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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48화 (1,238/1,794)

템빨 63권 - 14화

평범한 병사가 드라시온의 표적이 됐을 때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드라시온이 굳이 병사들을 의식하지 않아도 병사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낮았다. 황소 뒷걸음에 쥐가 깔려 죽듯이, 드라시온의 무의식적인 행동이 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할 공산이 컸다.

그리드와 템빨단원들, 바사라 황제와 제국의 대소신료들, 심지어 병사들 본인조차도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병사들이 드라시온 토벌에 참전한 이유는 그들에게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국을 지키겠노라는 의지였다.

바사라가 그들의 참전 의지를 받아들인 이유는 그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고.

“쏴라!!”

무저갱의 새카만 입구에 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한 순간.

슈슉!

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슈슉!!

지휘관들의 외침과 동시에 수만 발의 화살이 쏘아져 포물선을 그렸다.

붉은 하늘을 덧칠하는 날카로운 화살들이 무저갱의 거대한 입구를 뒤덮었다.

제국 강병들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관이었다.

푸푸푸푸푸푸푸푸푸푸푸푹!!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드라시온의 거체에 수천 발의 화살이 적중했다. 하지만 그 모든 화살이 드라시온의 가죽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병사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이미 새로운 화살을 시위에 먹인 수만 병사들의 눈동자는 여전히 강건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르륵!

병사들의 화살촉에 마법사들의 마법이 깃들기 시작했다.

어떤 화살은 불을, 어떤 화살은 바람을, 또 어떤 화살은 냉기나 토기를 머금었다.

파지직!

레베카교 성직자들의 신성력이 덧씌워진 화살들도 있었다.

“쏴라!!”

지휘관들이 재차 외쳤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팟!!

수만 발의 화살이 다시 한 번 포물선을 그렸다.

드라시온의 등장을 예측하고 무저갱의 입구로 쏘아졌던 첫 번째 사격과 달리, 두 번째 사격은 정확히 드라시온을 표적으로 삼았다. 훨씬 더 정교한 명중률을 자랑했다.

푸푹! 푸푸푸푸푸푸푹!!

어째선지 하늘을 올려보고 선 드라시온.

대부분의 화살이 놈의 거체에 명중했다. 아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일부 화살이 드라시온의 가죽을 조금이나마 꿰뚫었다는 점이다.

수만 발 중 극히 일부, 채 100발도 안 되는 화살이 드라시온의 육체 곳곳에 가시처럼 장식됐다.

토속성과 신성력이 융합 된 화살 중 백부장급 이상이 쏜 화살들이 작게나마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눈빛을 교환한 마법사들과 성직자들의 주문이 백부장, 천부장급 장교들의 화살에 집중되는 그때였다.

“내면의 분노를 표출해라.”

하늘로부터 시선을 뗀 드라시온이 중얼거렸다.

놈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마력이 안개처럼 번져나가 전장을 뒤덮었다.

[드라시온의 저주가 전염됩니다!]

드디어 레이드가 시작됐다.

인간의 마음 속 분노와 원한을 엿보고 끄집어내는 드라시온의 저주가 혼란과 폭력을 유발했다.

“크아아악!!”

제국군 진영에서 비명이 빗발쳤다.

드라시온의 저주에 걸린 일부 병사들이 이성을 잃고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템빨국 진영의 혼란은 적었다.

‘대상의 원한을 자극한다’는 설정을 지닌 드라시온의 저주는 플레이어가 아닌 NPC들을 상대로 높은 적중률을 발휘했기 때문.

NPC가 아닌 플레이어 병사들의 자원을 받아 레이드 공대를 꾸린 라우엘의 선택이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운이 좋았군.’

라우엘이 NPC가 아닌 플레이어로 공대를 꾸린 이유는 단순했다.

아무래도 평범한 병사 NPC보다야 플레이어들의 평균 레벨이 높은 시대 아닌가.

레벨이 오를 때마다 상태이상 저항률과 속성 저항률이 상승하는 만큼, 라우엘은 NPC병사보다 플레이어 병사들이 대악마 레이드에 훨씬 더 쓸모 있을 거라고 판단했었다.

드라시온의 저주가 NPC를 상대로 더 높은 적중률을 발휘한다는 사실까진 예측하지 못했는데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진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다 죽일 거야! 다 죽일 거라고!!”

물론 플레이어라고 해서 저주에 완전히 면역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암흑 속성 저항력이나 혼란 저항력이 낮은 플레이어들은 쉽게 저주에 걸려서 이성을 잃고 아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숫자가 비교적 적었을 뿐더러,

“쥬드. 귀 아프다.”

퍽!

“프로즌 크리스탈.”

쩌적! 쩌저저저적!!

금방 제압당했다.

템빨국 진영엔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강자가 워낙 많았다.

쥬드와 아슈르 후작, 그리고 아멜다와 단테를 비롯한 전대 적기사들과 중상급 랭킹의 템빨단원들.

비록 템빨국 메인 파티엔 끼지 못한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메인 파티에 끼지 못한 이유는 절대로 약해서가 아니다. 템빨국의 메인 전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했을 뿐이다.

“우리야아아아아앗!!”

반트너의 요란한 기합성이 전장 한복판에 쩌렁쩌렁 울렸다.

드라시온이 등장하자마자 선공을 날린 병사들이 어그로를 끌어준 덕분에 발생한 잠시간의 빈틈.

수많은 희생이 만들어낸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메인 전력이 발 빠르게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에게 한눈이 팔려있는 드라시온을 노리고 도약해 날아오른 템빨국과 제국의 주요인물들이 처음부터 궁극기를 전개, 총공세를 펼쳤다.

‘좋아.’

비록 제국의 병사들이 큰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계획대로 좋은 출발이다.

마차에 설치 된 망대에 올라 전장을 살피는 라우엘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쳤다.

아주 잠시 스쳐지나갔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빛이었다.

“....!”

라우엘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그가 처음 이변을 감지한 건 메르세데스의 행동 때문이었다.

은익을 펼치고 날아오르던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 멈추더니 선회했다.

곧 이어 4융합 검무의 보법을 밟고 있던 그리드가 퇴보했고, 그 직후에 호미를 거둔 피아로가 갑자기 씨앗을 꺼내 주변으로 뿌렸다.

이어서.

“그라비티.”

언제부터 주문을 외웠던 것인지 브라함의 대마법이 작동했다.

쿠우우웅!!

먼저 물러섰던 메르세데스, 그리드, 피아로 3인을 제외하고 드라시온에게 접근하던 템빨단원 전원을 중력으로 짓눌러 추락시키는 마법이었다.

“뭐하는 짓....!”

한 손엔 도끼, 한 손엔 방패를 들고 풍차처럼 회전하다가 갑자기 추락해 하필 정수리부터 땅에 꽂힌 반트너가 벌떡 일어나 따지려다가 멈췄다.

후두둑!

버섯마냥 부풀어 오른 반트너의 대머리 위로 뜨겁고 붉은 액체가 비처럼 쏟아졌다.

“....!!”

“....!!”

두 눈을 부릅뜬 반트너와 템빨단원들이 하늘을 올려보았다가 경악했다.

몸이 반으로 잘려나간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모습을 목격한 까닭이다.

“무, 무슨?”

쥬앙데르크 시대의 적기사단보단 약화됐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적기사단이다.

솔로 넘버 나이트들의 레벨은 필시 450을 훌쩍 넘었을 것이었다.

한데 그들을 일격에, 갑옷 째 양단해버리는 공격이라니?

“크윽!!”

그나마 1~4번 기사들은 위기를 모면한 듯 신음하며 지상에 착지했다. 하지만 그 외 모든 솔로 넘버 나이트는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잿빛으로 산화해서 사라졌다.

쩌정!!

죽은 이들의 피가 비산하고 있는 하늘 한쪽에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레이첼, 모르이즈, 그리고 그렌할.

제국의 공작들이 서로 등을 맞댄 채 누군가의 공격을 방어하고 있었다.

촤르륵!! 쩌엉-!!

기다란 쇠사슬에 구속된 두 다리를 벼락처럼 놀려 공작들을 공격하는 사내.

공작들은 그의 날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했다.

내로라하는 실력을 지닌 공작 셋이 단 한 명의 적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보였으니 지켜보는 이들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저놈....”

지상에서 상황을 살피던 그리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홀로 세 명의 공작을 압도하는 불청객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봤다.

안대로 두 눈을, 두꺼운 철판으로 만든 구속구로 양손을 봉한 것으로 모자라 기다란 쇠사슬로 발목을 묶고 있는 인물.

저런 특이한 행색을 하고 있는 놈은 그리드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이정.

무신의 추종자 중에서도 최강의 실력을 지녔다는 삼제 중 하나다.

“브라함!”

그리드가 멀뚱멀뚱 서있는 브라함을 애타게 불렀다.

공작들에겐 비행 능력이 없다.

힘껏 도약한 상태에서 다시 중력의 영향을 받아 떨어지는 와중에 이정의 맹공을 감당할리 만무했으니 도움이 절실했다.

“쯧.”

그리드의 애타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찬 브라함이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이정에게 겨눴다.

“기가 라이트닝.”

파직!

퍼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이정은 전후좌우 사방으로 위치를 바꿔가며 공작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원거리에서 표적으로 지정한다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브라함은 놈의 이동경로 전부를 장악해버렸다.

강력한 전기의 파동이 뻗어나가 공작들의 주위로 펼쳐지자 흠칫 놀란 이정은 멀찍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무사히 지상에 착지한 공작들이 브라함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의 부활은 이미 진즉에 만천하에 공개됐다.

마탑에 틀어박혀 지내느라 세상물정 모르는 제국의 대마법사들이나 브라함을 알아보지 못했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브라함을 알고 있었다.

“히끅!”

두 눈이 휘둥그레진 대마법사 리칠리아가 딸꾹질을 했다.

브라함의 마법을 목도한 여파다.

고위마법 기가 라이트닝을 마법진이나 주문의 도움도 없이 즉시 시전한 것으로 모자라 가늠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했던 마력의 파동.

브라함의 실력은 대마법사 리칠리아의 광대한 지식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신비였다.

“뭘 그리 보느냐?”

어째선지 심기가 불편해진 브라함이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리칠리아와 마탑주들에게 따지듯 묻자 기겁한 그들이 일제히 절을 올렸다.

“아, 아까는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저분이 감히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지적질을 했다니.

존엄을 모독한 자신들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느끼며 덜덜 떠는 리칠리아와 마탑주는 하나 같이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거물들이었다.

다만 브라함 아래선 평등할 뿐이다.

깊이 반성하는 그들의 태도가 흡족했는지 표정을 푼 브라함이 그리드에게 경고했다.

“아무래도 드라시온에게 조력하려는 놈들이 있나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어찌 된 영문일까.

도대체 왜 무신의 추종자가 드라시온을 돕는 것일까?

하늘 위 이정을 한 번 노려봐준 그리드가 카일을 돌아보았다.

무신의 추종자인 카일이라면 사정을 모를 리 없었으니까.

카일이 힘겹게 말했다.

“무, 무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신탁?”

“....드라시온 토벌에 나선 인간들을 모조리 말살하라는 신탁입니다”

“뭐?”

자신을 숭상하는 인류에게 감사하며 도와줘도 부족할 판국에 도리어 말살하겠다고?

이유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리드는 다만 강한 혐오를 느낄 뿐이었다.

“개보다 못한 새끼....”

흠칫.

저열한 욕설을 토하는 그리드로부터 뿜어지는 살기에 놀란 카일의 등이 식은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마지막 기회를 줬다.

“네가 이정을 맡아라.”

이건 테스트다.

만약 카일이 신탁을 어기고 이정과 싸운다면 그리드를 향한 카일의 충성이 진짜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제, 제게 삼제 중 하나와 싸우란 말씀입니까?”

삼제는 추종자의 정점이다.

게다가 이정은 최근 궁극의 비급을 익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

어처구니가 없었던 카일이 반문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드의 서슬 퍼런 눈빛을 보고 자신이 커다란 시련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만약 이 자리에 그리드와 단 둘이 있었다면 카일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그리드가 아닌 무신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윽.

카일의 시선이 전장을 둘러싸고 있는 수만 대군을 살폈다.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일개 병사들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봤자 자신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스윽.

카일의 시선이 살아남은 공작들과 솔로 넘버 나이트를 살폈다.

두렵지 않았다.

저쯤은 혼자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윽.

카일의 시선이 메르세데스와 피아로를 살폈다.

꽤 긴장됐다.

지난 1년 동안 새로운 비급을 익힌 자신은 충분히 강해졌지만 저들 둘을 상대론 여전히 이기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질 것 같지도 않았다.

스윽.

카일의 시선이 브라함을 살폈다.

그리고 브라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질겁하더니 곧장 눈을 깔았다.

갈등의 종말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제가 싸워서 이기진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대답한 카일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서대륙에 남은 약 서른 명의 무신의 추종자 중 배신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덕분에 드라시온 레이드 공대는 다시 드라시온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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