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10화
“이건....”
갑작스러운 기상의 변화.
기껏 맑게 개었던 하늘이 다시 밤처럼 캄캄해지자 원인을 찾던 마법사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수준이 높은 마법사일수록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어둠의 원인이 강력한 마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다.
황도 한복판에 나타났던 보티스의 마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기였다.
보티스보다 순위가 높은 대악마가 황도 인근에서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어디서?’
제국은 분명히 강하다.
하지만 워낙 넓은 영토를 지키려다보니 전력이 분산돼 있다는 약점이 있었다.
황도에 주둔하는 군사는 제국 전체 병력의 10분의 1이 채 안 됐고, 황도를 수호하는 인물 중 실력이 가장 고강한 자는 뇌신 카일이었다.
그를 제외한 대륙급 실력자는 10대 마법사에 속하는 2명의 노마법사와 3명의 솔로 넘버 나이트가 전부였다.
적기사단 중 상당수가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었고 레이첼과 모르이즈 같은 공작들도 평소엔 자신의 영토를 지켰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그리드가 타이탄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레이첼과 모르이즈가 그리드의 방문 소식을 듣고 달려오지 않았다면.
제국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황도 타이탄은 보티스에게 처참히 짓밟혔을 것이다.
심할 경우 바사라는 황도를 버리고 도망쳐야했을 수도 있다.
강제 천도는 제국 역사상 최악의 수치가 됐으리라.
그렇다.
17위 대악마 보티스조차도 타이탄을 위기에 빠뜨릴만한 존재였다.
한데 그보다 더 높은 순위의 대악마가 나타난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티스와 달리 황도 한복판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일까.
어느 정도 대비할 시간이 있었다.
“폐하, 이르기 송구하오나 새로운 대악마가 출몰한 것 같습니다. 어서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군대를 소집해 황궁을 수호하소서.”
스스로를 마법왕이라 칭했던 골드히트와 대립했던 인물.
백색 마탑의 주인 리칠리아가 진언했다.
대륙의 10대 마법사 중 하나로, 벌써 3명의 황제를 섬겨온 충신이다.
영원의 탑에서 도의에 어긋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진즉부터 눈치 채고 영원의 탑을 폐쇄해야한다고 주장해온 현인이기도 했다.
다른 마법사들이 기겁했다.
“이 상황에서 폐하께 황궁을 수호하라니요? 그러다가 폐하께서 곤경에 빠지시기라도 하면 어찌 책임지시려고요?”
“대악마와 맞서 싸우기 위해선 폐하의 힘이 필요하니 하는 말이오. 폐하의 적기와 존재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고 기사들의 실력을 상승시키니 황궁을 수호하기 위해선 반드시 폐하께서 자리를 지키셔야하오.”
“어림도 없는 소리!”
“황도에 주둔 중인 병력은 500명의 기사와 300명의 마법사를 포함해도 20만이 채 안 되는데 어찌 대악마와 맞서 싸우란 겁니까!”
“맞소! 병사들로 방벽을 세워 시간을 벌게끔 하고 그 동안 폐하께서도 피신하셔야하오!”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자 대신들이 본성을 드러냈다.
황제의 안위를 핑계 삼아 어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를 표출했다.
황제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기 위해 최대한 머리를 굴리려고 노력하는 그들을 리칠리아가 한심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제국 역사상 타이탄을 버린 황제는 없소. 그대들은 바사라 폐하께서 겁쟁이라 비난 받길 원하는 게요?”
“타이탄에 대악마가 나타난 경우가 없었으니 그렇지! 미친 황자 탓에 이 사달이 난 와중에 왜 옛 경우를 들이대는 것이오!!”
흥분해서 소리치던 후작이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대역죄를 범한 브누아가 무저갱으로 호송됐다곤 하나 황실의 혈통.
그를 대놓고 미쳤다고 비하했으니 황실 식구들의 노여움을 사도 마땅했다.
눈치를 살피는 그를 무시한 리칠리아가 말을 이었다.
“황궁엔 카일 공이 있소. 카일 공과 힘을 합쳐 싸우면 상대가 설령 한 자릿수 서열의 대악마라고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오.”
백 년 가까이 살며 온갖 지식을 습득한 리칠리아라고 해도 한 자릿수 서열의 대악마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썩 근거 없는 희망은 아니었다.
이미 먼 옛날 뮐러라는 인간이 헬가오를 봉인한 전력이 있기 때문.
3대를 섬긴 제국의 충신 리칠리아는 제국의 저력을 믿었다.
황도의 전력만으로도 대악마와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근거엔 한 가지 오류가 있었다.
“글쎄요.... 과연 카일 공이 협력할지....”
대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듀란달 황자에게 향했다.
뇌신 카일은 2황자 듀란달의 측근.
카일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듀란달뿐이다.
대놓고 황위를 노리며 바사라와 대립하는 듀란달이 과연 카일을 빌려줄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이번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만 볼 게 뻔하다.
바사라가 대악마에게 죽길 빌면서 말이다.
모두가 생각할 때였다.
“카일 공의 협력이 필요하다라.”
언제나처럼 불만스런 표정으로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듀란달 황자가 입을 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무릇 신하라면 조국의 위기를 좌시해선 안 되는 법.”
“.....”
“.....”
자신의 야망을 이루고자 황제와 대립하며 조국의 정세를 불안하게 만드는 당사자가 신하의 도리를 운운하다니.
대신들이 콧방귀 뀌는 그때였다.
“카일 공이라면 당연히 폐하를 돕지 않겠소? 폐하께서 도망치지 않고 싸우겠다고 하시면 카일과 검은 발 기사단 전원이 폐하의 곁에 남아 함께 싸울 것이오.”
“....!”
“....!”
전혀 예상치 못한 듀란달의 발언에 대신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설마 듀란달이 이런 태도를 보일 줄이야?
레이첼과 모르이즈, 그리고 1황자 롤랑 또한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오직 바사라만이 흐뭇하게 미소 지을 뿐이다.
듀란달이 상황을 지켜보던 레쉬에게 명령했다.
“카일 공을 모셔 와라.”
“예!”
힘차게 대답하는 레쉬의 표정이 밝았다.
그토록 꿈꿨던 기사가 됐지만 주인의 행태를 볼 때마다 후회에 휩싸였던 그는 이 순간 변화한 듀란달의 모습에 감격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이긴 했지만 듀란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바사라가 여태껏 보여준 호의가 있지 않은가.
듀란달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견제해도 듀란달을 벌하지 않고 참아줬던 그녀다. 그녀는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핏줄의 정을 상기시켜왔다.
그럴 때마다 핏줄은 무슨 핏줄이라며, 방계 따위가 가소롭다며 치를 떨던 듀란달이었으나....
‘위기의 순간에선 결국 핏줄의 편에 서시는구나.’
가끔 보면 금수보다 못한 놈이 아닐까 걱정했건만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들뜬 표정으로 대전을 떠난 레쉬가 카일이 머무는 궁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는 카일을 간신히 설득해 대전으로 데려왔다.
“부르셨소.”
대전에 들어온 카일의 태도는 영 떨떠름했다.
레이첼과 모르이즈를 포함한 대신들에겐 눈길 한 번 보내지 않았고 황제 바사라에게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심지어 주인으로 섬기고 있는 듀란달 황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에 남은 유일한 기둥은 지독히도 오만했다.
그를 희망으로 삼아야하는 제국의 입장에선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칫 황도를 버려야할지도 모를 위기의 상황.
바사라와 대신들은 그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 굳이 그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가 괜한 화를 불러일으킬 멍청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듀란달이 운을 뗐다.
“귀공이라면 이미 눈치 챘겠지? 황도 인근에 새로운 대악마가 나타났다.”
“알고 있소. 보티스보다 한 급 위 같군.”
대신들이 탄식했다.
카일이 모든 상황을 알면서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단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것이었다.
카일은 황도 한복판에서 날뛰는 보티스를 잠자코 지켜보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
저자가 과연 제국의 신하가 맞는 걸까.
믿어도 되는 걸까?
모두가 카일을 의심했다.
듀란달도 마찬가지였다.
듀란달은 카일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긴 했지만 카일을 도통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충성의 맹세조차 듣지 못했다.
듀란달이 카일을 회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많은 재물을 줬기 때문이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주면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만들어주겠노라 던진 약속 덕분일지도 모른다.
설령 카일 덕분에 황제가 됐다고 해도 꼭두각시가 되지 않았을까.
평생 카일에게 이용당하며 불안에 떨지 않았을까.
자신은 제2의 그랜드마스터를 탄생시키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카일의 힘을 빌려 황위를 빼앗으려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새삼 깨달은 듀란달이 한숨 쉬며 말했다.
“알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군. 대신들과 함께 황제폐하를 도와 황궁을 지켜주길 바라오.”
“황제폐하를 도와?”
듀란달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단 사실을 이제야 눈치 챈 카일이 피식 웃었다.
마치 비웃는 듯했다.
눈살을 찌푸리는 듀란달에게 카일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글쎄.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게 현명한 선택 같은데.”
“타이탄은 제국의 심장이며 상징입니다. 도망칠 순 없어요.”
잠자코 있던 바사라가 입을 열었다.
황좌에서 일어난 그녀가 카일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카일 공, 저를 위해서 싸워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은 않겠어요. 전 황제 쥬앙데르크께 입었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제국을 지켜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카일은 기둥들 중에서도 가장 최약체였다.
솔로 넘버 나이트보다 약했던 시절도 있다.
하지만 쥬앙데르크는 카일의 잠재력을 보았고, 믿었다.
카일의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며, 그를 기둥으로 삼는 건 제국의 수치라고 주장했던 대신들의 외침을 묵살하고 카일을 곁에 뒀던 인물이 바로 쥬앙데르크다.
그리고 오늘날 카일은 쥬앙데르크의 믿음에 화답하듯 실력을 꽃피웠다.
전성기 시절의 다른 기둥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
“.....”
쥬앙데르크의 이름이 나오자 카일이 조소를 거뒀다.
그리고 잠시 고민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싫소. 난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하고 싶군.”
“뭣....!”
대신들이 술렁였다. 화가 나 얼굴을 붉히는 자들도 있었다.
황제의 명령도 아닌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는 카일을 곱게 볼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카일은 쥬앙데르크에게 빚이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제국의 녹을 받으니 제국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그가 도망치겠다고 말하자 모르이즈는 살심마저 드러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그때였다.
“싫으면 빠져야지 어쩌겠어. 나라도 혼자서 싸워야겠군.”
갑자기 사라졌던 그리드가 대전에 입장했다.
무저갱에서 간신히 탈출한 후, 레쉬에게 귓속말로 상황을 전달 받고 급히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오! 템빨왕 전하!!”
콧대 높은 제국의 대신들이 그리드를 열렬히 환영했다.
제국을 위해서 싸워준 은인을 반겨주는 건 당연했다.
황제 바로 곁으로 자리를 안내받은 그리드가 좀 쉬려고 자리에 앉는 순간이었다.
“테, 템빨왕 전하를 뵙습니다!!”
황제와 황자들에겐 목례조차 안 했던 카일이 그리드를 향해 넙죽 절을 올렸다. 그리고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전하께서 싸우신다면 저도 싸워야지요! 끝까지 남아서 전하와 함께 싸우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