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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52화 (1,242/1,794)

템빨 63권 - 18화

키에에에에에!!

땅이 검게 썩어들기 시작하자 괴조들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인간보다 더 커진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부리를 쫄 때마다 병사들이 질색했고 기사들의 방패엔 구멍이 뻥뻥 뚫렸다.

“놈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침착하게 맞서 싸워라!!”

기사들이 바삐 뛰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싶었던 그들은 용감하게 괴조와 맞서 싸웠지만 도리어 역효과였다.

푸욱!!

송곳처럼 날카로운 부리로 기사들의 방패와 갑옷을 꿰뚫은 괴조들이,

꽈드득!!

갑옷 너머에 숨어있던 기사들의 속살을 뜯어 꿀꺽 삼킨다.

콰작!!

산 채 먹힌 고통과 충격에 휘청거리는 기사들의 가슴을 커다란 발로 짓눌러 숨통을 끊었다.

“히, 히익....!”

핏발 선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기사들을 학살하는 괴조들의 모습은 병사들의 사기를 너무 쉽게 떨어뜨렸다.

먼 하늘 위에 떠올라있던 드라시온과 달리 바로 가까이에서 숨소리를 토하는 괴조들이 병사들에겐 훨씬 더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왔다.

키야아아아!!

어떤 기사의 근육을 음미하듯 질겅질겅 씹던 괴조가 이내 병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포효하는 놈의 부리 안쪽에 자리 잡은 뾰족한 혀엔 크고 작은 고름이 잔뜩 부풀어 올라있었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혐오감을 주는 생김새였다.

전의를 잃은 병사들이 하나둘씩 주저앉기 시작하는 그때.

“으리야아아앗!!”

희망의 빛줄기가 나타났다.

민머리를 반짝이며 괴조들의 시선을 현혹하는 대머리 용사 반트너의 출현이었다.

“이 자식들!! 왜 시선을 피하는 건데!!”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괴조들은 태생적으로 빛에 약했다. 땀에 젖은 탓인지 유난히 번들거리며 빛나는 반트너의 대머리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성직자들의 홀리 라이트를 쳐다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꽈득!!

방패에 안면을 얻어맞은 괴조들의 목이 360도 회전하며 비틀렸고,

콰작!!

꽈배기처럼 꼬인 놈들의 모가지를 반트너는 도끼로 찍어 잘랐다.

“개자식들!! 왜 시선을 피하냐고!!”

이겨도 진 것 같은 찝찝함을 느끼는 반트너였다.

전장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마기로 물든 대지의 영향으로 비대해진 괴조들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위협할 때마다 템빨단원들이 나타나 괴조들을 처단했다.

괴조들은 드라시온의 깃털로부터 파생한 존재들.

아무리 강해져봤자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놈들은 템빨단원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병사들의 사기가 템빨단원들의 활약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다 잘 될 거에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성녀 루비의 역할이 매우 컸다.

결코 살아나지 못할 것 같았던 중상자들을 회복시키는 그녀의 치유 능력은 병사들에게 기적으로 다가왔다. 그녀를 인계에 강림한 빛의 여신이라 믿으며, 혹은 방관만하는 빛의 여신보다 훨씬 더 고귀한 존재라고 믿으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키익!!

본능일까, 아니면 드라시온의 의지일까?

전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괴조들의 시선이 일제히 루비에게 집중됐다. 썩은 대지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악취보다 더 지독하게 다가오는 살기가 전장에 번졌다.

키야아아악!!

명확한 살의를 품은 괴조들이 다른 인간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루비에게 달려들었다.

전장에 남은 괴조의 숫자는 약 100마리.

따로따로 떨어져있었을 때는 적게 보였던 숫자다.

하지만 놈들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해 달리며 집결하자 결코 적어보이지 않았다.

“내 뒤로 숨어.”

성녀의 기사.

‘아이디 변경권의 출시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인물 1위’를 매해 차지하고 있는 유명인사 ‘섹시여고생’이 루비를 호위했다.

황소처럼 커다란 괴조 100마리가 병사들을 해치며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꽤나 위축된 듯했지만, 방패를 위시하고 자세를 잡은 그녀는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쩌어어어어엉!!

<성스러운 빛의 방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희망의 수호자>를 세워 괴조의 부리를 막아낸 섹시여고생이 반대쪽 손에 쥔 메이스를 아래에서 위로 휘두르자.

콰작!!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괴조의 대가리가 뒤로 꺾이며 폭발했다.

성녀와 함께 있을 때, 그리고 악(惡)한 상대와 싸울 때 능력치 보정을 얻는 섹시여고생에게 루비의 홀리 스트라이크가 덧씌워졌으니 괴조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괴조의 숫자는 무려 100마리에 가까웠다.

어느새 랭커 소리를 들을 정도로 레벨을 올린 섹시여고생이라고 해도 다수의 괴조를 동시에 상대할 솜씨는 없었다.

그러므로 순순히 의지했다.

“준비 됐지?”

누구를 향한 질문인가.

어느새 섹시여고생의 코앞까지 닥쳐온 괴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의문을 품을 지능조차 갖지 못했다.

파직!

섹시여고생의 질문에 화답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기가 라이트닝.”

브라함은 하급 마법처럼 남발하지만 실제로는 보기 힘든 고위마법이 괴조들을 덮친다.

브라함의 기가 라이트닝과는 달랐다.

날카롭게 백열하는 전류를 발생시키는 브라함의 기가 라이트닝과 달리 이 순간 괴조들을 덮친 기가 라이트닝의 전류는 총천연색으로 빛났다.

화려하되 경박하지 않고 고귀한 색감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력을 탄생시킨 장본인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은 느낌이랄까.

키야아아아악!!

케에에에에엑!!

전염병처럼 번져나가는 기가 라이트닝의 전류가 괴조들을 고열로 지지며 마비시켰다. 쭈뼛 선 괴조들의 깃털 사이에서 피가 배어나오자 안 그래도 흉측한 괴조들의 몰골이 훨씬 더 기괴해졌다.

터엉!

쩍 벌어진 채 경련하는 괴조의 주둥이를 방패로 후려친 섹시여고생이 하늘을 향해 엄지를 세웠다.

“나이스 어시스트!”

“하아.... 하아.... 난 조금 쉴게.”

유페미나.

무무드의 후계자로 전직한 그녀의 발전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전설에 그치지 않고 신화를 엿볼 수도 있다는 것이 그녀를 향한 템빨단 내부의 평가였다.

하지만 전직한지 얼마 안 된 그녀의 능력치는 아직 수준 미달이었다. 잠재력과 비교했을 때 모든 수치가 상대적으로 열등했다. <기가 라이트닝>을 한 번 사용한 것만으로도 벅차할 정도로 말이다.

만약 이곳에 있는 사람이 섹시여고생과 유페미나 단 둘뿐이었다면, 둘의 실력만으론 다수의 괴수들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다.

그녀들은 많은 동료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드 한 사람이 모이게 만든 동료들.

그 숫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백 단위를 넘어선 상태다.

“쉐도우 블레이드.”

스파아아앗-!

마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 중인 괴조들의 발 밑.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그곳에서 수십 개의 칼날이 솟아올랐다.

누군가가 춤추며 휘두르는 듯한 칼날의 움직임은 빠르고 정교하여 괴조들을 손쉽게 난도질했다.

그림자의 왕 카심과 란스티어 페이커의 협작이었다.

크아아아아!!

괴조들의 비명이 연쇄됐다.

놈들의 갈라진 배에서 쏟아진 피와 내장이 안 그래도 썩어 악취를 풍기는 대지를 더욱 오염시켰다.

“블러드 레인.”

투콰콰콰콰콰쾅!!

땅을 흠뻑 적셨던 피가 허공에 떠오르더니 이내 다시 비처럼 쏟아지며 아직 숨통이 붙어있는 괴조들을 학살했다.

전쟁터에선 최강의 전투력을 발휘하는 블러드 워리어 카츠의 활약이었다.

키야아아....

괴조들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곧 잿빛으로 산화한 놈들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대지를 적신 검붉은 피가 놈들이 존재했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레벨 올랐어!”

섹시여고생이 기쁨에 소리친다.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와 파티를 맺고 있던 루비, 하늘 위에 올라있는 유페미나, 그림자 속 페이커, 전장 한가운데에 늠름히 자리 잡은 카츠 모두가 레벨 업을 상징하는 빛의 기둥에 휩싸이고 있었다.

늘 그랬듯, 전투가 그들을 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성장은 아직도 부족했다.

기사들과 괴조들이 흘린 피에 깃든 분노와 증오의 잔향에 호응하듯 진동을 일으키는 대지의 이변을, 그들은 공교롭게도 즉시 감지하지 못했다.

대가는 컸다.

푸욱!!

땅을 꿰뚫고 나타난 거대한 손이 섹시여고생의 발을 스쳐지나가며 찢어발긴다. 상처는 그녀의 육신에 저주를 각인시켰고, 강력한 저주는 그녀의 전신으로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콰드득!!

전쟁터 위에 당당히 서있던 카츠의 몸을 거대한 손이 꽉 붙잡아 으스러뜨렸다. 한 번에 치명상을 입고 대량의 생명력을 손실한 카츠가 그대로 혼절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그의 육신에도 저주가 번져나갔다.

“실드...!”

하늘 위.

갑자기 나타난 손에 순차적으로 쓰러지는 섹시여고생과 카츠의 모습을 인지한 유페미나가 방어 마법을 전개했지만 한 발 늦었다. 그녀의 실드는 채 완성되기도 전에 더러운 손톱에 찢겨져나갔고 그녀의 가슴은 손톱에 관통 당했다.

“윽....”

[대악마 ‘드라시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강력한 저주가 당신의 육신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앞으로 1분 동안 당신은 드라시온의 꼭두각시로 활동할 것입니다.]

[저항에 실패하였습니다.]

“무....슨....”

콰르륵!!

유페미나의 마나가 역류를 일으켰다.

기가 라이트닝을 사용한 후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명상한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당신은 현재 당신의 지력으론 이해할 수도, 구현할 수도 없는 마법을 사용한 대가를 치르는 중입니다.]

[마법의 위력과 캐스팅 시간이 200퍼센트 저하되며, 마법 사용 시 마나뿐만 아니라 생명력과 스태미나를 함께 소모하게 됩니다.]

[마법의 전개를 멈추는 것을 경고합니다.]

[마법의 전개를 멈추는 것을 경고....]

“우욱....!”

잠재력을 대가로 사용했던 기가 라이트닝.

그로 인해 요동쳤던 마나가 새로운 마법의 발현을 계기로 결국 폭주한다.

“파이어.... 쿨럭! 스톰!!”

원치 않는 마법의 발동.

육체의 제어권을 잃고 드라시온의 바람대로 마법을 전개하는 유페미나의 입과 코에서 피가 쏟아진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난폭한 화염의 폭풍이 제국과 템빨국의 병사들을 집어삼켰고,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한 대가로 죽음에 이른 유페미나가 불사 상태에 돌입했다.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최악의 전개였다.

드라시온의 저주는 아직도 유지되는 중이었다.

“블리자드....!”

쿠와아아아아아앙!!

극한의 냉기를 동반한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전쟁터를 휩쓸었다.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아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유페미나는 지금 겪는 현실이 지옥 같았다.

섹시여고생과 카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또한 드라시온의 꼭두각시가 된 채 아군을 학살하는 중이었다.

지상이 지옥으로 변모한 것이다.

인류를 절망으로 인도해온 대악마의 위용이 드디어 드러난 것이다.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의 악명은 결코 허명이 아니었다.

“아, 안 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루비가 시야에 들어오는 모두에게 큐어와 힐을 남발했다. 레베카교 소속의 성직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들을 비웃듯이 드라시온이 속삭였다.

“둠.”

종말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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