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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41화 (1,231/1,794)

템빨 63권 - 07화

17위 대악마 보티스의 몸체는 10미터에 육박했다.

쩍 벌어진 아가리가 깊은 동굴과도 같아서 그 안에 한 번 발을 들이는 순간 두 번 다신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런 놈에게 뛰어드는 그리드의 모습은 자칫 어리석어 보였다.

-혼자서 달려든다고?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왜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는 거야?

증명은 약자의 권리이며 도전자의 의무다.

이미 지존인 그리드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봐! 그리드!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기다리라고!!”

시청자들과 현장의 플레이어 모두 그리드의 오기를 달갑지 않아했다.

그리드가 전투불능이 되거나 죽기라도 했다간 더 큰 피해가 발생할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

어째서 그가 딱 이 타이밍에 타이탄에 있던 건지 사람들은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그리드를 의지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그리드가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본인의 안전을 최우선해주길 바랐다.

그리드가 굳이 혼자 대악마와 맞서 싸워 위험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의 당혹과 걱정이 깊어질 때였다.

투쾅-!

한 마리의 용처럼 승천한 그리드가 하늘 위 보티스의 거체를 꿰뚫었다.

보티스의 등 뒤로 올라 선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유명한 살(殺)의 검무 아니, 이제는 검술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한 일격이 보티스의 가슴에 구멍 하나를 더 뚫어놓았다.

“취릭!!”

꽈창!!

재차 공격을 연계하려는 그리드의 옆구리를 보티스의 꼬리가 강타했다.

몸을 꽈배기처럼 비튼 보티스의 양손에 쥐어진 언월도가 각기 다른 궤도로 사선을 그리자 그리드는 피할 길이 없어보였다.

『위험....!』

지켜보는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철컥!

그리드의 왼 손에 방패 한 자루가 나타나 쥐어졌다.

까가강!!

엑스자로 교차하는 보티스의 강력한 공격이 방패에 가로막혔다.

-저걸 막고도 멀쩡하다고?

방패를 다뤄본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다.

방패는 만능이 아니다.

방패가 흡수할 수 있는 데미지엔 한도가 있다. 특히 독 속성 공격은 방패를 부식시키는 부가 효과를 지녔기 때문에 방패의 방어력이 온전히 적용되지 않았다.

하물며 대악마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낸다면.... 방패는 일격에 넝마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데 그리드의 방패는 흠집 하나 나지 않고 멀쩡했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보티스의 길쭉한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취릭. 얼마 전에 마르코시아스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네놈의 소행이었나?”

“복수라도 해주고 싶나?”

“취취칫!! 인간들의 농담이라는 건 재밌군.”

석화의 방패.

제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가 드롭한 방패는 정면에서 바라보는 대상을 높은 확률로 석화시킨다.

하지만 대악마가 석화 등의 상태이상에 걸릴 리 만무했다.

쩌정! 쩌저저정!!

석화의 방패를 태연히 응시한 보티스가 양손의 언월도를 횡으로 계속 휘둘러댔다.

놈의 몸체가 꽈배기처럼 꼬였다가 다시 펼쳐질 때마다 가속도를 얻는 언월도의 연속 베기는 급기야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시청자들은 폭죽놀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언월도와 방패가 맞부딪칠 때마다 튀어 오르는 불똥만 보인 까닭이다.

‘이런 식으로 싸우면 안 되겠는데.’

탐색전을 펼쳐본 그리드가 판단하며 뒤로 크게 물러났다.

연계될수록 가속력을 얻는 보티스의 공격 속도가 워낙 빠른 탓에 자꾸만 초월경이 발동한 까닭이다.

‘모든 공격을 인지하는’ 상태가 되는 초월경은 스태미나를 급감시키는 요인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아끼는 게 좋았다.

“하찮군. 취릭. 벌써부터 도망치는 거냐?”

보티스가 반으로 갈라진 혀를 낼름거리며 그리드를 도발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리드는 자신을 향하는 조롱과 비난엔 워낙 익숙했다. 그를 도발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그의 주변인을 건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그리드를 처음 본 보티스가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갓 핸드.”

촤르르르르륵!

그리드의 주변으로 10개의 흑금색 손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손가락을 펼치더니 보티스를 가리켰다.

“매직 미사일.”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수십 줄기의 백색 섬광이 거미줄을 그린다.

가장 가까운 궤도로부터 날아온 섬광은 피하고, 이어지는 섬광들을 언월도로 쳐내서 방어하던 보티스가 결국 몇 개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짐짓 긴장하던 보티스가 허탈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딴 잡기술을....”

매직 미사일의 데미지는 그리드의 지력과 비례하며 끽해야 수천 단위에 불과하다.

20억 단위 생명력을 자랑하는 보티스에겐 작은 위협조차 되지 않는 수치였다.

그 사실을 모를 그리드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보티스의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에 있었다.

“....!”

매직 미사일을 신경 쓰는 동안 시야에서 사라졌던 인간의 기척이 바로 곁에서 느껴지자 반사적으로 언월도를 휘두른 보티스가 당황했다.

디코이.

그리드의 마력을 품은 마법의 새가 언월도에 베여 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꽈드득!

보티스의 몸이 언월도를 휘두른 방향 그대로 뒤틀렸다. 180도 회전한 그의 시야에,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 발도하는 그리드의 모습이 포착됐다.

“취릭! 이럴 줄 알았다!”

명백한 조소.

인간의 같잖은 꾀가 가소롭다는 듯이 입 꼬리를 말아 올린 보티스의 언월도가 호선을 그림과 동시였다.

“회(回).”

쩌정!!

그리드의 목에 꽂히는 듯했던 언월도의 궤도가 거짓말처럼 꺾이더니 도리어 보티스의 가슴을 베었다.

놀라 눈을 치뜬 보티스가 비늘에 박힌 언월도를 신경적으로 뽑아내는 그때,

서걱!!

섬전 같은 종베기가 그리드의 쇄골과 가슴을 크게 베었다.

“....!!”

보티스가 괜히 쌍수를 쓰는 게 아니다.

놈은 애초에 왼 손으론 횡베기를, 오른 손으론 종베기를 휘둘렀고 그중 그리드가 반격한 건 눈에 보이는 횡베기였다.

사각에서부터 날아온 종베기는 예상치도 못했다.

그리드 입장에선 시간 차 없는 기습을 당한 셈이었다.

휘청!

생명력 게이지가 급격히 하락한 그리드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급기야 맥없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보티스는 굳이 그를 뒤쫓지 않았다. 상공에 가만히 선 채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취릭. 죽어라.”

파직! 파지지직!!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흑색의 마력이 응축됐다.

기상을 변화시킬 정도로 거대한 마력의 파장이 발생했다.

저것이 쏘아지는 순간 표적이 된 그리드는 잿빛으로 산화하리라....

해설진과 시청자들, 그리고 현장의 모든 사람들이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낙룡(落龍)....”

콰창! 콰차차차차차차차차창!!

보티스의 머리 위로 또 다른 그리드가 나타나더니 용이 되어 떨어졌다.

이마가 짓뭉개진 보티스의 두 눈이 좌우로 뒤틀렸고 한껏 벌어졌던 아가리는 꽉 다물리며 긴 혀가 송곳니에 꿰뚫렸다.

“으갸갸갸갸갹....!”

충격에 발성기관이 망가진 걸까.

기이한 비명을 토하며 스프링처럼 구겨진 보티스가 앞서 추락하던 그리드보다 훨씬 더 빨리 지상에 곤두박질쳤다.

놈을 뒤쫓아 온 갓 핸드들이 온갖 무기를 쑤셔 박았고,

“....극살파(極殺派).”

그리드의 검무는 아직 끝나지도 않았다.

스파아아아아아앗──!

보티스의 눈이 하얗게 뒤집혔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베기와 찌르기에 온 몸이 난도질당한 충격을 감당 못하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스킬빨, 칭호빨, 직업빨, 룬빨, 그리고 템빨.

삼위일체를 넘어서는 경지에 도달한 그리드의 폭딜이 새로운 역사를 썼다.

[대상에게 153,277,50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큰 피해를 한 번에 입은 대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일발 데미지 최고 기록을 갱신하였습니다!!]

[칭호, <한 방에 한 놈!>의 효과가 상승하였습니다! 치명타 데미지가 10퍼센트 추가로 상승합니다!]

[당신은 독보적인 데미지 업적을 세우고 있습니다. 무신(武神) 제라툴의 가호를 받아 공격력 수치와 방어력 관통 수치가 소폭 상승...]

[....!!]

[무신(武神) 치우가 개입합니다!!]

[치우의 개입으로 제라툴의 가호가 삭제됩니다!!]

[칭호, <한 방에 한 놈!>이 <무신(武神)을 만난 자>로 변경됩니다.]

[<무신(武神)을 만난 자>의 효과로 치명타 데미지가 200퍼센트 상승하고 칭호 효과 발동 시 보통의 확률로 <궁극의 무(武)> 스킬이 발동합니다.]

<궁극의 무(武)>

패시브

대상에게 보통의 확률로 저항 불가, 해제 불가의 스턴을 넣습니다.

이 효과는 대상의 지위, 종족, 격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스턴의 지속 시간은 최소 1초에서 최대 8초입니다.

[무신 제라툴이 분개합니다!]

[‘내가 진짜 무신이다....’ 제라툴의 공허한 외침이 천상에 메아리칩니다.]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던 무신의 추종자들이 적해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

저항 불가, 해제 불가의 스턴.

대상이 상태이상을 저항하는 전설, 혹은 네임드 보스일지라도 궁극의 무(武)가 발동하는 순간 스턴에 걸릴 수 있다는 뜻이며, 큐어 등의 회복 스킬로 스턴을 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역시 국산 게임....’

앞으로 대악마는 물론이고 드래곤, 신과 같은 별세계의 존재에게도 스턴을 넣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그리드는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 저항 스킬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등장할 테고 그리드 본인 역시 피해를 입는 상황이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일단은 이득을 봤으니까 잠자코 있자.’

Satisfy는 유저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 게임이다.

상태이상 저항을 무시하는 상태이상이 웬 말이냐고 항의하고, 호소해봤자 ‘밸런스를 위해 안배해놨던 시스템이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달라’는 거지같은 답변이나 돌아올 것이 뻔했다.

괜한 심력을 낭비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뜻.

더군다나 그리드는 현재 이득을 보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초연살파극(超聯殺派極).”

스턴은 대상을 무력화시키는 최상위 상태이상이다.

승리의 열쇠로 통할 정도.

스턴을 먼저 넣으면 자신보다 스팩이 높은 상대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스턴의 힘은 컸다.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대악마의 머리 위에 빙글빙글 도는 별.

설마, 정말로 스턴에 걸린 건가?

필드 보스조차 저항하는 스턴을 왜 대악마가 저항하지 못하는 거지?

어안이 벙벙해진 각국 방송사 해설진이 의문만 표출하고 있을 때 그리드의 궁극기가 보티스의 거체를 난도질했다.

하지만 승기를 확실히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보티스의 생명력과 방어력, 재생력이 워낙 뛰어나서 장기전을 각오해야할 것처럼 보였다.

보티스를 상대하는 인물이 그리드 혼자였다면 말이다.

“뱀 대가리 새끼가 감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야수화한 모르이즈의 날카로운 발톱이 보티스의 상처를 헤집어놓았고,

“편히 죽진 못할 거야.”

퍼엉!!

창성 레이첼의 투창이 보티스의 한쪽 눈을 꿰뚫어버렸다.

타이탄 전역에 펼쳐져 병사들과 플레이어들의 운신을 힘들게 만들고 있는 보티스의 독무도 공작들을 상대로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취릭! 취리익!!”

꿰뚫린 눈을 곧바로 재생시킨 보티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타이탄 전역에 펼쳐졌던 독무가 보티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귀찮군.... 그만 놀고 죽여주마. 취릭.”

보티스의 몸을 뒤덮은 비늘이 온통 남색으로 물들었다.

지독한 독기와 한기가 주변의 식물을 순식간에 썩게 만들었고 온갖 물질들을 부식시켰다.

“윽...!”

레이첼은 물론이고 야수화시 속성 저항력이 증폭되는 모르이즈 또한 독기를 감당 못하고 뒷걸음쳤다.

칸의 유작과 현무의 등껍질이 없었다면 그리드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보티스와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대량의 중독 데미지를 지속적으로 입다가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테지.

하지만 그리드는 만독불침의 몸이다.

그리드의 안전을 바랐던 칸의 유지가 그리드를 지켜주고 있었다.

“원덕구.”

투쾅-!

날카로운 창 한 자루가 하늘에서 떨어져 보티스의 비늘에 박혔다.

“?”

감히 내게 덤비는 미련한 인간이 더 남아있었다고?

도대체 얼마나 우습게 보였기에?

황당해서 콧방귀 뀐 보티스가 하늘을 올려보았다가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늘 위.

수백, 수천 개의 무구가 날카롭게 번뜩이며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이건 무슨 마법이지?’

아니, 마법이 아니다.

이건 오히려 권능에 가깝다.

인간 따위가 권능을....?

심상찮은 힘을 느낀 보티스가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투쾅-!

투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무구의 비가 오직 보티스만 노리고 폭풍우처럼 쏟아졌다.

언월도를 교차시켜 막는 보티스의 꼬리가 쉬지 않고 계속되는 충격에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푹하고 꺼지는 땅에 놀랐지만 꼴사납게 허우적거리지 않고 즉시 비행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놈은 날지 못했다.

그리드의 마법 관조가 놈의 플라이를 파훼해버렸다.

“....!”

그리드가 지신의 효과로 만들어낸 깊은 땅굴에 그대로 추락한 보티스의 두 눈에 온갖 무구와 마법, 그리고 불화살의 폭격이 투영됐다.

보티스가 독무를 회수하자 드디어 전장에 합류한 제국의 군대가 협공을 개시한 것이다.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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