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11화
“전하께서 싸우신다면 저도 싸워야지요! 끝까지 남아서 전하와 함께 싸우겠나이다!!”
그리드에게 절을 올리며 외치는 카일의 모습은 군주에게 충의를 맹세하는 기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제국의 지존인 바사라 황제에게도, 자신을 고용한 듀란달 황자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그가 타국의 왕을 주인인양 섬기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리드 전하께서 암암리에 카일을 회유했던 건가?’
‘제국의 마지막 기둥을 템빨국에게 빼앗긴다고?’
위기의식에 휩싸인 대소신료들이 그리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동맹국의 인재를 탐하다니!
도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비난해 마땅했다.
그리드를 신뢰해온 제국 입장에선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심상찮아진 기류를 그리드가 환기시켰다.
“내가 카일 공을 죽여 버리겠다고 했던가? 그때 우리는 서로 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니 없던 일이오. 괘념치 말고 편히 대하시오.”
그리드는 자신과 카일이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 공표했다.
카일이 자신에게 저자세인 이유는 단지 겁먹었기 때문이라고 에둘러 말했다.
카일 입장에선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다.
그가 그리드를 두려워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지금도 그리드를 볼 때마다 팔이 잘릴 때의 고통이 떠오르며 방광이 요동쳤다.
‘이 괴물....’
카일은 쥬앙데르크의 손에 키워진 인물이다.
대륙 최강의 권력자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란 그는 어지간한 사람에겐 위축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타고난 재능을 노력으로 승화시킨 끝에 무신의 선택을 받고 초월자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평범한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그리드의 명령(협박)을 받고 듀란달을 감시하는 동안 무신의 비급을 연마해온 카일.
초월의 격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린 그의 육감은 그리드의 경지를 비교적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저건 이미 인간이 아니다.’
만물의 흐름을 인지하는 경지.
초월경이라고 했던가.
그리드는 필시 그 경지에 올라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진정한 초월자란 뜻이다.
‘저런 자이니 내 팔을 잘라갔지....’
욱씬!
백발로 변했던 그리드의 모습을 떠올리며 팔이 잘려나갔던 순간을 회상한 카일이 생생한 고통에 휩싸였다. 지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그렇다.
카일은 이미 수 년 전부터 그리드가 자신을 앞서있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영원히 풀리지 않을 오해였다.
카일은 앞으로 평생토록 그리드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예의바르게 행동할 수밖에.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우같은 자다.
이 지긋지긋한 제국에 자신을 세작으로 심어놓은 장본인인 주제에 모른 체라니.
카일은 그리드가 여러모로 아니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드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여태껏 수모를 견뎌놓고 이제 와서 감정을 드러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제국을 떠나는 걸 허락 받기도 해야 하니 비위를 잘 맞춰야한다.’
얼마 전 무신의 부름이 있었다.
신께서 추종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동방으로 향하라 하셨다.
무신을 사칭하는 간교한 자가 뿌리를 내린 이단의 땅을 짓밟아 엄벌을 내리라 하셨는데 어떤 어리석은 놈이 감히 무신을 사칭한 건지 황당할 따름이다.
‘....무신의 말씀을 받들기 위해선 우선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군.’
무저갱에 잠들어있는 악마가 특별한 존재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랜드마스터에게 언뜻 듣기론 불쌍하고 가여운 존재라고 했던가.
‘한데 대악마였을 줄이야.’
어째서 악마 따위를 불쌍하고 가엽다 칭한 걸까?
풀리지 않을 의문 같다.
딱히 오래가지 않을 의문이기도 했다.
무저갱의 악마의 정체 따윈 카일에게 중요치 않았다.
카일은 다만 빨리 동쪽으로 향해 무신의 뜻을 이뤄드리고 새로운 비급을 얻고 싶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11위 대악마.
11위라....
‘도무지 이길 것 같지가 않은데.’
제국의 모든 병력과 자신, 거기에 그리드의 힘을 합친다고 해봤자 승산을 엿보기 힘든데 황도에 주둔 중인 병력만으로 싸워야한다.
이걸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한 자릿수 순위의 대악마와 그에 준하는 순위의 대악마는 영혼을 불태우거나 생명을 반전시키는 저주를 지녔다고 들었다.’
소울 번, 혹은 둠.
11위쯤 되면 두 가지 저주 중 하나를 쓸 수 있을 것이다.
먼 옛날 검성 뮐러처럼 저주조차 베어내는 검술을 구사한다면 또 모를까, 상식적으로 인간이 어찌해볼 상대가 아니다.
그리드가 완벽한 초월을 이룬 존재라고 할지언정 종(種) 자체가 인간인 이상 고위 대악마의 저주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
처음에는 호기롭게 도전하다가도 싸우다보면 금방 생각이 바뀌어 도망칠 것이다.
그때 자신 역시 도망칠 수 있게끔 적당히 힘을 안배하면 될 터.
‘전 황제께 바치는 마지막 충정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위험이기도 하고. 우선은 싸우도록 할까.’
쥬앙데르크가 없는 제국은 카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저승에서 지켜보고 있을 쥬앙데르크를 위해서라도 제국을 지키는 척이나마하는 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드의 명을 받들어 대악마와 맞서 싸우겠노라.
카일이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었다.
“무저갱에서 깨어난 대악마의 정체는 알고 있나?”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카일을 빤히 바라보던 그리드가 질문했다.
카일이 조심스레 대답했다.
“마기의 파동에 담긴 힘과 원한을 읽고 추측해보건대 저주의 대악마 드라시온 같습니다만....”
“과연 잘 알고 있군.”
“황실 서고엔 인계에 출몰했던 대악마와 관련된 문헌이 꽤 많이 남아있죠. 특히 검성 뮐러에게 토벌 당했던 대악마들의 특징이 상세히 기록돼 있는데 드라시온도 그중 하나입니다. 한데 전하께서도 무저갱의 악마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셨던 겁니까?”
전 황제 쥬앙데르크의 호의를 샀던 카일은 방대한 정보를 습득해왔다. 덕분에 드라시온의 정체를 유추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한데 그리드 또한 드라시온의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던 눈치인지라 솔직히 의외였다.
그리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전까지 놈과 싸우고 왔거든.”
“네?”
카일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바사라와 대신들 전부가 기겁했다.
17위 대악마 보티스를 토벌한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드라시온과 싸우고 왔다고?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솔직히 허풍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리드의 경지를 비교적 정확하게 가늠하고 있는 카일조차도 그리드의 말을 섣불리 믿지 못했다.
“어떻게 살아오신 겁니까?”
대놓고 묻는 카일의 반응을 본 그리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둠이 뭔지 아는 듯한 반응인데?”
일시적으로 종족을 언데드로 바꿔버리는 권능.
모든 치유 효과를 반전시키는 그 말도 안 되는 권능의 위력을 그리드는 체험하고 왔다.
저항조차 불가능한 사기적인 권능.
그것의 파훼법을 밝혀내는 것이 드라시온 공략의 핵심이라고 판단한 그리드는 카일의 지식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쥬앙데르크 곁에서 온갖 혜택을 받으며 공부하고 종국엔 초월자가 된 카일이라면 반드시 둠의 파훼법을 알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대 이하였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지상의 생물은 거부할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저주죠. 그것에 당하는 이상 산 자는 망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살아서 돌아오셨으니 놀라울 따름이군요.”
‘지상의 생물은 거부할 수 없는 저주라....’
인간은 고사하고 모든 종족이 둠 앞에선 무력하단 뜻인가.
그렇다면 드라시온 레이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됐다.
성녀 루비조차도 둠을 해제하지 못했던 장면을 떠올린 그리드가 바사라 황제에게 양해를 구했다.
“템빨국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싶은데 전이 마법을 차단하고 있는 결계를 해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기사 소환은 결계의 영향을 덜 받지만 매스 텔레포트는 얘기가 다르다.
반드시 결계를 해제해야 대량의 원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안 될 말씀입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대신들이 기겁했다. 거의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당연하다.
전이 마법을 차단하는 결계는 타이탄을 수호하는 기본이자 최후의 보루다.
결계가 사라지는 순간 어느 누가, 혹은 어떤 세력이 타이탄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나 살육을 펼칠지 몰랐다.
하물며 그리드를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드를 대하는 카일의 태도가 아무래도 영 수상했다. 그리드의 요청대로 결계를 해제했다가 템빨국의 병력이 날아와 황궁을 장악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그림이 대신들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반면 바사라를 비롯해 정신이 멀쩡한 사람들은 그리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그리드와 카일이 한통속이고 두 사람이 황궁을 장악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황궁은 두 사람의 것이 된 상태였을 테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그리드를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제국을 적대하며 결계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세력들인데....
‘안 그래도 대악마가 나타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적이 침입하기라도 했다간 정말로 위험할 거야.’
고민하는 바사라에게 그리드가 웃어주었다.
“혹시 모를 위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기사들은 강하니까요.”
“....알겠습니다.”
바사라의 고민은 금방 끝났다.
피아로와 아스모펠.
본래 제국의 기둥이었던 그들의 실력을 그녀는 그리드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고 신뢰하고 있었다.
“결계를 해제하세요.”
“폐하, 한 번 결계를 해제하면 다시 가동하기까지 최소 30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안 그래도 대악마가 나타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
“드라시온과 싸우기 위해선 어차피 결계를 해제해야합니다.”
“설마 국경에 흩어져있는 솔로 넘버 나이트와 사령관들을 모두 소집하실 생각이신 겁니까?”
“네.”
제국이 국경마다 실력자를 주둔시켜놓은 이유는 궁극적으로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다. 실력자들이 국경을 비우는 순간 제국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국의 심장은 타이탄이다.
일단 타이탄을 지키는 게 급선무였다.
바사라의 판단이 옳다고 느낀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국의 모든 실력자를 타이탄으로 소집한다면 그 누가 황궁을 침입한다 할지언정 반드시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
결국.
“그럼 지금 즉시 결계를 해제하겠나이다.”
대마법사 리칠리아가 대신들을 대표해서 명을 받들었다.
그와 다른 마탑의 주인들이 각자의 반지와 펜던트에 마력을 주입하자 타이탄 전역을 뒤덮고 있던 전이 마법 차단 결계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장관이군.’
타이탄 전역을 뒤덮고 있던 결계가 푸른빛을 토하며 소멸하는 광경이 그리드를 감탄시켰다.
드라시온의 마기 탓일까.
하늘이 검으면서도 붉었다.
-라우엘, 지금.
그리드가 템빨국에 있는 라우엘에게 귓속말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라우엘이 대기시켜놨던 템빨단원들과 대마법사 아슈르가 텔레포트를 타고 나타나기도 전에 낯선 불청객이 대전 중앙에 떨어져 내렸다.
“보물창고가 열렸구먼. 끌끌.”
[적야의 대도가 출현하였습니다.]
한 줄의 알림창이 그리드를 경악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