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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43화 (1,233/1,794)

템빨 63권 - 09화

[분쟁의 대악마 아모락트가 지옥 어딘가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알을 목도한 순간 떠올랐던 이 한 줄의 메시지가 유라를 행동시켰다.

유라가 야탄의 종이었던 시절부터 유라에게 접근했던 대악마.

이미 먼 옛날부터 바알과 대립하고 경쟁하는 관계인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지옥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희망 중 하나였다.

유라는 반드시 그녀를 만나야한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녀를 찾기 위해 지옥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아모락트의 성향도 바알과 다르지 않겠지.’

유라가 추정하기로 아모락트의 서열은 최소 5위에서 최대 2위다.

최상위 서열 대악마의 정보는 바알과 베리아체 외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어 확신할 순 없지만, 여러 정황상 2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무릇 대악마란 서열이 높을수록 악(惡)이 짙어진다.

아모락트는 만악의 근원인 바알과 비슷할 정도로 사악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이제이라는 말이 있듯이 유라는 바알을 잡기 위해선 반드시 아모락트를 이용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절대적인 존재의 도움 없이는 바알을 토벌하는 게 불가능했고, 바알을 토벌하지 않는 이상 지옥은 영원불멸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모락트라면 마신 슈트리오의 약점도 알고 있을 거야.’

지옥의 대장장이 헬스미스는 말한 바 있다.

그리드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신의 심장이 필요하다고.

‘가자.’

5번 지옥.

이지 없이 배회할 뿐인 마물조차도 레벨이 600이 넘는 지역.

감당하기 힘든 그곳을 은밀하게 이동하며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긴 유라는 두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꿋꿋이 앞으로 나아갔다.

5번 지옥의 주인이 기거하는 성으로 찾아가 정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대가는 죽음일 것이었다.

또한 5번 지옥의 주인이 아모락트가 아닐 경우 커다란 절망감을 느낄 것이었다.

다음엔 5번 지옥보다 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3번, 2번 지옥을 차례대로 방문해봐야 할 테니.

“.....”

배회하는 몬스터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참고 이동하는 유라의 검은 눈동자가 계속해서 흔들린다.

그리드를 돕기 위해 1번 지옥을 방문했던 그날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유라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황후 아리아떼는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운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했으며, 늘 선행을 베풀었다. 그녀는 만인의 귀감이었다. 사람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다.

황비 마리가 나타나기 전까진 말이다.

‘왜....’

어째서 황제는 그 욕심 많은 계집을 비로 맞았는가.

자신의 부인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그딴 무능한 놈이 어떻게 황제가 됐단 말인가.

나는.... 나는 왜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했는가.

왜, 왜, 왜, 왜....

브누아 황자는 자신을 포함한 제국의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마리가 아리아떼를 시해한 범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쉬쉬했던 황제를 증오했고, 더 이상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는 백성들을 경멸했다.

‘저주한다!’

마리를, 황제를, 백성을, 그리고 나를.

“저주한다!!”

키오오오오──!

끝없는 심연으로 추락 중인 브누아 황자가 재차 소리쳤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파공성은 마치 그의 외침에 응답하는 귀곡성 같았다.

“제국의 모든 인간을! 제국의 모든 것을 저주한다!!”

어머니께 입었던 사랑과 은혜를 잊은 신민들이 나의 어머니처럼 고통 받기를.

어머니를 잃은 뒤로 아무런 가치도 남지 않은 이 괴물 같은 나라가 멸망하기를.

브누아 황자는 간절히 바랐고,

-떠올랐다.

심연 속에 웅크려있던 악마가 눈을 떴다.

-나는 저주를 염원하는 자들의 희망.

비프론즈.

스스로를 잊은 채 무저갱에 갇혀있던 악마.

브누아의 염원에 응답하는 그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저주의 대악마....

검성 뮐러에게 봉인 당했던 제11위 대악마.

수백 년을 영혼인 상태로 떠돌다가 크라우젤에게 토벌 당했고, 그때의 충격으로 전생의 기억을 잃은 채 윤회에 성공한 그의 이름을,

“드라시온!! 나의 저주를 들어주소서!!”

이 순간 브누아가 외쳤다.

계약은 곧바로 성립됐다.

-알았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앙!!

짙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던 무저갱 전체에 붉은 마력이 폭사했다.

무저갱에 갇힌 죄수들의 증오와 저주가 갈 곳을 잃은 채 떠돌다가 드라시온의 마력에 호응한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아악!!”

죄수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드라시온은 계약자의 소원을 이뤄주는 대가로 계약자의 영혼과 육신을 탐하는 존재.

무저갱에 갇힌 채 누군가를 저주해온 죄수들은 모조리 드라시온의 계약자가 되었고 그 대가로 영혼과 육신이 집어삼켜졌다.

앞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고통을 받게 될 그들 중에는 황비 마리도 포함돼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 절규하는 마리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어떤 인영이 투영됐다.

붉은 배경을 등진 채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인물.

놈은 다름 아닌 황자 브누아였다.

“브누....아아악!!”

차라리 처형대의 이슬로 저무는 편이 행복했으리라.

이 끔찍한 고통이 죽어서도 계속될 거란 사실에 절망하면서, 황비 마리는 비탄 속에 죽어갔다.

“하핫! 크하하하하하하하핫!!”

브누아의 광소가 죄수들의 절규를 집어삼키며 울려 퍼졌다.

그의 영혼과 몸 또한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두려워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죽어서도 계속될 이 고통을 마리와 공유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여기며 도리어 환희에 찼다.

파슥, 파스슥.

과거 지옥문을 연 대가로 썩어들어 갔던 왼팔이 가장 먼저 소멸한다.

이어서 두 발이, 다리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눈물 흘리면서도 광소를 터뜨리는 브누아의 귓전에,

“기사 소환!”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스며들었다.

‘누....구?’

“루비!”

스파아아앗!!

빛과 함께 떨어지는 여인의 모습이 브누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이었다.

“정화의 빛.”

번쩍──!

푸르고 따뜻한 기운이 무저갱을 가득 채운다.

무저갱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 마기를 순식간에 소멸시키는 기운이었다.

-뭣이....!

죄수들의 영혼과 육신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운 뒤 최후의 만찬(브누아)을 음미하고 있던 드라시온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성녀.

대악마가 가장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훼방을 놓았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놈!

쿠와아아아아앙!!

심연 깊은 곳에 있던 드라시온이 위로 솟구쳐 올랐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계속해서 빛을 내뿜는 성녀의 심장을 겨누고 쏘아졌다.

하지만 놈의 손톱은 성녀의 심장에 닿지 못했다.

쩌엉!!

유리처럼 투명한 검이 드라시온의 손톱을 막아내며 붉게 달아오르더니 드래곤의 브레스를 연상시키는 화염을 토해 드라시온의 살갗을 쓰리게 만들었다.

“브누아!”

드라시온에게도 익숙한 음성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자의 이름을 부른다.

온통 절망뿐인 무저갱 속에서도 단단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

쩌저저정!!

화려한 검무로 드라시온을 떨쳐낸 그가 브누아 황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쥬앙데르크 황제가 내게 너를 부탁했다!”

“....!!”

희미하게 잠겨가던 브누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늘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아버지가 최후의 순간에 나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울컥!

어떤 감정이 브누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잊었던 고통과 거대한 후회가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브누아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라시온의 저주는.... 제국을 뒤덮고 검성에게 향할 것이오.”

간신히 말하는 브누아의 눈동자가 다시 빛을 잃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리드를 향해 뻗었던 외팔에서 힘을 뺀 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오빠!”

정화의 빛의 범위에서 벗어나 추락하는 브누아의 모습에 당황한 루비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그리드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빛 너머의 심연이 너무 짙어서 순보로 도약할 공간을 지정하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바로 눈앞엔 드라시온이 버티고 있었다.

비프론즈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

순수를 버리고 악의와 적의로 똘똘 뭉친 대악마가 그리드를 노려보았다.

애초에 그리드의 의리는 여기까지였다.

그가 동생까지 불러 브누아를 살리려고 시도했던 이유는 쥬앙데르크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렸기 때문.

스스로 삶을 포기하며 심연의 구렁텅이로 떨어진 브누아를 굳이 무리해서 뒤쫓았다가 동반 자살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사 소환, 메르세데스.”

“전하의 부름에 응합니다.”

“루비를 데리고 도망쳐.”

무저갱은 텔레포트와 귀환 주문서가 작동하지 않는다.

루비를 무사히 살려 보내기 위해선 누군가를 지키는데 특화된 메르세데스의 도움이 절실했다.

“....알겠습니다.”

자신을 남겨두고 떠나라는 그리드의 명령에 잠시 굳는 메르세데스였지만 이내 대답하며 루비를 품에 안았다.

-성녀는 살려둘 수 없다.

은익을 펼쳐 날아오르는 메르세데스를 드라시온이 추적하려고 했지만, 드라시온이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것처럼 이번엔 그리드가 드라시온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많이 변했네, 비프론즈.”

-변한 게 아니라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거지.

“너는 악마치고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었어.”

-나도 너와 만났던 기억이 썩 나쁘진 않았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리드는 전력을 다해서 드라시온의 진격을 방해했고 드라시온은 크게 어렵지 않게 그리드를 몰아붙였다.

바로 직전에 보티스를 레이드했던 그리드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궁극기가 여전히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린 그리드는 풀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악 물고 버티는 이유는 루비와 메르세데스를 위해서였다.

“엘핀스톤!”

“블러드 필드.”

등장과 동시에 고유 결계를 전개하는 엘핀스톤의 존재가 상황을 반전시켰다.

블러드 필드의 효과로 흡혈량이 급격히 상승한 그리드가 극한의 수혈을 전개하자 불사가 터지기 직전까지 떨어졌던 생명력이 순식간에 충전된 것이다.

흡혈 반지와 각종 보호막, 그리고 회복 스킬들을 보유한 그리드의 저력을 엿본 드라시온이 손가락을 퉁겼다.

“둠.”

일부 고위 대악마들이 사용하는 치유 반전 스킬.

[둠에 걸렸습니다.]

[둠이 유지되는 동안 언데드 상태가 됩니다.]

[대상에게 59,97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엘핀스톤의 반지 효과로 13,194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미친?’

언데드화 되는 건 상태이상으로 판정하지 않는 건가?

저항하지 못하는 새로운 경지의 기술.

진정한 고위 대악마의 실력을 알게 된 그리드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앞으로 상대해야할 적들의 수준을 떠올리니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리드의 공격에 맞고 스턴에 걸려 잠시 멈췄던 드라시온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절이라니.

태어나 처음 겪는 일이다.

검성 뮐러에게 목숨을 잃었던 그날조차도 이런 수모는 겪어보지 못했다.

‘뮐러의 시대보다 지금 시대의 인간들이 더 강한 건가?’

굳어선 채 그리드를 괴물 보듯 하는 드라시온을 간신히 따돌리고 무저갱을 빠져나온 그리드가 쯧, 혀를 찼다.

“둠? 저런 놈을 어떻게 이기지?”

-지금 바로 지상에 올라가는 건 위험할 수도....

제국을 덮쳤어야할 드라시온의 저주가 잠시 무저갱에 봉인됐다.

<궁극의 무(武)>가 일으킨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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