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3권 - 04화
“저 말이 실현 될까요?”
S.A그룹 본사.
이러다가 관음증이 생기는 건 아닐까, 문득 걱정할 정도로 그리드의 행보를 주시하던 임원진이 한 자리에 모였다.
무쌍검법보다 뛰어난 검술을 창안하는 자가 신과 드래곤을 베어 멸하리.
검성 비반의 충격적인 발언이 그들을 주목시켰다.
“모르페우스가 전 세계의 검술을 참고하고 종합하여 만든 가장 이상적인 검술이 바로 무쌍검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무쌍검법 이상의 검술이 탄생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심지어 플레이어의 손에 의해서 말입니다.”
검성이 된 이후의 크라우젤의 행보는 기대 이하였다.
고작 노말 클래스로 지존이 되어 천외천이라고 불렸던 시절과 달리 큰 활약을 하지 못했으니 임원진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괜한 고집으로 무쌍검법을 계승하지 않아 ‘최강의 전투 클래스’라는 타이틀을 지닌 검성의 명예를 실추시킨 그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한데 오늘.
그동안 임원진의 마음을 대변해주듯 크라우젤에게 쓴 소리를 던졌던 비반이 새삼스레 크라우젤의 잠재력을 논한 것이다.
크라우젤이 무쌍검법을 습득하지 않은 이유가 무쌍검법보다 더 나은 검술을 창안하기 위해서라고 하던가.
과연 실현 가능성 있는 추측일까?
임원진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임철호 회장이 한참을 침묵한 끝에 입을 열었다.
“모르페우스에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289종의 검술 데이터가 모조리 입력돼 있소. Satisfy가 지원하는 2,570개의 검술 관련 스킬이 모두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무쌍검법도 그중 하나지.”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가 수백 종의 검술을 분석하고, 종합하고, 취사하고, 개선하여 만든 검술 중 가장 완벽하고 강력한 검술이 바로 무쌍검법이다.
여태껏 임철호 회장을 비롯한 개발진은 무쌍검법을 ‘궁극의 검술’이라고 칭해왔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이 순간 임철호 회장은 확신했다.
20억 플레이어가 겪어온 모든 경험을 정보로 삼아 진화를 거듭해온 모르페우스는 무쌍검법 이상의 검술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비반의 입을 통해서 ‘무쌍검법을 뛰어넘는 검술’이라는 ‘가능성’이 심어진 이유는 필시 모르페우스의 진화의 영향을 받은 것일 테고.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께서도 아시다시피 데이터란 낡는 법이요. 새로운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더 나은 결괏값이 생기게 마련이지.”
“무쌍검법 이상의 결괏값이 탄생하는 건 당연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20억 명의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모종의 이유로 소실되어 모르페우스가 몰랐던 검술, 혹은 모르페우스가 예측하지 못했던 검술의 운영법을 데이터에 누적시켜왔을 거라고 감안하면 모르페우스가 무쌍검법보다 더 나은 검술을 떠올리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오.”
인간은 누구나 때때로 기적을 일으킨다.
평범한 사람들 또한 그리드, 크라우젤, 아그너스처럼 모르페우스의 예측을 뛰어넘을 때가 있는 것이다.
비록 만 명 중의 한 명이 일으키는 단 한 번의 기적일지라도, Satisfy를 플레이하는 사람의 숫자가 20억 명을 초과하는 이상 기적은 누적되게 마련이며 변화를 불러온다.
“그 새로운 검술을 크라우젤이 습득하게 되더라도 이상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
임철호 회장의 시선이 좌측의 중앙 모니터에 고정됐다.
가야의 사막을 횡단 중에 마주친 양반과 사투를 벌이는 크라우젤의 모습이 라이브로 송출되는 중이었다.
하필 처음 만난 양반이 예음인 탓에 자신을 과소평가하게 된 크라우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갓 쓴 양반의 수준을 예음과 동급으로 상정한 까닭에 수비에 혈안이 됐다. 한데 그러면서도 모래에 발이 빠지는 실수는 단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양반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몸에 힘을 잔뜩 주면서도 발놀림은 가볍게 하여 사막의 모래를 자유롭게 질주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는 천재.
크라우젤의 재능은 여전히 군계일학이었다.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 으뜸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정도였다.
저런 천재가 무쌍검법을 외면해온 이유가 단순한 고집 때문이었을까?
‘어쩌면 본능적으로 느꼈던 걸 수도 있다.’
무쌍검법을 궁극이라 칭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크라우젤은 무의식중에 엿봤던 게 아닐까?
‘....아니, 이건 너무 심한 비약인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부정하던 임철호 회장이 문득 실소를 흘렸다.
이와 같은 혼란, 그리드가 급격히 발전했던 시기에 그리드를 상대로 느꼈던 것이었으니까.
서걱!
영상 속.
양반의 공격을 수포로 돌린 크라우젤의 검이 그대로 솟구쳐 양반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이어지는 우주 검이 사막을 반으로 갈랐다.
그리드에 이어서 두 번째.
홀로 반신을 쓰러뜨린 플레이어가 탄생한 날이었다.
예음과의 사투 이후 보름 동안 가야를 떠돌면서 크라우젤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아직 몇 명의 플레이어밖에 방문하지 못했던 가야엔 그를 위한 기연이 산재해 있었다.
***
지혜의 탑의 정상, 하야테의 서재.
그리드는 하야테와 마주보고 앉았다.
따뜻한 차를 직접 내려 그리드에게 건네준 하야테가 운을 뗐다.
“앞으로 열흘 후. 미식의 주기가 다가온다네.”
“미식의 주기요?”
“미식룡 레이더스가 온 대륙을 순회하며 미식을 즐기는 기간을 뜻함세.”
“드래곤이 온 대륙을 순회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드래곤의 그 거대한 몸집과 포악한 성정을 떠올린 그리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드래곤이 온 대륙을 순회한다는 말이 곧 온 대륙을 파괴할 거란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잔뜩 긴장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웃어주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하늘에서 내려와 도시를 무너뜨리는 광경 같은 건 상상할 필요 없네. 미식 주기의 레이더스는 인간으로 폴리모프를 하고 다니니까. 맛에 집중하기 위해 위장을 줄이는 거라고 했던가.”
“그렇군요....”
그리드는 폴리모프의 개념을 쉽게 이해했다.
템빨국에 식객으로 머무는 중인 해츨링 네펠리나가 평소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하고 지냈으니까.
하지만 별로 안심은 되지 않았다.
모습만 인간하고 똑같으면 뭐하는가.
더러운 성격은 그대로일 텐데.
“그래서.... 미식의 주기 동안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레이더스에게 평판 좋은 음식점들을 소개해주게.”
“네, 알겠.... 엥? 네??”
“미식의 주기는 100년에 한 번씩 다가오기 때문에 레이더스가 기억하는 식당 중 일부는 사라졌거나 맛이 변했어도 이상하지 않거든. 레이더스가 괜히 맛없는 음식을 먹었다가 짜증이라도 냈다간 난리가 발생할 수 있으니.... 그대가 요즘 각지에서 유행하는 식당들을 선별하여 레이더스를 안내해주었으면 한다네.”
“.....”
드래곤을 가이드 해주라니? 흉악하고 포악한 드래곤과 미식 여행을 하라고?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그리드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선구자가 탑의 결사들과 상부상조하는 관계라곤 하지만.
여태껏 결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곤 하지만 이번 임무는 썩 내키지 않았고 불만도 생겼다.
애초에 선구자는 속세를 책임지고 드래곤은 결사들이 마크해야하는 거 아니었나?
왜 내가 드래곤을....
납득하지 못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설명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지혜의 탑의 목적은 드래곤을 멸하는 게 아니라 드래곤이 사고를 치지 못하게끔 방지하는 것일세.”
탑의 결사들이라고 해서 드래곤을 멸종시키겠다는 목표를 품는 건 불가능했다. 결사들의 현실적인 목적은 드래곤과 굳이 싸우는 게 아니라 드래곤과 싸울 일을 차단하는 것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레이더스는 다루기 쉬운 드래곤이야. 미식 욕구만 충족시켜주면 사고를 칠 일이 없지. 그래서 여태까지 미식의 주기마다 우리 결사들이 레이더스의 미식 여행을 도와주곤 했는데....”
하야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드는 그 이유를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결사들께서는 제대로 된 안내를 해줄 수가 없었겠군요....”
결사들은 속세를 떠난 존재다.
비반처럼 습관적으로 탑을 뛰쳐나가는 경우가 아닌 이상에야 대부분 특별한 임무가 있을 때만 탑을 나섰다.
그들이 무슨 수로 속세의 맛집들을 속속들이 파악하겠는가.
레이더스를 만족시키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맞네. 반면 일국의 왕인 그대는 속세의 사정을 속속들이 꿰고 있겠지. 각지의 유명한 음식점을 파악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테고, 각지를 여행함에 있어 제약도 덜할 테니 그대에게 레이더스의 안내를 부탁해보고 싶은 걸세.”
“음....”
사정은 이해되지만 전혀 내키지 않는다.
온 대륙 맛집 탐방.
최대한 많은 곳의 좌표를 사전에 확보해서 텔레포트로 다닌다고 해도 최소 보름은 걸릴 일정이다.
보름 동안 드래곤과 붙어 다니다가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그대로 골로 가는 수가 있었고,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레벨 업에 신경 쓸 수 없을 거란 사실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정말로 죄송하지만.... 이번 임무는 거부해야겠군.’
고심 끝에 결정을 내린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저는.....”
[★히든 퀘스트★ <미식의 주기>가 발생합니다.]
<미식의 주기>
난이도:???
미식룡 레이더스를 전국 각지의 맛집으로 안내해주세요.
레이더스를 만족시키기 위해선 최소 80군데의 음식점을 방문해야하며, 맛있다는 감상을 최소 60번 이상 들어야합니다.
레이더스가 ‘행복하다.’는 감상을 말할 때마다 레이더스로부터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될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레이더스를 80곳 이상의 식당으로 안내할 것
퀘스트 클리어 보상:레이더스의 만족도에 따라서 다름
퀘스트 실패 시:미식룡의 분노 발생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네, 저는 하겠습니다.”
“고맙네.”
“세계의 평화를 위한 일인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훌륭하군. 나 또한 그대를 믿고 있었네.”
무려 드래곤이 주는 특별한 선물이란 무엇일까.
커다란 기대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길드 채팅창에 공지했다.
-맛집 추천 바람.
그리고 라우엘에게 따로 귓속말을 보냈다.
-각 지역 영주들한테 말해서 맛집 추천하기 행사 열라고 해.
-네?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귓속말을 보낸 대상은 페이커였다.
-이클립스의 어쌔신들을 움직일 때야.
-무슨 임무든 맡겨라.
-맛집을 수배해줘.
-알았다.
‘좋아.’
이걸로 최소한의 물밑 작업은 끝냈다.
이젠 잠시 동대륙에 들러 초왕과 씽왕에게 맛집을 수배해달라고 부탁하면 만사형통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야테에게 말했다.
“이번 미식 여행의 가이드 임무, 제가 완벽하게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려주십시오.”
“과연.... 전설이자 초월자이며 영웅왕인 그대는 실로 든든하군. 레이더스의 레어가 있는 위치를 알려줄 테니 열흘 후까지 그곳으로 가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미식룡 레이더스.
녀석과 호감도를 쌓을 수만 있다면 스틱세이의 심장에 걸린 저주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그리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