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05화
이클립스.
천 년도 더 전부터 존재해온 최강, 최악의 암살집단.
당대 란스티어 페이커를 섬기게 된 그들은 ‘템빨 그림자단’이라는 새로운 집단에 나름 착실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어린 소년소녀를 납치하는 등 무고한 자를 해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 그들의 마음에 평온을 주었다.
상부의 명령만 있으면 어떠한 악행도, 살생도 저지르게끔 세뇌교육을 받아왔다지만 무의식중엔 인간의 마음이 남아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들은 템빨국에서의 생활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잊었던 정(情)과 몰랐던 도의를 하나씩 배워가기 시작한 그들은 조금씩 삶의 가치를 깨달았고, 자신이 드디어 인간이 되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조직 이름이 템빨 그림자단이라는 점만 빼면, 그들은 이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일말의 의문이나 불안조차 느끼지 못했다.
한데 오늘은 의문투성이다.
‘맛집....?’
중요한 임무.
무려 템빨왕 전하께서 친히 내리신 임무가 있으니 급히 모이라는 란스티어의 명령에 따라 한 자리에 모인 암살자들이 술렁였다.
한때 감정을 거세당했던 그들이 동요를 드러내야할 정도로 이번 임무의 내용이 혼란스러웠다.
전국에 숨겨진 맛집을 찾으라니?
작은 단서조차 남기지 않고 꽁꽁 숨은 대상을 찾아 죽이라는 임무보다 더 힘들어보였다.
“감히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침묵의 도래라는 이명을 지닌 실력자.
이클립스 시절 세 번째 그림자의 위치에 있던 넘버 166이 거수하자 페이커가 발언권을 줬다.
“맛 좋은 음식을 파는 식당. 맛집의 사전적 의미가 맞습니까?”
“맞다.”
“맛 좋은 음식이란 무엇입니까? 음식이라는 건 단지 배를 채우는 도구가 아니었습니까?”
이들은 철이 들기도 전부터 납치당해 이클립스의 암살자로 육성 된 존재들이다.
식욕, 성욕, 물욕 등.
어떤 열망을 품게 만드는 모든 욕구를 거세당한 그들에겐 미각 또한 사치였고 미각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
하나 같이 궁금하단 표정을 짓는 암살자들을 쭉 둘러본 페이커가 부하를 시켜서 산해진미를 대령했다.
“직접 먹어보고 느끼는 게 빠르지 않을까 싶군.”
페이커가 손짓하자 암살자들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세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약간의 포만감이 느껴지자마자 음식에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긴 세월 동안 받아온 어떤 교육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듯했다.
“흠....”
맛집을 선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객관적인 평가조차 맹신해선 안 되는 게 바로 미각이라는 개념이었다.
SNS에서 유명한 맛집들을 방문했다가 실망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는 페이커는 맛집을 평가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들을 숙지하고 있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 부하들에게 설명할 예정이었다.
한데 이클립스 출신의 암살자들은 미각 자체를 상실한 상태였으니 난감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동안 침묵한 채 생각해보던 페이커가 측근에게 명령했다.
“이단에게 오찬을 준비하라고 전해라.”
“네.”
잠시 후.
“꾸웨엑!”
이단이 만든 음식을 한 입 먹자마자 토해낸 이클립스 출신 암살자들이 맛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드디어 미각을 되찾은 그들에게 페이커가 명령했다.
“지금부터 대륙 각지의 맛집을 찾아서 내게 보고하도록.”
“예!”
스르륵.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수백 명의 암살자가 대륙 전역으로 흩어졌다.
***
“경솔하신 판단 같습니다.”
지혜의 탑에서 돌아온 그리드가 미식룡을 만나겠다고 하자 스틱세이가 정색했다.
드래곤이란 인간의 관념으론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이다.
특히 태초부터 존재하고 군림해온 드래곤들의 가치관은 크게 어긋나 있었다.
우선 생명의 소중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걸 최우선으로 두고 행동한다.
배려라는 개념 자체를 몰라 주변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언짢은 일이 생기면 짜증을 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걸 파괴하는 포악성까지 지녔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네 살짜리 꼬마.
스틱세이는 드래곤을 그렇게 평가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미식룡의 분신을 만나 저주에 걸렸습니다.”
과거, 번헨 열도에서 시련을 치를 때 이미 들었던 내용이다.
대다수의 드래곤은 엉덩이가 무겁기 때문에 유희를 나올 때면 직접 움직이지 않고 마법으로 분신을 생성한다고 한다. 스틱세이가 만난 미식룡 레이더스 또한 분신이었다.
“세계수... 저희 엘프들에겐 어머니나 다름이 없는 그분을 지키려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죠. 심장에 저주가 걸린 저는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했고 미식룡은 어머니의 뿌리 절반을 뜯어 그대로 자신의 입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와 엘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게걸스럽게 어머니를 먹어치웠죠.”
“.....”
“정말이지 악랄한 놈입니다. 그런 놈을 만나봤자 끝이 좋을 리 없습니다.”
그리드는 스틱세이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했다. 드래곤을 만나야한다는 게 솔직히 말해서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하야테를 믿고 싶었다.
하야테는 분명히 말했다.
레이더스는 다루기 쉬운 드래곤이다. 미식 욕구만 충족시켜주면 사고를 치지 않는다, 라고.
‘....맛집 수배만 잘하면 돼.’
당분간 직접 움직일 생각이다.
특히 사하란 제국과 초국, 씽국은 그리드가 직접 방문해 협력을 부탁할 경우 황제와 국왕들이 발 벗고 나서줄 게 분명했다.
그리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타이탄에는 유명한 음식점이 많죠. 평소 귀족들이 방문하는 곳들이니만큼 분위기와 매너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저와 함께 직접 방문해보시겠어요?”
황제 바사라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줬다.
Satisfy의 유일한 제국이자 가장 강력한 국가인 사하란의 수장이 그리드에게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황제께서 친히 음식점을 방문하겠다니?
제국의 대소신료들이 기겁했다.
“폐하, 지금 즉시 요리사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일 터이니 옥체를 보존하소서.”
결국 바사라를 말리는 이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자 창성 레이첼이 한숨 쉬었다.
‘제국의 대소사를 관리하는 자들이 저래 눈치가 없어서야.’
황제께서 노하시리라.
레이첼은 생각했지만 바사라는 여전히 빙그레 웃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눈웃음을 짓고 신료들을 진정시켰다.
“무릇 음식점이란 음식의 맛만을 평가할 게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와 종업원들의 태도도 살펴봐야하는 거잖아요. 제가 직접 그리드 전하를 모시고 방문함이 옳아요.”
“황제의 옥체란 제국의 심장이며 전부입니다. 무릇 황제란 황궁을 떠나는 법이 없어야 제국이 평온한 법이며....”
“직접 가겠다고요.”
“....예, 폐하.”
바사라는 단 한 번도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대소신료들은 그녀의 강경한 태도를 통해서 그녀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지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더 이상 말리지 못하는 신하들을 뒤로한 바사라가 그리드에게 말했다.
“서둘러 채비를 마칠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밤새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천천히 하시지요.”
그리드는 바사라를 황제로써 존중하고 있었다.
비록 무력에서는 자신이 그녀를 앞설지 몰라도 권력과 재력 면에선 자신이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굳이 고하를 논할 것 없이 든든한 조력자이자 벗인 그녀를 존중해주는 건 그리드 입장에서 당연했다.
하지만 바사라는 오해하고 말았다.
밤새 기다릴 수도 있다니....
낭만적인 말에 뺨을 살짝 붉힌 그녀가 수줍게 웃으며 대전을 떠났다.
그녀를 뒤쫓아 우르르 몰려나가는 신하들과 달리 창성 레이첼과 맹수왕 모르이즈는 그리드의 곁에 남아있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방문해주셨음에 감사하고 반가울 따름이에요.”
사하란 개국공신의 후예이자 공작인 레이첼은 본래 오직 황제만을 섬겼었다.
황제를 제외하면 만인이 자신의 발밑에 있다고 생각했었을 정도로 콧대가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리드 앞에선 겸손했다.
단지 동맹국의 왕이라서가 아니다.
협곡에서 대악마를 학살했던 그리드의 무력과 카리스마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그녀는 그리드라는 인물 자체를 존경하게 됐다.
맹수왕 모르이즈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그리드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기도 했다.
“얼마 전에 그렌할 영감이 템빨국을 방문했다죠? 하필 그때 우리 영지에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함께 못가서 아쉬웠습니다.”
정중히 말하려고 노력하는 모르이즈가 그리드는 조금 낯설었다.
맹수왕이라는 이명처럼 야수 같은 사내인 모르이즈는 본래 예절이라는 걸 잘 몰랐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겐 실수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함께 만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사이 아닙니까? 한 번의 만남에 기뻐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상냥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리드의 발언이 레이첼과 모르이즈를 감격시켰다.
벗.
그리드가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재차 확인했으니 기쁠 수밖에.
분위기가 훈훈해지는 그때였다.
“집안 꼴이 개판이군.”
넓은 대전에 누군가의 짜증 섞인 음성이 울려 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곧장 눈치 챈 레이첼과 모르이즈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제국의 충신답게 감히 무시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목례했다.
“오셨습니까, 듀란달 황자.”
“흥.”
레이첼과 모르이즈를 불만스레 노려본 듀란달 황자가 저벅저벅 걸어와 그리드 앞에 섰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한다.
하지만 그리드는 알고 있었다.
듀란달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손에 쥔 술병과 몸에 밴 술 냄새는 연극의 도구일 뿐이다.
“족보 없는 왕답게 예절을 모르는군. 황제가 떠난 대전엔 아무도 머물러선 안 된다는 사실조차 몰랐나? 빵가루 얻어먹으러 온 거지면 거지답게 밖에서 조용히 기다릴 것이지, 어딜 감히 함부로 빈 대전에 남아 악취를 풍기시나, 그래?”
“황자! 말씀을 삼가시오!”
레이첼과 모르이즈가 발끈해서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도리어 콧방귀 뀐 듀란달이 이번엔 레이첼과 모르이즈를 비난했다.
“제국의 은혜도 잊고 방계 따위를 황좌에 앉힐 때부터 알아봤다만, 그대들은 정녕 수치심이라는 걸 모르는군. 이깟 소국의 왕 따위와 소꿉놀이를 즐기질 않나, 진정으로 섬겨야할 적통에게 감히 언성을 높이질 않나. 한심한 작자들 같으니.”
“취기에 기대어 너무 큰 실수를 범하시는군요. 내일 또 후회하며 찾아와 사죄하실 모습을 기대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상종하기 싫다는 듯 사늘하게 뱉은 레이첼이 그리드를 안내했다.
“가시죠. 이곳에 계셔봤자 불쾌하시기만 할 겁니다.”
순간.
“감히 어디서 등을 보이느냐!!”
여태껏 취객을 연기하며 빈정거리던 듀란달 황자가 소리쳤다.
지금 드러내는 분노는 연기 따위가 아닌 진심이었다.
“내가....! 황실의 적통인 내가 허락하지도 않았건만 감히 자리를 떠나겠다고? 레이첼! 그대가 정녕 미친 건가!!”
지독한 권위의식.
마음만 먹으면 독립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제국의 공작에게 듀란달은 선을 넘고야 말았다.
레이첼이 이날의 사건을 굴욕으로 여기는 순간 제국은 레이첼과 그녀가 이끄는 수십 만 군사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었다.
듀란달의 바람이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이 얻지 못한 패.
차라리 제국에서 완전히 떠나버리길, 그는 바라고 있었다.
그 뻔한 속내를 모를 레이첼이 아니었다.
걸음을 멈춘 그녀가 듀란달 황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결례를 범했군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황자.”
꽈드득!!
도발을 해봤자 소용이 없으면 도리어 도발하는 쪽의 화가 솟구치는 법이다.
레이첼의 기색이 태연하자 이를 간 듀란달의 표적이 그리드로 바뀌었다.
“템빨왕!! 네놈도 어서 내게 고개를 조아리고 인사하지 못할까!!”
“....!”
듀란달의 뻔한 도발을 애써 무시하던 레이첼과 모르이즈가 당황해서 그리드를 쳐다봤다.
자신들은 듀란달이 황자라는 이유로, 황실을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듀란달의 도발을 참아 넘길 수 있었지만 그리드의 입장은 전혀 달랐기 때문.
만약 여기서 그리드가 참지 못하고 듀란달을 해치기라도 했다간 듀란달의 파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었다.
제국은 두 파벌로 나뉠 것이고 듀란달 파벌에 속하는 귀족들은 템빨국을 적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나아가 제국과 템빨국의 관계가 삐걱되기 시작할 터였다.
“참아주십....”
레이첼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이었다.
스륵.
듀란달을 돌아보지도 않고 검을 뽑은 그리드가 제왕의 위엄을 드러냈다.
제(制)의 검무가 발동한 것이다.
“헉!”
실컷 떠들며 그리드를 도발하던 듀란달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고작 그리드의 뒷모습에 위압당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드와 공작들이 대전을 떠날 때까지 듀란달은 아무 것도 못한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신을 만났고, 이제는 또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 준비 중인 그리드의 입장에서 듀란달 같은 애송이는 굳이 거들떠 볼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