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37화 (1,227/1,794)

템빨 63권 - 03화

직계.

시조 베리아체가 낳은 10명의 자식을 뜻한다.

순수와 고결을 상징하는 혈통의 주인인 그들은 귀족이라 불리며 뱀파이어들 위에 군림했다.

그런 직계를 통솔할 자격을 지닌 존재가 바로 혈왕이다.

혈왕이 되는 조건은 오직 하나, 무력.

직계와 달리 혈통을 따지지 않는다.

직계를 쓰러뜨린 강자는 혈통과 관계없이 혈왕의 자격을 얻었다.

브라함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나태의 저주가 있는 이상 뱀파이어에게 미래란 없다. 어머니께서도 그 사실을 아셨기에 외인을 들이는 규칙을 만드신 걸 테지.”

외인에게도 혈왕이 될 기회를 주는 규칙이 생긴 이유는 단순했다.

뱀파이어들의 힘만으론 앞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

나태의 저주가 있는 이상 뱀파이어는 노력할 수 없고, 노력하지 못하기에 발전하지 못하며, 발전하지 못하므로 대악마들을 단죄할 힘을 얻지 못한다.

뱀파이어만으론 베리아체의 비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마리로즈가 혈왕이 됐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그녀가 나태의 저주를 극복할 거라는 확신이 없었으므로 베리아체는 일종의 보험을 들어둔 셈이었다.

[조건 달성으로 첫 번째 혈마법이 개화합니다.]

떠오르는 알림창과 함께, 그리드는 왼쪽 어깨에서 아찔한 고통을 느꼈다.

따끔하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통증.

칼에 살이 쑤셔지는 듯한 격통이었다.

당황한 그가 갑옷을 벗고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치이익!

혈빛의 마력이 폭사하며 어떤 문양이 새겨지고 있었다.

핏방울을 연상시키는 문양이었다.

“끅....!”

어깨를 감싸며 주저앉은 그리드가 이질감에 휩싸였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기운이 자신의 마력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생생하게 느꼈다.

[혈마법 개화 효과로 마나가 강화됩니다.]

[최대 마나량이 1.5배 증가하였습니다.]

[마나 회복 속도가 2배 증가하였습니다.]

[흡혈 행위 시 생명력과 함께 마나가 함께 회복되며, 이때 회복되는 마나는 <혈마력>으로 분류돼 마법 사용 시 데미지를 1.2배 증폭시킵니다.]

“....!!”

예상치 못한 부가 효과가 그리드를 전율시켰다.

두 눈을 부릅뜨는 그의 왼쪽 팔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혈마법, <극한의 수혈>을 습득하였습니다.]

<극한의 수혈>Lv.1

대상에게 당신의 최대 마나 수치의 2배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히고 피해량의 100퍼센트를 흡혈합니다. 당신의 생명력이 최대치일 경우, 흡혈한 생명력을 역류시켜 대상에게 흡혈한 수치만큼의 추가 피해를 입힙니다. 추가 피해량은 대상의 마법저항력과 속성저항력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마나 소모:10,000

재사용 대기 시간:24시간

때리고, 흡혈하며, 만피일 경우에는 흡혈량을 피해량으로 전환시킨다.....

극한의 수혈의 효과는 매우 단순했다.

문제는 데미지 계산법에 있었다.

혈마법을 습득하고 강화된 그리드의 최대 마나량은 현재 14만.

그 2배면 24만이다.

랭커급 플레이어도 일격에 즉사시킬 수 있다는 뜻.

물론 대상의 마법저항력에 따라서 피해량이 차감될 테지만, 그리드가 만피를 유지한 상태에서 사용할 경우엔 상대방의 마법저항력이 아무리 높아도 즉사시킬 확률이 크다.

‘엘핀스톤의 반지로 흡혈해서 혈마력을 1만까지 쌓은 뒤 쓰면 데미지가 더 오를 테고....’

48만의 1.2배라고 해봤자 58만이 채 안 된다.

몬스터를 상대로는 파괴력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극한의 수혈의 본질이 흡혈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리드는 대략 24만의 추가 생명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좋아....’

탱커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생명력보다 방어력에 더 많이 투자한 탱커와 방어력보다 생명력에 더 많이 투자한 탱커.

서로 장단점이 있다.

이중 방어력이 높은 탱커는 대부분의 데미지를 크게 경감시켜서 생명력 소모량을 줄이는 대신 트루 데미지에 취약했고, 생명력이 높은 탱커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길드가 두 유형의 탱커를 골고루 섭외하거나 육성한다.

상황에 따라서 생명력이 높은 탱커(고기방패)를 일선에 세울 때가 있었고 방어력이 높은 탱커를 일선에 세울 때가 있었다.

그리고 현재 생명력이 40만에 도달한 그리드는 모든 플레이어를 통틀어서 생명력이 가장 높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고기방패로 구분할 순 없는 것이 방어력도, 저항력도 생명력 못지않게 높기 때문.

거기다가 온갖 종류의 보호막과 회복스킬까지 보유했으니만큼 그리드는 자신이 싸우다가 죽는 일은 앞으로 거의 없을 거라고 단언했었다.

솔직히 현재 상태에서 죽는 건 발컨을 인증하는 꼴이라고 생각했었을 정도다.

하지만 며칠 전에 그리드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아직도 한참이나 부족하다.

컨트롤의 문제를 논할 게 아니라, 바알을 상대로 스탯부터가 압도당했었다.

‘더 강해져야 돼.’

부족하다.

더 큰 힘을 열망하며 탐욕스럽게 빛나는 그리드의 눈빛을 빤히 바라보던 베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룬은 만능이 아니야.”

“네?”

“사람들은 룬이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아티팩트라고 칭송하지만 본디 물건이란 생물과 달라. 한계가 있어.”

“....?”

어째 불길하다.

긴장하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경고했다.

“너의 룬은 너무 많은 힘을 품었어. 조만간 용량이 초과돼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올 거야. 혹시라도 룬을 맹신하지 마.”

“용량.... 설마 룬에 깃든 힘 중 일부를 버리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겁니까?”

“응, 네 룬에는 신력이 개입해서 보통의 룬보다 더 뛰어난 용량을 자랑하지만.... 네가 흡수한 힘들이 너무 방대해서 아마 한계가 빨리 찾아올 거야.”

“....대략 언제쯤일까요?”

앞으로 몇 개의 힘을 더 흡수할 수 있을까.

취사선택의 순간에 나는 어떤 힘을 포기해야하는 걸까.

벌써부터 깊은 고민에 빠진 그리드에게 베티가 대답해주었다.

“아마 이 추세라면 20년 후쯤?”

“....아, 네.”

20년....

베티에겐 찰나일 수도 있겠지만, 그리드의 입장에선 막연하게 느껴지는 세월이다.

‘여태까지 14개의 힘을 모았으니까 앞으로 20년 후쯤엔 40개 정도의 힘이 모이려나.’

40개가 한도라고 하면 뭐, 납득할 수준 같다.

40개만 해도 뱀파이어와 대악마들의 힘을 꽉꽉 채워 넣을 수 있지 않은가.

내심 안도한 그리드가 곁에 딱딱하게 굳어있는 엘핀스톤의 영혼을 반지로 회수했다.

앞으로 한동안 사냥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서큐버스들을 데리고 지옥에 머물며 노에와 랜디, 템빨골과 뱀파이어들의 육성에 주력하는 한편 자신 또한 레벨 업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었다.

‘스태미나만 여유 있었어도 진짜 무한 사냥이 가능할 텐데....’

물론 지금도 무한 사냥이 가능하긴 하다.

그리드 본인이 지쳐 쉬는 동안에도 갓 핸드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자동 사냥을 진행하니까.

하지만 갓 핸드만으로 수월하게 사냥을 진행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사냥터의 수준을 낮추는 수밖에 없다. 경험치 획득률을 높이기 위해선 그리드 본인이 직접 사냥하는 게 최고였다.

‘어서 빨리 마신의 심장을 구해야할 텐데.’

12위 대악마 슈트리오.

과연 언제쯤에야 레이드할 수 있을까?

착잡한 심정으로 계획을 짜던 그리드가 전부터 궁금했던 의문을 입 밖에 꺼냈다.

“베티 님, 마신이란 무엇입니까?”

바알조차 얻지 못한 신의 칭호를 12위 대악마가 갖게 된 경위가 뭘까.

바알의 계약자인 베티라면 내막을 알지 않을까?

그리드의 예상은 적중했다.

베티는 슈트리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혼돈의 영혼이 만든 괴물.”

“혼돈의 영혼?”

“본래 슈트리오는 영령의 대악마. 그의 영혼은 육신을 잃고 배회하는 영혼들을 끌어당기는 자력을 지녔어.”

“....”

“지옥을 배회하는 수천, 수만의 영혼들이 오랜 세월 동안 슈트리오의 영혼에 흡수당했고 그 탓에 슈트리오의 영혼은 무한히 비대해졌어. 영혼의 성장은 육신의 성장과 격의 성장으로 직결됐고, 슈트리오는 결국 신(神)이 된 거야.”

“....!!”

정말로 신이 맞았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다.

“신이라기엔 이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짐승 같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로.”

“수만 개 영혼의 집결체니까. 너무 많은 이지가 섞인 바람에 도리어 이지를 유지하지 못하고 상실한 거지.”

“혹시 그래서 신으로 섬김 받지도 못하는 건가요?”

지옥의 중립 구역들을 방문한 그리드는 마족들이 섬기는 신의 정체를 목격한 바 있다.

악신 야탄.

지옥의 모든 존재는 오직 야탄만을 섬겼다.

슈트리오를 신으로 섬기는 주민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었다.

역시나.

“응. 누가 짐승을 신이라고 섬기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슈트리오를 반신 같은 모조품이라고 생각해선 안 돼. 비록 섬김 받지 못한다고 해도 신격에 오른 힘만큼은 진짜니까.”

“....바알보다 강할까요?”

“그건 아니야. 아마 대부분의 한 자릿수 대악마보단 약할 거야. 아무리 힘이 강해봤자 기술과 지혜가 없으면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럼 대악마들이 슈트리오를 방치하는 이유가 뭔가요?”

한 자릿수 대악마라고 해도 결국 죽는다.

헬가오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리고 죽은 대악마의 영혼은 지옥을 배회하게 된다.

슈트리오의 영혼에 흡수당해서 윤회가 불가능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한데 왜 슈트리오를 방치하는 걸까?

“대악마들은 설령 영혼만 남게 되도 자신의 영혼을 통제할 수 있어. 슈트리오에게 영혼이 흡수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거야.”

“아....”

하긴, 브라함만 해도 영혼 상태로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슈트리오의 관심사는 온통 인계에 쏠려있기 때문에 지옥에서 사고를 칠 가능성도 낮아. 대악마 입장에서는 굳이 힘들여서 슈트리오를 건드릴 필요가 없는 거야.”

“그렇군요....”

지옥의 틈새를 통해서 지상을 노려보던 슈트리오의 동공을 떠올린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슈트리오를 토벌함에 있어서 어부지리를 노릴 수 없단 사실을 깨닫고 난감하기도 했다.

‘벌써부터 마신의 심장을 노리는 건 시기상조군.’

이제 미련 없이 레벨 업에만 집중하면 될 듯하다.

일단 성장을 해야만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확실히 노선을 정한 그리드가 베티에게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늘 많은 도움 감사합니다.”

“응.”

“그.... 언젠간 제가 반드시 바알을 징벌하겠습니다.”

말하면서도 민망한 그리드였다.

자신이 대체 무슨 수로 바알을 토벌하겠는가.

현재 시점에선 감도 안 잡혔다.

얼굴을 붉히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처음으로 보여주는 미소였다.

“응원할게. 도움이 필요하면 또 와.”

바알의 죽음은 바알과 계약함으로써 불멸을 얻은 베티의 죽음과 직결되기도 했다.

베티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탑의 결사 ‘베티’와의 호감도가 30 올랐습니다.]

“그럼 안녕히....”

도움만 받았을 뿐인데 호감도가 올라버렸다.

작은 격려에 감격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외로웠던 걸까.

착잡한 심정으로 베티의 맨몸을 떠올린 그리드가 바알을 향한 적의를 더욱 불태웠다.

‘반드시 없앤다.’

파그마의 영혼이 내지르던 비명이 잊히질 않는다.

비명을 연주삼아 웃던 바알의 광기는 결코 용납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재차 다짐한 그리드가 베티의 방에서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오랜만일세.”

금발의 사내.

귀족의 표본과도 같은 생김새를 자랑하는 미남자가 그리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야테 님을 뵙습니다.”

그리드가 절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혜의 탑의 주인이며 용살자.

그리드에게 무한의 검기를 전수한 스승이기도 한 그를, 그리드는 진심으로 존경했다.

하야테 또한 그리드를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무신을 만났나 보군. 그것도 진짜 무신을.”

과연 궁극의 초월자답게 그리드의 변화를 완벽하게 간파하는 하야테였다.

“치우를 아십니까?”

“가끔 시선을 느낀 경험이 있지.”

“시선....?”

“저곳에서부터 나를 바라보는 시선.”

탑의 천장.

정확히는 천장 너머 천상을 가리키는 하야테였다.

지상을 엿보는 신들의 시선마저 느낄 정도로 뛰어난 감각이란 말인가....

감탄을 넘어 황당해하는 그리드에게 하야테가 제안했다.

“그대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고 싶네만, 시간이 괜찮겠는가?”

“물론입니다.”

레벨 업도 레벨 업이지만 퀘스트를 놓칠 순 없다.

하물며 1좌 하야테가 주는 퀘스트다.

엄청난 보상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설령 보상이 없더라도 당연히 도와야지.’

그리드는 선구자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결사들의 호의를 얻는 대신 결사들이 주는 임무를 해결하며 평화에 기여하는 존재.

그게 바로 선구자였다.

‘....가만.’

그리드가 새삼스러운 의문을 품었다.

만약 아그너스가 선구자가 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여러모로 막장이 되겠는데....’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통감하는 그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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