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06화
“허억....!”
그리드의 위압감에 짓눌려있던 듀란달 황자가 간신히 호흡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뭐지?’
사하란의 혈통은 특별하다.
태어나면서부터 적기를 타고난 듀란달은 다른 황자들과 비교해 부족할 뿐이지 실력적인 면에선 범인의 범주를 넘어섰다.
적기의 힘으로 만물을 굴복시켜온 그가 누군가에게 도리어 겁먹고 위축된다는 건 여태껏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저열한 혈통 따위가 나를 압도하다니?’
듀란달 황자는 지난 몇 년 동안 그리드의 명성을 익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리드의 실력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드가 이뤄온 업적들이 워낙 대단해서 개인의 실력으로 이뤘다고 보기엔 무리가 컸기 때문.
그리드의 곁엔 항상 많은 조력자가 있었다는 부분에 주목한 듀란달 황자는 그리드가 세 치 혀를 휘둘러서 사람들을 이용하는 간사한 인물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가 이룬 업적들은 그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거라고 판단했다.
애초에 평민 출신으로 왕이 된 자다.
자신이 섬겨온 왕실을 배신하고 왕좌를 탈취한 반역자다.
어디 보통 놈이겠는가.
그래서 무시하고 경멸해왔건만....
‘....멋지잖아?’
그리드의 실력이 진짜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듀란달 황자가 그리드를 새삼 다시 보았다.
사실 그는 인재를 평가할 때 인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리드를 꺼림칙하게 여겼던 이유는 놈의 세 치 혀에 자신조차 속아 넘어갈까 우려해서였지 놈의 인성을 문제 삼아서가 아니었다.
‘반드시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그리드에게 반해버린 듀란달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드를 회유하고 싶어졌다.
뇌신 카일과 검은 발 기사단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그리드를 겁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명하게 접근해서 호감을 사고 싶었다.
“레쉬.”
“예, 전하.”
요즘 부쩍 실력이 늘어 검은 발 기사단 내에서도 유망주로 뽑히는 인물.
대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쉬에게 듀란달이 임무를 하달했다.
“그리드가 몇 명의 처자식을 거느리고 있는지 알아오도록.”
너무 쉬운 임무였다.
레쉬가 즉답했다.
“한 명의 처와 한 명의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첩이 없다고?”
“네....”
“미색을 별로 안 밝히나보군. 흠, 그럼 어느 정도의 재물을 쌓아뒀는지 알아오도록.”
“재물이라도 내어드릴 생각이십니까?”
“맞다. 물욕을 충족시켜주는 일이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쉬운 방법 아니겠느냐.”
“하지만 황자 전하보다 그리드 전하가 부자일 텐데요.”
“.....”
템빨국이 소국치고 상당한 재력을 쌓고 있단 소식을 언젠가 접했던 기억을 떠올린 듀란달이 아차 싶었다.
여자도, 돈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의 환심을 사려면 뭘 줘야하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레쉬가 조언했다.
“우선 사과부터 하심이 어떠실지요?”
“사과?”
“그리드 전하께 결례를 범하시지 않았습니까. 정녕 환심을 사고 싶다면 상대방에게 잘못했던 부분을 인정하고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는 게 우선 아닐까요?”
이미 옛날부터 듀란달에게 실망해온 레쉬는 그리드와 함께 무저갱을 탐색한 이후부터 그리드의 사람이 된 상태였다.
듀란달은 꿈에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매일 그리드에게 보고되고 있었다.
여태껏 듀란달이 살아있는 이유다.
레쉬도, 그리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듀란달은 황제가 되겠다는 야망을 사실상 포기했다.
자신이 아무리 발악해봤자 쥬앙데르크의 권력을 계승한 바사라를 황좌에서 끌어내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아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을 별로 모으지 못했다.
기반을 다지지 못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취객을 연기하며 바사라와 그녀의 측근들을 매도하고 화풀이하는 게 전부였다.
뇌신 카일이 곁에 있으면 뭐하는가.
카일의 힘을 이용해서 황궁을 점령한다고 해봤자 제국 전역에서 몰려온 군대가 그 즉시 자신을 징벌할 텐데.
하지만 템빨왕을 섭외할 수만 있다면....
“....알았다. 사과를 해야겠군.”
사과.
태어나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행위를 하겠노라 마음먹은 듀란달이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깨끗한 물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어 거짓으로 뿌렸던 술 냄새를 지웠다.
그리고 그리드가 있다는 식당을 찾아갔다가 석상처럼 굳고 말았다.
그리드와 식사하며 환하게 웃는 바사라의 모습을 보고 옛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고모라고 불렀던 시절....
그녀는 늘 저렇게 내게 웃어주셨다.
“.....”
듀란달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던 그날, 나는 그녀처럼 눈물을 흘렸던가?
진심으로 모르겠다.
내가 그토록 열망했던 황관을 쓰고도 울고 있던 바사라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저주했던 기억밖에 없다.
‘빌어먹을....’
바사라가 황제가 되고도 나를 쫓아내지도, 죽이지도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여전히 나를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텐데 나는 왜 그 사실을 잊었던가.
나는 도대체 언제부터 권력에 눈이 멀어 가족을 증오해왔단 말인가.
“황자 전하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입구에 멈춰선 채 바사라를 바라보는 듀란달의 시야를 적색 갑주들이 가렸다.
바사라를 호위하는 적기사들이 대놓고 듀란달을 경계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동안 어떤 모습을 보여 왔는지 다시 한 번 깨닫고 침울해진 듀란달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구나.”
자신이 가장 먼저 사죄해야할 사람은 다름 아닌 바사라였음을 깨달은 듀란달이 말하는 바로 그때였다.
쿠우우우우우웅!!
거대한 폭발이 발생했다.
타이탄.
대사하란 제국의 황도 한복판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이어지는 지진에 식당이 뒤흔들렸고 곳곳에서 비명이 빗발쳤다.
“황자!!”
안 그래도 듀란달을 수상하게 바라보던 적기사들이 격분해서 소리쳤다.
듀란달이 황제를 해치고자 어떤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구속하겠소!”
“큭!”
심지어 칼까지 뽑아드는 기사들을 무시한 듀란달이 적기를 방출했다.
그리고 바사라에게 몸을 날려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진 건물의 잔해들을 자신의 등으로 받아냈다.
“쿨럭.... 괜찮으십니까?”
“듀란달?”
갑작스런 상황에 혼란해하던 바사라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고,
“황자!!”
여전히 듀란달을 의심 중인 적기사들이 듀란달을 뒤쫓아 왔으며,
“대악마군.”
그리드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황궁을 쫓았다.
찬란한 금색으로 빛났던 제국의 상징이 불길한 마기에 침식당하는 중이었다.
3황자 브누아의 모습이 마기의 장막 너머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듀란달.”
“어?”
자신의 아들들을 굳이 해치지 말아달라고 했던 쥬앙데르크의 마지막 부탁을 그리드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1황자 롤랑은 온화하고 영리해 바사라에게 도움이 됐지만 2황자 듀란달은 호시탐탐 왕좌를 노렸으니 과연 지켜주는 게 옳은가 싶었었다.
더군다나 듀란달은 기존 제국의 황제들과 똑같은 발상을 지닌 위험한 인물이었다.
제국 외의 문화와 인종을 이해하지 않았으며 무력으로 탄압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굳이 그를 해치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바사라가 그러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레쉬와 카일에게 제국의 근황을 접해온 그리드는 바사라가 자신의 조카뻘인 듀란달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단 사실을 눈치 챘다. 그녀의 마음이 언젠간 듀란달을 바꿔놓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리고 오늘.
“폐하의 안전은 네게 맡기마.”
“그, 그래.”
듀란달은 자신이 바뀔 수 있음을 증명해보였다.
바사라가 알게 모르게 보여줬던 호의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이제 저놈만 붙잡아두면 된다.’
사하란 제국의 안정과 발전은 템빨국에도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
그리고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황자들이 사고를 치지 않게끔 방지해야할 필요가 있었으니 대륙 각지를 떠돌며 대악마 소환 의식을 진행 중인 브누아는 반드시 구속해야할 대상이었다.
“어째서! 이 나라는 어째서 이토록 평화로운 것이냐!! 나의 어머니를 원통하게 돌아가시게 만든 원흉 따위! 내 손으로 부셔버릴 것이다!!”
순보를 써서 마기의 장막 앞에 도착한 그리드가 브누아 황자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비 마리.
황후 아리아떼를 독살하고 쥬앙데르크의 총기를 없애는 등 제국을 혼란시켰던 원흉.
본래 그녀를 향했던 브누아 황자의 분노와 복수심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다.
지켜야할 조국을 향한 그의 뒤틀린 증오가 대악마라는 재앙을 낳은 상태였다.
“취릭! 취리릭!! 어딜 봐도 인간 천지로구나!! 좋다! 취릭!! 나를 소환한 인간이여! 너의 소망이 이곳을 멸망시키는 것이라면! 취릭!! 나 보티스가 기꺼이 그 소망을 이뤄주겠다!!”
[제17위 대악마 보티스가 인계에 강림하였습니다.]
[지독한 독무가 인근의 모든 생물을 질식시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진 비늘로 뒤덮인 뱀이되 인간의 것을 닮은 양팔을 지닌 존재.
괴기스러운 생김새의 대악마 보티스가 독 바른 언월도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포효하자 천지가 격동했다.
들끓는 마기의 장막이 점차 범위를 확대하며 제국을 독무로 물들여갔다.
“꺄아아아아악!!”
“히, 히익!!”
“이런 미친!”
타이탄에 머무는, 혹은 타이탄을 오가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거대한 혼란을 발생시켰다.
갑자기 나타난 재앙 앞에서 인간의 질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백성을 지켜야할 병사들이 위축되어 뒷걸음치다가 넘어졌고, 넘어진 병사들의 몸을 짓밟고 내달린 백성들은 서로의 옷깃을 붙잡고 늘어뜨렸다. 너나할 것 없이 먼저 이곳에서 도망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플레이어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로그아웃이 안 되는데?”
“이런 XX! 꺼져!!”
플레이어들은 연합군을 몰살시키고 랭커들을 짓밟았던 19위 대악마 살레오스의 파괴력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보다 순위가 높은 대악마 보티스의 출현을 보고도 태연하거나 투지를 불태우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모두가 등을 보인 채 도망쳤고,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다가 제국 한복판에 대악마가....』
『만약 제국의 피해가 커질 경우 서대륙 전체의 판도가 급변할 겁니다. 제국이 생산하는 온갖 공산품의 물가가 폭등할 것이고 난민은 도적이 되어 치안이 무너지겠죠.』
제국의 상황을 속보로 접한 각국 방송사의 뉴스 진행자들이 혀를 내둘렀다.
도망치는 사람들은 안타깝게 쳐다보며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순간.
콰르르르르르르륵!!
한 마리의 용이 승천하며 마기의 장막을 꿰뚫는 광경이 각국 방송사 카메라에 포착됐다.
수백 만 인구를 공포로 몰아넣은 뱀을 집어삼키는 용의 정체, 다름 아닌 그리드였다.
감탄한 뉴스 진행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드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탈출에 성공할 거라는 희망적인 관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퍼펑! 퍼퍼퍼퍼퍼퍼퍼펑!!
그리드는 사람들의 예측을 뛰어넘었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17위 대악마를 압도했다.
마치 모든 사람들을 지켜내겠노라 선포하는 듯한 위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