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12화
[적야(赤夜)의 대도(大盜)가 당신에게 큰 흥미를 품습니다. 붉게 물드는 밤을 조심하십시오.]
황궁의 비밀통로를 발견한 그리드가 황궁 설계도를 얻었을 당시 떠올랐던 경고 문구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적야의 대도를 별로 의식하지 않았다.
그냥 엄청난 도적이 있나보다, 엮이면 귀찮을 수도 있겠다, 정도로 치부하고 넘겼을 뿐이다.
하지만 지혜의 탑을 방문한 후부턴 적야의 대도를 크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지혜의 탑의 3좌 라드볼프와 나눴던 대화 때문이다.
“설마 적야의 대도가 지혜의 탑에 침입했던 겁니까?”
“그래.”
“아니 그게 어떻게 가능.... 설마 그자도 초월자인 겁니까?”
“맞다. 적어도 600년 전부터 활동해온 놈이지. 우리와 맞먹는 노괴라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녀석이 100년 전에 이곳에 숨어 들어선 네바르탄의 목걸이를 훔쳐갔어.”
온갖 폐쇄 마법을 두르고 있는 지혜의 탑을 발견한 것으로 모자라 결사들의 감각을 속이고 잠입했다는 적야의 대도.
그는 필시 현존 최강의 실력자 중 하나다.
거물 중의 거물인 그가 하필 이 타이밍에....
“보물창고가 열렸구만. 끌끌.”
황궁에 나타난 것이다.
겉모습은 평범한 노인이었다.
주름진 피부엔 검버섯이 피어있었고 허리는 잔뜩 굽어 지팡이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뒷짐 쥐고 선 채 주변을 둘러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국의 대소신료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자도 템빨국에서 온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그리드를 대신해서 바사라가 소리쳤다.
“저분을 포위하세요!”
“....!”
다급한 외침에 흠칫 놀란 기사들이 일제히 노인을 둘러쌌다.
노인의 시선이 바사라에게 향했다.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영 시원찮군.”
“도둑을 손님으로 대접하는 문화는 제국에 없습니다.”
그렇다.
제국의 황제인 바사라는 당연하게도 노인의 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다.
“적야의 대도.”
“....!”
“....!”
대소신료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노인을 둘러싼 기사들 또한 깜짝 놀라며 검을 뽑아 쥐었다.
제국의 비화를 아는 그들은 적야의 대도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기사들이 으름장을 놓았다.
몇 명의 기사들은 포승을 꺼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노인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천하의 적기사단에게 둘러싸이고도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으니 기사들 입장에선 자존심이 상했다.
“포박해라!”
13번 기사 토리가 기사들에게 명령하는 순간이었다.
축 처진 눈꺼풀에 가려진 노인의 눈동자가 형형한 빛을 발한다 싶더니,
“어?”
“...!?”
기사들의 몸이 꽁꽁 묶여 포박됐다.
놀라운 사실은, 그들의 몸을 묶은 밧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손에 들려있던 밧줄이라는 점이다.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밧줄을 빼앗겨 포박당한 기사들은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관절이 접혀 맥없이 주저앉는 그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노인이 바사라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럼 난 적당한 물건을 갖고 떠날 테니 신경 끄고 일들 보게나.”
멈칫.
그대로 대전을 떠나려던 노인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자신의 앞을 웬 젊은 놈이 가로막고 선 까닭.
은빛 왕관을 쓰고 있는 놈이었다.
노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보물을 도배하고 있는 꼴을 보니 자네가 소문의 템빨왕인가 보군.”
“후배를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후배? 허허, 난 자네 같은 후배를 둔 기억이 없네만?”
적야의 대도의 관심사는 인간이 아닌 물건에 있다.
기사들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포박해버릴 정도의 경지 즉, 초월경을 이룬 고위 초월자이긴 했지만 사람을 보는 안목은 카일보다 도리어 떨어졌다.
그리드가 자신과 같은 초월자라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단 뜻이다.
눈치 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고 말이다.
적야의 대도는 누군가와 친분을 쌓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스윽.
적야의 대도가 다시 초월경에 진입했다.
1초라는 찰나를 수십 초로 느낄 정도로 감각을 극대화시켜서 이동, 그리드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그리드의 손을 마주보고 멈춰선 적야의 대도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눈살을 찌푸린 그가 그리드를 경계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생각했는데 발톱을 숨긴 맹수였군.”
황금알을 낳는 거위.
그렇다.
적야의 대도가 그리드의 소문을 듣고도 그리드를 약탈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리드가 조금 더 많은 보물을 만들어놓기를 바라서였다.
지금부터 벌써 그리드를 약탈했다가 경계심을 품게 만드느니 방관하다가 그리드가 훨씬 더 많은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 작품들을 한꺼번에 약탈할 심산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쉽게 약탈할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자네는 수백 년을 산 노괴도 아니건만 어찌 벌써부터 초월자가 된 건가?”
어떤 위업을 세우면 도달할 수 있는 전설과 달리 초월자는 오랜 수련 끝에 도달하는 경지다.
하물며 초월경을 이룬 초월자는 초월자 중에서도 드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적야의 대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놀랍군, 놀라워. 자네처럼 이른 나이에 초월경에 도달한 사람은 전무후무할 것일세.”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단지 운이 좋아 파그마의 후예가 됐을 뿐이다.
한때 그리드를 향했던 세간의 평가들을 그리드는 무척 싫어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는 그리드도 알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엔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노력한 만큼의 보답을 얻어 지금의 위치에 오른 자신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호오....”
적야의 대도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태껏 그가 만나온 초월자들은 하나 같이 자부심이 높아 콧대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는데 그리드는 겸양을 보였으니 흥미가 생기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내 앞길을 가로 막는 이유는 뭔가?”
적야의 대도가 질문하는 순간.
스파앗-!
스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파팟!!
하늘에서 수백, 수천 개의 빛의 기둥이 떨어져 내렸다.
하나의 기둥이 떨어질 때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나 대전을 가득 채웠다.
피아로를 비롯한 템빨국의 기사들과 템빨단원들, 그리고 브라함이 드디어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찌릿, 찌릿.
적야의 대도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비교적 부족하다고 해도 초월자는 초월자다.
브라함이 풍기는 짙은 마력의 수준을 감지 못할 정도로 백치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브라함 외에도 수많은 전설과 그에 준하는 수십 명의 실력자가 한 자리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적야의 대도라도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을 등지고 선 그리드가 적야의 대도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곳에 대악마가 나타났습니다. 대악마는 인류의 대적인 바, 선배님께서 이번 한 번만이라도 저희를 도와 함께 싸워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
내가 왜?
여태껏 혼자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인 적야의 대도는 그리드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브라함과 피아로, 메르세데스, 페이커, 지슈카, 유페미나 등의 비호를 받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을 보자 조금 망설여졌다.
적야의 대도는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인물들을 수하로 거느린 그리드라는 인물에게 큰 흥미가 생겼다.
물건이 아닌 인물에게 흥미를 느끼는 건 그의 600년 인생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입장에서 그리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그리드와의 관계를 굳이 부정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게다가 이곳에 나타난 대악마는....’
이정도의 원한과 증오라면 필시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이다.
놈이 지상에서 날뛰었다간 지옥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개입할 우려가 있었다.
‘....지상이 쑥대밭이 될 수도.’
세계의 멸망은 적야의 대도도 원치 않는 일이다.
앞으로 더 많은 보물을 수집하고 싶은 그의 입장에선 인류가 살아남고 부흥해서 더 많은 보물을 만들어주는 편이 좋았다.
잠시 고민하던 적야의 대도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조금은 도와주도록 하지.”
“....!”
바사라가 귀를 의심했다.
악명 높은 적야의 대도가 인류를 위해 싸우겠다고 나서니 놀랄 수밖에.
“단 조건이 있네. 대악마를 토벌하든 토벌하지 못하든 자네는 내게 3개의 보물을 선물해줘야 돼.”
“어떤 보물을 원하시는 거죠?”
“그건 내가 고민해보고 결정하겠네.”
“알겠습니다.”
적야의 대도가 설사 염룡검을 내놓으라고 해도 그리드는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
아이템이야 더 좋은 걸로 새로 만들면 그만이고(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적야의 대도와 친분을 쌓을 기회는 이번이 유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야.’
게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템빨국에 잠입해서 물건을 훔쳐갈 수 있는 위인이다.
어차피 빼앗길 물건이라면 친분을 쌓는 대가로 내어주는 편이 훨씬 더 좋다.
그리드는 판단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적야의 대도와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적야의 대도는 초네임드 NPC 중에서도 등장 조건이 가장 까다롭다.
설령 등장한다고 해도 플레이어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기 때문에 플레이어와 적야의 대도의 만남은 사실상 성사되기 힘들었다.
한데 그리드는 적야의 대도와의 만남이 성사시켰고 호감도까지 쌓았다.
현존 최강의 실력자 중 하나와 말이다.
“대어를 물었군.”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브라함이 중얼거렸다.
브라함 또한 그리드의 판단을 옳게 본 것이다.
적야의 대도의 실력은 브라함도 인정할 정도라는 뜻이기도 했다.
“폐하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마침 제국의 실력자들도 속속들이 대전에 도착했다.
제국의 국경을 수호해온 뛰어난 지휘관들과 솔로 넘버 나이트 전원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갑시다.”
그리드가 선두에서 모두를 이끌었다.
템빨국과 제국의 최정예 전력, 그리고 적야의 대도가 소속된 레이드팀.
다소 요상한 조합이긴 했지만 여태껏 없던 최강의 조합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했다.
***
아스가르드.
천상의 신들이 오래간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천상의 치부 중 하나인 타천사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
무신 제라툴이 주장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우리가 직접 처단해야한다. 놈이 인간들의 손에 토벌 당해 우리의 치부가 밝혀졌다간 우리의 위신이 지하까지 떨어질 테니.”
제라툴의 주장에 이견을 제기하는 신은 없었다.
대장장이의 신 헥세타이아도 침묵했다.
지상에 있는 그리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드라시온이 한시 빨리 토벌당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라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서쪽에 남아있는 추종자들을 무저갱으로 보내도록 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