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17화
협동 스킬.
깊은 유대를 맺은 인물과 함께 스킬을 연계할시 발생하는 히든 피스다.
발생 조건이 무척 까다로운 이 히든 피스를 최초로 밝혀낸 인물이 바로 그리드이며, 협동 스킬을 전개할 때 그리드의 스킬 데미지는 무려 260퍼센트나 증폭됐다.
쿠르르르르릉....
그리드, 브라함, 피아로.
세 사람의 협동 스킬에 격추당한 드라시온의 거체가 전쟁터에서 자취를 감췄다.
새로운 무저갱의 탄생을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깊게 파인 땅속 깊숙이 처박힌 탓에 형체를 엿볼 수 없는 것이다.
‘...뭐하자는 거지?’
브라함의 대마법과 피아로의 궁극기를 연속으로 허용했다지만 상대는 제11위 대악마다.
제법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치명상은 면했을 터.
그리드는 드라시온이 즉시 땅을 헤치고 나와 반격할 거라고 예상했고, 대비했다.
한데 의미 없게도 드라시온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땅속에 숨어든 지렁이마냥 지하에 조용히 웅크렸다.
‘방심하게 만들려는 건가?’
드라시온이 기습을 노리는 거라고 판단한 그리드가 모든 감각을 발끝에 집중시켰다.
대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순간 <지신>을 전개해서 드라시온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5융합 검무를 꽂아 넣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드라시온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악!”
“으으, 으으으....!”
사방천지에선 여전히 병사들의 비명과 신음이 연쇄되고 있었다.
드라시온이 자취를 감춘 지금도 병사들은 사력을 다해서 싸우는 중이었다.
드라시온의 저주에 빠진 병사들과 드라시온의 깃털이 만든 괴조들이 전쟁터 곳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그리드는 어서 빨리 드라시온을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드라시온이 꼭꼭 숨은 채 나타나질 않자 초조해졌다.
차라리 드라시온을 쫓아 땅굴로 들어가야 하는 건가 고민하게 됐을 정도지만,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좁은 지형에서 싸우게 되면 숫적 우위를 살리기 힘들어지니 자충수다.
‘지신의 영향범위가 100배 정도만 컸어도 땅을 통째로 뒤집어놓았을 텐데....?’
초조함에 떠밀려 오판하지 않게끔 집중하던 그리드의 시선이 문득 하늘로 향했다.
카일의 비명이 들려온 까닭.
안력을 돋아 카일의 상황을 살펴보니 전황이 굉장히 나빴다.
‘카일조차도 삼제에겐 안 되는 건가?’
사실 그리드가 카일에게 거는 기대는 무척 컸다.
‘황제가 후견인을 자처하게 만들 정도로 높은 잠재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설정을 지닌 카일은 초네임드급 NPC 중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었기 때문.
실제로 카일은 그리드보다 강했다.
무한히 성장하며 솔로 넘버 나이트, 칠공작, 양반을 넘어서는 강함을 차례대로 손에 넣은 그리드지만 카일을 넘어선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카일이 그리드의 힘을 착각해서 위축되지만 않았어도 카일과 그리드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건 늘 카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 카일은 강했다.
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그는 초월의 격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린 상태였다. 그 경지가 비록 그리드보단 낮을 수도 있었지만, 초네임드급 NPC가 얻는 각종 부가능력치와 카일의 고유 능력 <뇌전>의 힘을 고려했을 때 카일은 분명히 그리드보다 강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수치적으로 계산했을 때의 이야기다.
여태껏 그리드는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왔고 이겨왔다. 실제로 두 사람이 싸웠을 때의 결과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신의 추종자들이 변수다.”
그리드와 나란히 선 채 드라시온의 동태를 살피던 브라함이 경고를 보내왔다.
“저놈들이 전쟁터에 난입하는 걸 막지 못하면 아군의 피해가 몇 배는 커지겠지.”
마침 하늘에 새로운 인물들이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늘을 달리는 경공술을 펼쳐 이정의 곁에 집결한 놈들은 최소 10개 이상의 비급을 습득한 무신의 추종자들이었다.
스윽.
브라함의 시선이 피아로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피아로는 드라시온이 등장했을 때 뿌려놓은 씨앗들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식물들이 성장하며 대지에 뿌리를 내리면 땅속에 숨어있는 드라시온의 마기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 약화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스윽.
브라함의 시선이 자신의 발밑으로 향했다. 드라시온이 언제 갑자기 땅을 꿰뚫고 나타나 등장할지 모를 일이었다.
잠시 생각해본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말했다.
“저놈들을 막는 건 너의 역할이다.”
“....”
브라함이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
드라시온의 기습에 가장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브라함이기 때문이다.
그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늘을 장악하기 시작한 29인의 무신의 추종자와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브라함과 자신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알겠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긴장감에 떨려오는 손을 털어낸 그리드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콰앙!!
우선 위기에 빠진 카일을 구한 뒤,
‘왕의 부정.’
탈수에 귀속 된 스킬을 써서 무신의 추종자들이 무기를 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승산이 없다고 주장하는 카일의 외침을 무시하며 <종횡무진>을 전개, 이정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내고 무신의 추종자들의 중심에 서더니 검기의 해일을 일으켰다.
콰르르르릉!!
“....!?”
“....!!”
이정을 포함한 29인의 무신의 추종자 전원이 검기의 해일에 휩쓸려 그리드의 곁으로 끌어당겨졌다.
이어서 모조리 베였다.
“윽!”
신음하는 무신의 추종자들 중 상당수가 상태이상 ‘균형 상실’에 걸렸다.
균형 상실의 여파로 경공술의 전개가 멈춰 지상으로 추락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파(派).
단 하나의 ‘단일 검무’가 전장을 지배한 순간이다.
하지만 그것을 단일 검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게 뭐야? 새로운 융합 검무야?”
“아마도 그렇겠지. 진영 붕괴와 상태이상을 유발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데미지 계수까지 수준급이라... 가히 완벽에 가까운 광역 스킬이군.”
방송을 통해서, 혹은 직접 현장 근처로 달려와서 템빨국과 제국의 드라시온 레이드를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은 파를 융합 검무라고 착각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최고의 성적으로 치우의 시련을 통과하고 <공백의 비급>을 통해 강화된 그리드의 검무는 전과 비할 수 없이 강력해진 상태였다. 단일 검무만으로 기존의 융합 검무와 비견되는 파괴력을 발휘할 정도로 말이다.
“확실히 강해졌군.”
삼제 이정이 순수하게 감탄했다.
종횡무진의 효과가 끝나 멈춰 서있는 그리드의 후위를 장악하며 나타난 그가 오른쪽 팔을 높이 치켜 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강해졌어도 그대 혼자서 나를 상대하려는 건 너무 큰 오만 아닌가?”
스칵!!
이정의 날카로운 수도가 그리드의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데미지를 입은 사람은 그리드가 아닌 이정이었다.
[<주작의 가호가 깃든 백호의 견갑>의 효과로 데미지를 무시하였습니다.]
[<주작의 가호가 깃든 백호의 견갑>의 효과로 <달아오른 가시>를 방출합니다.]
“큭?”
그리드의 후위를 장악한 시점부터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던 이정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강철을 두부 자르듯 하는 자신의 수도가 그리드의 견갑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가로막힌 것으로 모자라 뜨겁게 달아오른 가시에 손이 찔려 피투성이가 됐으니 황당했다.
‘신물인가?’
높은 인공지능은 때때로 독이 된다.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견갑을 경계한 이정이 그리드의 양쪽 어깨를 표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드가 움직일 때 아무리 큰 빈틈이 드러날지언정 어깨를 피해 다른 신체부위만 공격했다.
이정 스스로 제약을 만든 셈이다.
이정의 움직임이 다소 단순해졌고 그리드의 선택지는 늘어났다.
채챙!
채채채채채채채챙!!
이정은 무예에 조예가 깊다.
무신 제라툴의 비급을 수백 개나 습득한 만큼 온갖 종류의 무술을 구사했으니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드를 상대로 ‘어깨는 공격하지 않는다.’는 페널티를 얻게 됐어도 이정이 불리할 일은 없는 것이다.
순수한 기술을 겨뤘을 때 이정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고 그건 당연히 그리드도 마찬가지였다.
‘호각? 아니, 그리드가 밀린다!’
하늘 위에서 격전을 벌이는 그리드와 이정의 모습을 지켜보던 플레이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존 그리드와 전면전을 펼치면서 밀리기는커녕 차츰 우위를 점하는 이정의 실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랭커가 아닌 일반인들은 ‘무신의 추종자’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에 더 큰 충격을 느꼈다.
츠칵!
서걱!!
이정이 구사하는 온갖 무술이 그리드의 몸에 새로운 상처를 새길수록 무신의 추종자의 명성이 높아진다.
세계관 이해도가 낮은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세계관 최강자’의 정체가 그리드에서 이정으로 바뀌기 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바로 그때였다.
움찔!
그리드의 하체에 빈틈이 생긴 것을 보고 그리드의 정강이를 발목으로 힘껏 걷어차던 이정의 움직임이 한 순간 굳었다.
이번에도 템빨 때문이었다.
[<천지를 지탱하는 백호의 각반>의 효과로 데미지를 무시하였습니다.]
[<천지를 지탱하는 백호의 각반>의 효과로 <가시>를 방출합니다.]
“큭!”
따끔한 충격에 눈살을 찌푸린 이정이 빠르게 판단했다.
이제 그는 그리드의 어깨뿐만 아니라 하반신을 공격하는 것도 피했다.
스스로 더 큰 제약을 짊어진 것이다.
덕분에 두 발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게 된 그리드의 운신이 쉬어졌다.
쉬지 않고 계속되는 이정의 공세를 막아내기 급급해 사용하지 못했던 융합 검무들을 펼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의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리고 있는 거지?’
그리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무신의 추종자들을 차례대로 쓰러뜨리고 있던 카일이 그리드를 괴물 보듯이 쳐다봤다.
그리드가 당최 어떤 수작을 부렸기에 이정의 움직임이 갈수록 둔해지는 건지 카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리드가 더욱 더 두려워졌다.
‘내 수준으로는 그리드의 움직임을 쫓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구나.’
그리드가 나보다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삼제를 초월할 정도였을 줄이야....
카일의 오해가 깊어졌다.
한편 지상에서는....
‘땅의 기운은 생명을 탄생시킨다. 흙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물질이라고 할 수 있지.’
피아로는 주변의 수군거림을 무시한 채 전쟁터 한복판에 숲을 조성 중이었다.
그는 드라시온이 토속성에 취약했던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땅속에 숨은 드라시온의 오판을 기회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대지를 더욱 비옥하게 만드는 것. 땅속에 숨은 드라시온을 메말라 죽게끔 만드는 것이다.’
폭폭! 폭폭!!
피아로의 호미질이 빨라졌다.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전쟁터를 푸르게 가꾸는 그의 모습은 농부의 귀감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었다.
“크악....!!”
하늘 위에서 이정의 비명이 처음으로 울려 퍼질 무렵이었다.
“....?!”
이변을 감지한 피아로의 호미질이 멈췄다.
그가 힘들게 가꾼 푸른 숲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지가 오염된 여파였다.
쿠르르르릉....!
대지가 격동한다.
지독한 악취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땅속에 숨은 채 대지를 오염시켜 약점을 극복한 드라시온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려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