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19화
그리드, 브라함, 피아로.
세 사람에게 협공을 당하고 지하까지 추락한 드라시온이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거죽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물리적 고통들이 생소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증오한다. 세상을 파멸로 인도하고 싶다.’는 본능에 의거해서 행동 중인 드라시온의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이 본능 탓에 전생에서도 끊임없이 싸워왔을 자신이, 이 거대한 육신에 무수히 많은 상처를 새겨왔을 자신이, 심지어 ‘죽음’을 체험했던 자신이 왜 고통을 낯설게 느끼는가....
“나의 바람으로 태어난 고귀한 자여. 그대의 자애가 저들을 보살피기를.”
드라시온은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뜨거운 불의 강이 아닌, 부드럽고 아늑한 황금색 구름이 흐르는 세상에서 자신은 미소 짓고 있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 숙일 때 본 자신의 손등은 상처 하나 없이 곱고 희었다. 검고 두꺼운 가죽으로 뒤덮인 지금의 흉측한 손과는 전혀 달랐다.
“으윽....! 으아아악....!”
절규하는 드라시온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그리움이 그를 괴롭혔다.
이어서 원초적인 의문이 그를 지배했다.
‘나는 누구지?’
지금의 내 모습이 비프론즈의 전생 즉, 원래의 내 모습 아니었나?
저 찬란한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을 모른 채 마냥 행복해하는 또 다른 나는 누구란 말인가?
“.....”
땅속에 틀어박힌 채 괴로워하던 드라시온이 문득 비명을 멈췄다.
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흙이 자신의 살갗을 태우고 있음을 자각했다.
“저주한다....”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이 흙을.
“저주한다!!”
흙을 품은 땅을, 세상을.
콰르르르르륵!!
자신이 품은 분노와 증오의 근원이 무엇인지, 드라시온은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악마이므로. 죽음을 관장하는 지옥의 군주 중 하나이므로 생명을 싹틔우는 모든 것에 반감을 품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뿐이다.
쩌적! 쩌저적!!
드라시온이 뒤집어쓰고 있는 흙이 저주에 오염되기 시작한다. 해일처럼 뻗어나간 저주가 대지 전체를 뒤덮었고 대지가 품고 있던 모든 생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콰드드드득!!
땅을 헤치고 나온 드라시온이 지상을 굽어보았다.
절규가 메아리치는 지상의 풍경은 그가 기억하는 지옥의 풍경과 썩 다르지 않았다.
만족스러웠다.
이제부턴 살아있는 모든 걸 죽여 없애고 그분께 나의 불만을 표출할 차례다.
‘....그분?’
다시 한 번 떠오르는 황금빛 구름과 상냥한 목소리....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모를 기억이 드라시온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혼란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드라시온은 더 난폭하게 날뛰었다. 모든 상념을 접고 본능에 몸을 맡겼다.
콰콰콰콰콰콰콰쾅!!
이제 드라시온은 날개를 휘두르지 않았다.
깃털로부터 탄생하는 괴조들을 대행자로 삼아 전쟁을 방관했던 1페이즈에서의 모습과 달리, 2페이즈에서의 놈은 보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했다.
저항하는 인간들에겐 가차 없이 주먹을 내리쳐 곤죽으로 만들었고 겁에 질린 인간들에겐 저주를 속삭여서 마음을 지배했다.
무신의 추종자들의 난입에도 불구하고 전쟁 내내 우위를 점하고 있던 인간군 진영이 급속도로 약화됐다.
“히, 히익! 악마가 미쳐 날뛴다!!”
병사들이 깨달았다.
자신들이 여태껏 살아남은 이유는 그리드와 카일, 성녀 등의 활약 덕분이기에 앞서서 드라시온이 방관했던 덕분임을.
잠시 망각했던 대악마의 힘은 그들의 예상과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블리자드....!”
템빨국의 소녀 마법사가 드라시온의 인형으로 전락한 것이 특히 치명적인 손실이었다.
실종된 마법왕 골드히트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어린 그녀의 위대한 마법이 한 번 발동할 때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죽어나갔고 또 수천 명의 병사들이 상처를 입었다.
카츠의 파괴력은 그녀 이상이었다.
능력치 페널티를 입고 있는 유페미나와 달리 온전한 상태에서 드라시온의 꼭두각시가 된 그가 피의 비를 뿌릴 때면 일대의 병사들이 모조리 잿빛으로 소멸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수천 병력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한 제국군 지휘관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 이길 수 없어....”
전략과 전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드라시온의 꼭두각시들을 보면서 절망하는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희망을 버려선 안 됩니다.”
“여신의 가호가 당신들을 보살필 것입니다.”
레베카교의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의 회복 스킬이 부상자들의 상처를, 겁먹은 이들의 마음을 치유시켰다.
절망에 지배당한 사람들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을 다시 새겼다.
그들을 비웃듯.
“둠.”
드라시온이 전장의 모든 인간을 언데드로 바꿔버렸다.
오로지 신성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매우 극단적인 권능의 파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크아아아아악!!”
“쿨럭!!”
힐 세례를 받고 있던 병사들과 물약을 꺼내마시던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고통에 몸부림쳤다. 회복 효과의 반전이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이정과 전투 중이던 그리드의 상황도 난처하게 됐다.
그리드의 가장 큰 강점은 지속력.
흡혈, 회복, 실드를 꾸준히 연계시켜서 자신보다 강한 적들과 싸워올 수 있던 것이다.
한데 이중 흡혈과 회복이 도리어 독이 되자 난감했다.
[<엘핀스톤의 반지>를 해제하였습니다.]
일단 흡혈 효과를 발휘하는 액세서리부터 벗은 그리드가 주변을 살폈다.
자신이 이정과 싸우는 동안 27명이었던 무신의 추종자의 숫자가 절반 가까이 줄어있었다.
카일이 대활약을 펼친 것이다.
탈수를 이용해서 추종자들의 무기를 벗겨놓은 것도 주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딱히 희망을 엿보지 못했다.
‘이 자식이 눈치 챘어.’
전투 초반, 이정은 그리드의 견갑과 각반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다. 신물을 자극했다간 자신만 손해라고 판단한 건지 그리드의 어깨와 하반신을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공격 패턴이 단순해졌다.
하지만 도중부터 깨달은 듯하다.
그렇게 완벽한 성능을 자랑하는 신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단 사실을 말이다.
레베카교의 삼신기도, 동대륙의 사신기도 완벽한 무구는 아니지 않던가.
콰작!!
역시.
이제 이정은 그리드의 견갑과 각반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둠의 영향을 받고 위축된 그리드의 낌새를 읽고 도리어 더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콰드득!!
그리드의 견갑과 각반이 토해내는 가시에 다시 한 번 손을 베인 이정이 피식 웃었다.
“가려운 수준이군.”
소모전으로 가면 자신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이정은 알고 있었다.
그리드의 호흡이 이미 진즉부터 거칠어졌기 때문.
조금 전까지는 바퀴벌레처럼 상처를 회복하기에 소모전을 경계했지만 양쪽 모두 둠의 영향을 받게 된 지금은 아니었다.
“나는 무신의 가르침에 따라서 평생을 단련해왔다. 보통의 인간과 비교하면 가히 무한에 가까운 체력을 손에 넣었지. 온갖 기물의 도움을 받고 사술을 부려 체력을 연명하는 그대완 질적으로 달라.”
생명력과 스태미나.
모든 면에서 이정이 그리드를 압도했다.
이정은 초네임드급 NPC인 반면 그리드는 일개 플레이어였으니.
템빨과 스킬, 물약 등의 도움을 받아 회복하지 못하는 이상 그리드가 이정에게 체력에서 밀리는 건 당연했다.
“자, 누가 먼저 쓰러지나 겨뤄볼까?”
둠의 영향으로 서로 회복할 수 없게 된 몸.
이정은 이틈에 그리드를 박살낼 계획이었다.
서로 회복하지 못하고 소모전을 벌일 경우 먼저 쓰러지는 쪽은 당연히 그리드일 테니까.
파파팟....
호흡을 멈추고 기수식을 취하는 이정의 양팔이 공작새의 꼬리처럼 화려한 잔상을 남겼다.
곧 수도와 주먹의 세례가 전 방위에서 쏟아지리라.
생각하는 그리드의 머릿속에 ‘패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화신의 폭풍.”
콰르르르르르르륵!!
화신의 폭풍은 다양한 필드 효과를 발휘한다.
그중 으뜸은 거룩한 불꽃이다.
<거룩한 불꽃>
주작의 9번째 심장에 잠재된 불꽃을 끄집어내 화신의 폭풍을 형성합니다.
폭풍은 시전자의 반경 200미터 일대를 장악하며 시전자를 포함한 모든 아군(단, 종족이 언데드, 혹은 마족인 대상은 제외)의 치유 효과를 20퍼센트 상승시키고 모든 적의 치유 효과를 50퍼센트 감소시킵니다. 저항 불가.
치유 감소 효과에 걸린 대상이 회복을 시도 시 ‘화신의 분노’가 발생해 1만 5천의 고정된 피해를 입히며 회복 효과를 확률적으로 반전시킵니다.
종족이 언데드, 혹은 마족인 대상이 폭풍의 범위에 있을 경우 매우 큰 피해를 지속적으로 입습니다.
사실 언데드나 마족이 아닌 대상에게는 큰 데미지를 입히지 못하는 스킬이다.
특히 이정 정도의 초네임드 NPC가 상대라면 ‘폭풍의 범위에 있는 모든 적에게 의지 스탯과 근력 스탯에 비례하는 심(心) 속성 데미지’를 입히는 <의지의 불꽃> 효과가 중첩 되더라도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이정은 그리드와 마찬가지로 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카일의 뇌전을 흡수하는 기적을 행사했던 이정의 고유 특성을 경계해서 ‘무한의 검기’를 활용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단일 검무만 쓰며 이정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고 있던 그리드 입장에선 드라시온의 둠이 도리어 기회로 다가온 느낌이었다.
“크아아아악!!”
과연.
거룩한 불꽃은 언데드가 된 이정에게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했다.
전투 내내 여유를 잃지 않던 이정이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게 만들 정도였다.
“제발 빨리 죽어. 일단 네가 죽어야 레이드도 진행 되니까.”
“놈....! 노오옴!! 크아아아악!!”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이정이 이를 악 물고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음을 느낀 그는 어서 빨리 그리드를 죽여 없애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리드는 높은 초월의 격을 쌓고 있었다.
“초(超). 순보.”
스파앗!
순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초월자를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놈! 도망만 다닐 셈이냐!! 네놈은 수치를 모르느냐!!”
멈추지 않고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이정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자꾸만 순보를 전개해서 위치를 바꾸는 그리드를 끝끝내 잡지 못한 그의 몸이 이내 완전히 불타올라 재가 되어 흩어졌다.
[무신의 총애를 받는 삼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위대한 업적의 보상으로....]
....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빌어먹을 둠 덕분에 이정을 쓰러뜨린 그리드.
승산 없던 싸움에서 승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기뻐할 틈도 없이 전장으로 시선을 돌린 그가 5융합 검무의 보법을 밟기 시작했다.
표적은 지상의 드라시온.
둠의 지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드라시온의 발을 묶어둘 각오였다.
한편 지상에서는....
“이봐, 내게 협조해라.”
브라함의 지식과 메르세데스의 혜안이 결합하려하고 있었다.
둠을 파훼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