대에겐 더 이상 자격이 없습니다.”

안타깝다는 듯이 중얼거린 천사가 데미안의 심장에 박아 넣었던 창을 천천히 뽑아냈다. 그리고 눈동자에 빛을 잃은 채 축 늘어지는 데미안의 몸을 더럽다는 듯이 창대로 밀어냈다.

“데미안!!”

그리드가 다급히 몸을 날렸다.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데미안의 몸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채 닿기 전에 데미안은 잿빛으로 산화하고 말았다.

그리드의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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