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08화
플레이어 홀로 대악마와 맞서 싸우는 시대가 올 거라고 누가 감히 예견했을까.
고작 32위 대악마 벨리알에게 멸망의 위기를 겪었던 인류는 그런 날이 찾아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한데 이 순간.
“키야아아아아!!”
화염을 토하는 그리드의 검이 보티스의 심장을 꿰뚫어버렸다.
『제국의 공작들과 군대가 도움을 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작은 보탬에 불과했죠.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리드는 이미 승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리드가 혼자서....! 플레이어가 혼자서 대악마를 토벌한 것입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환희, 전율, 희망.
보티스의 죽음과 함께 독무가 소멸하고 맑은 하늘을 되찾은 제국 황도 타이탄에 온갖 감정이 뒤섞인 사람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악마가 흘린 피로 더럽혀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거친 호흡을 토하는 그리드의 모습은 사나운 맹수를 연상시켰지만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은 늘 그랬듯이 영웅이며 우상이었다.
“그리드 님, 인터뷰 가능하신가요? 현재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부분은 대악마가 왜 스턴에 걸린 거냐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
“그리드 형! 싸인해 주세요!!”
무시무시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자신의 화면에 그리드가 보이게끔 어떻게든 구도를 잡은 플레이어들은 스크린 샷을 찍기 바빴고 어린 소년소녀들은 싸인 한 장 받아보겠다고 고래고래 악을 썼다.
다짜고짜 마이크를 들이미는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무시한 그리드가 아이들에게만큼은 상냥히 웃어주었다.
“아이디가 뭔데?”
“아이디 말고 이름으로 적어주세요! 이름! 전 다니엘이에요!!”
“제 이름은 앤이요!”
“하하, 그래.”
신나서 떠드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리드가 종이를 건네받고 싸인을 시작하자 아이들이 소망을 빌었다.
“저도 그리드 형처럼 대장장이가 될 거에요!”
“저는 검무를 쓰고 싶어요! 그리드의 후예가 될래요!”
멈칫.
이젠 너무 능숙해진 싸인을 적어가던 그리드의 펜이 잠시 멈췄다.
그리드의 후예.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미래가 그리드의 머릿속에 펼쳐지며 그의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자.”
그리드가 곧 펜을 내려놓았다.
템빨왕 그리드가 다니엘에게.
칸처럼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기를.
템빨왕 그리드가 앤에게.
나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엑! 글씨 못 써! 못 알아보겠어!”
“하하....”
“뭐라고 쓴 거예요?”
요즘 아이들은 현실과 Satisfy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두 세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드를 현실에서 만나 현실에서 싸인을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등의 아쉬움을 느끼지 못한단 뜻이다.
마냥 들떠서 묻는 아이들에게 그리드가 대답해주었다.
“존경 받는 사람이 되라고.”
***
<보티스의 언월도>
등급:레전드리(세트)
내구력:1,500/1,500 공격력:2,280
*절삭률 50퍼센트 상승.
*중독 속성 부여 시 발생 효과 2배 상승.
*착용자의 공격 속도가 높을수록 추가 데미지 발생.
★쌍수로 사용 시 무기 공격력 추가 상승.
제17위 대악마 보티스가 애용하던 두 자루의 언월도 중 하나입니다. 두 자루의 언월도를 동시에 사용하면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하는 요도입니다.
무게:4,590
사용 조건:레벨 430 이상.
‘성능도, 조건도 심플해서 좋군.’
보티스가 드롭한 장비류 아이템은 단 2개.
두 자루의 언월도였다.
단일 성능도 준수했지만 이도류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쥐어지면 최종병기급의 위력을 발휘할 듯했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건데....’
두 자루의 무기를 동시에 휘두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양팔을 동시에 움직이다보면 뇌에서 오류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특히 적의 수준이 높을수록, 그러니까 고난도의 계산과 동작을 요구하는 전투일수록 이도류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그리드가 초창기에만 잠깐 이도류를 사용했다가 관둔 이유이기도 하다.
‘이도류 마스터리 스킬은 대체 어떻게 얻는 거야?’
이도류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페널티(무기 데미지 감소)를 삭제함과 동시에 행동을 보정해준다는 유니크급 패시브 스킬.
템빨단원 중 누군가가 그 스킬을 얻게 된다면 이 무기를 양도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때까진 내가 잘 간수해 놓.... 가만?’
그리드가 불현듯이 국가대항전을 떠올렸다.
지난 국가대항전에서 이도류를 아주 능숙하게 사용했던 인물이 한 명 있다.
그리드가 <검은 귀신>이라는 조건부 쌍수검을 만들도록 영감을 줬던 인물.
다름 아닌 크라우젤이다.
‘누가 천재 중의 천재 아니랄까봐 마스터리 스킬도 없이 이도류를 완벽하게 다뤘었지....’
이젠 심지어 검성까지 됐으니 이도류 마스터리 스킬도 생기지 않았을까?
아니, 검성 고유의 마스터리 스킬이라면 이도류 마스터리를 포괄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좋아. 이건 크라우젤한테 넘기자.’
오직 크라우젤만이 이 무기의 진정한 위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크라우젤 외의 누군가에게 양도하는 건 아깝게 느껴질 정도.
게다가 크라우젤은 엄청난 갑부다.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다.
아이템을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한 그리드가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휘파람을 불었다.
크라우젤에게 넘겼다간 후환을 걱정해야한다는 등의 생각은 일절 품지 않았다.
그리드와 크라우젤은 경쟁자이기에 앞서서 친구였으니까.
“나는 단지 어머니의 억울함을 해소해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어머니를 다시 한 번 만나 뵙고 싶었을 뿐이다! 이 허울뿐인 평화를 저주했을 뿐이다....!!”
그리드가 보티스와 싸우는 동안 기사들에게 체포당한 브누아 황자가 무저갱행 마차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위한 복수심에 휩싸인 채 살아온 그는 부쩍 늙어있었다.
7살 터울인 맏형 롤랑보다 더 깊은 주름이 얼굴에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 자칫 중년 같았다.
‘허무할 테지.’
그리드는 브누아 황자를 동정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어머니의 죽음에 무관심했던(브누아의 입장에서 봤을 땐) 부친과 형제를 대신해 마리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웠건만.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어머니를 지상에 현현시키고 마리의 죄를 낱낱이 고하시게끔 만들 계획이었건만, 이미 마리의 죄는 밝혀지고 말았고 제국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이젠 그 누구도 황후 아리아떼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브누아를 제외한 제국의 신민들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누아의 감정이, 열망이, 세월이 모두 덧없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 무저갱행 마차에 탑승하는 브누아 황자의 두 눈에 담긴 증오와 절망을 그리드가 안타깝게 지켜보는 그때였다.
“무용으로 백성들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 바사라 황제가 현장에 도착했다.
제국신민을 대표해서 깊이 허리숙인 그녀가 그리드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황제를 하늘이라 배웠던 백성 상당수가 허리를 숙이는 바사라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바사라는 개의치 않았다. 새로운 황제의 모습에 백성들이 차차 적응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그리드 곁으로 다가온 바사라가 조용히 속삭였다.
“브누아를 처형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브누아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그리드를 보고 오해한 듯하다.
사실 그리드는 브누아가 처형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조국을, 자신의 백성을 해치려한 대역죄인을 살려둬서야 바사라의 민심만 나빠질 테니까.
“전 황제폐하의 유지 때문입니까?”
전 황제 쥬앙데르크는 한 가지 유지를 남긴 바 있다.
황자들을 되도록 보살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이 부족하거나 뒤틀린 이유는 순전히 자신의 업보라며, 그들이 타고난 성정은 나쁘지 않으니 잠시라도 지켜봐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리드에게 남긴 유언이었지만 당시 목격자가 많아 바사라의 귀에도 소식이 전달됐다.
혹시 쥬앙데르크의 유언이 바사라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건 아닐까.
근심하는 그리드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바사라가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백성들을 해치려했던 자를 전 황제의 유지를 핑계로 용서할 순 없죠. 브누아를 살려두려는 이유는 그 아이가 악마에 정통하기 때문이에요.”
이용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좋은 명분 덕분에 조카뻘인 아이를 해치지 않아도 되어 안도하고 있을 테지.
바사라의 성격을 뻔히 아는 그리드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얼굴을 굳혔다.
‘그런데 기사들이 무슨 수로 브누아를 제압한 거지?’
물론 제국의 기사들은 무용이 출중하다.
특히 적기사단의 명성은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브누아 황자를 체포한 기사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리드의 통찰력으로 봤을 땐 고작해야 20번대 적기사들이었다.
사하란 황실의 혈통답게 적기를 다룰 줄 아는 브누아를 고작 3명의 20번대 적기사가 제압하는 게 가능할까?
단언컨대 불가능하다.
브누아가 반쯤 폐인이 된 상태인지라 온갖 변수가 발생했다고 해도 타고난 혈통과 재능의 벽을 넘진 못할 것이다.
사하란의 혈통이라는 건 그만큼 특별했다.
‘말인 즉 일부러 체포당했다?’
왜?
‘설마....?’
그리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악마에 정통한 브누아와 무저갱에 머무는 중인 수수께끼의 악마 비프론즈.
잠시 후 성사될 둘의 만남이 과연 우연일까?
애초에 브누아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념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황자의 지위를 포기하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온 대륙을 떠돌아다녔을 리 없다.
그런 인물이 과연 쉽게 삶을 포기할까?
조국의 심장에 대악마를 풀어놓는 대역죄를 저질러 스스로 명을 재촉할까?
‘처음에는 자포자기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치부하기엔 무저갱에 끌려갈만한 대역죄를 범한 것도, 하필 무저갱에 비프론즈가 있다는 점도 모두 마음에 걸린다.
“예상치 못한 사고였네요. 이렇게 된 이상 음식점은 내일 찾아보시고 우선 황궁으로 돌아가 피로를 푸시는 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바사라의 뺨에 은근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갑자기 발생한 사고 탓에 바빠진 자신을 배려해주고자 자리를 비켜주는 그리드의 상냥함에 다시 한 번 반한 것이다.
***
적기사단은 죄인의 호송을 무척 서둘렀다.
죄인의 정체가 다름 아닌 제국의 황자였으니 백성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봐야 좋을 게 없던 것이다.
“잠깐!”
저 멀리 보이는 무저갱 입구에 브누아를 태운 마차가 도착한 모습을 발견한 그리드가 소리쳐봤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목소리가 닿질 않았다.
결국 검을 뽑은 그리드가 초(超) 상태에 돌입해 순보를 전개했다.
순식간에 무저갱 입구에 선 그의 귓전에 브누아 황자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당대 최고의 명사답게 눈치가 빠르시군.”
“....!”
그리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빛을 빨아들일 정도로 깊은 어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벼랑 즉, 무저갱으로 브누아 황자가 몸을 던지고 있었다.
브누아를 계단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적기사들이 뭘 어떻게 말릴 틈도 없었다.
“순보!”
당황한 그리드가 브누아를 붙잡기 위해 몸을 날렸지만....
터엉!!
때마침 펼쳐진 마력의 장막이 무저갱의 입구를 둠처럼 감싸 그리드를 가로막았다.
장막에 충돌했다가 튕겨 나온 그리드가 곧바로 검을 휘둘러 장막을 베어 없앴지만 브누아는 이미 어둠 깊숙한 곳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같잖은 핑계들로 마리의 죄를 공표하지 않은 전 황제와 현 황제를 나는 저주한다.”
곧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브누아의 절규가 끊임없이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