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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36화 (1,226/1,794)

템빨 63권 - 02화

‘와, 이 자식 보게.’

엘핀스톤은 무려 1년을 불통으로 있었다.

몇 차례를 소환해도 항상 거부했으며 일말의 소통조차 되지 않았었다.

그리드는 시스템 오류를 의심했었을 정도다.

그러다가 자신이 브라함으로 오해받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엘핀스톤이 자신을 무시하는 이유를 애써 납득했다.

한데 이제 보니....

-그리드 님! 그리드! 충성을 맹세한다고 하지 않았소! 어서 저 미친 악마의 수작을 말려주시오!!

“....개뿔.”

엘핀스톤은 그리드의 정체를 오해한 적이 없다.

그리드의 이름까지 정확히 알고 있는 주제에 여태껏 그리드를 철저히 무시해왔던 것이다.

‘괘씸한 놈.’

짜증이 치솟아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베티에게 의문을 던졌다.

“저는 혈왕입니다. 마리로즈를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가 제게 복종해야 옳죠. 한데 엘핀스톤은 무슨 수로 저를 무시할 수 있던 걸까요?”

“너는 기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어. 뱀파이어 중에서도 직계들이 네게 복종하는 건 어떤 강제성 때문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야.”

“네?”

“돌이켜봐. 혈왕이 되기 전에도 너를 따르는 직계들이 있었을 텐데? 설령 네 손에 죽은 아이였을지라도.”

“....”

확실히 그렇다.

그리드가 혈왕이 되기 전에도 티라멧은 그리드에게 복종했다. 지금처럼 태도가 깍듯하진 않았지만.

“상징물에 영혼이 봉인 된 까닭에 이지가 약해져서 복종했던 게 아닌가요?”

“아니. 너와 함께 싸우며 영혼에 더 많은 피를 묻힐수록 부활의 시기가 빠르게 다가올 걸 알고 너를 따르는 선택을 한 거야. 효율을 따진 거지.”

어쨌든 스스로의 의지로 복종하는 것이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복종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엘핀스톤이 그리드를 무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드러난 셈이다.

물론 그리드는 납득하지 못했다.

“해답이 되질 않습니다. 혈왕은 마리로즈를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를 복종시킬 권한을 지녔건만 엘핀스톤이 무슨 수로 제게 의지를 행사했단 말씀입니까?”

“말했잖아. 네가 오해하는 거라고. 직계 뱀파이어는 상대가 혈왕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진 않아. 본능적으로 혈왕에게 복종하는 보통의 뱀파이어들과 달리 직계에겐 자유의사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서로 혈왕이 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거고.”

“아니 근데 티라멧은....”

“네가 혈왕이 된 이후부터 네게 복종한 직계가 있다면 별도의 이유가 있겠지. 예를 들면 네가 나태의 저주를 풀어줬다거나.”

“아....!”

그리드가 칭호 <혈왕>의 정보를 확인했다.

<혈왕>

종류:패시브

★조건 충족 시 혈마법 개화.

*개화하는 혈마법은 당신의 성격을 따릅니다.

★조건 충족 시 직계 뱀파이어 해방 가능.

*해방 된 뱀파이어는 나태의 저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모든 뱀파이어가 혈왕에게 복종한다는 설명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펜릴을 레이드하고 혈왕에 등극했을 당시.

그리드의 시야에 ‘앞으로 마리로즈를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가 당신에게 복종한다’는 내용을 담았던 알림창이 떠올랐던 이유는 그리드가 펜릴이라는 강자를 쓰러뜨렸기 때문이지 혈왕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혈왕의 진정한 힘은 나태의 저주를 푸는 힘.

그리드가 자신들의 저주를 풀어줄 거란 기대감에, 혹은 풀어줬기 때문에 감격해 복종할 순 있어도 복종할 의무는 없는 셈이다.

간신히 상황을 파악한 그리드가 엘핀스톤의 영혼을 노려보았다.

“나에겐 너의 저주를 풀어줄 힘이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여태껏 나를 무시했던 이유가 뭐지?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지 못해도 상관없는 건가?”

엘핀스톤이 즉답했다.

-너는 나를 죽였다.

뜨끔.

-찢어죽일 브라함의 벗이기도 하다.

뜨끔.

-그런 너와 담소라도 나누라는 건가?

“....”

애초에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엘핀스톤에게 그리드는 증오의 대상. 그리드에게 호의를 보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드가 엘핀스톤의 반지의 정보를 재차 확인했다.

★반지의 등급이 레전드리까지 성장하여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니 이것도 말장난이었군.’

반지의 정보엔 엘핀스톤을 소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적혀있을 뿐이지 무조건 소환해서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는 내용은 명시되지 않았다.

기분 참 더럽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S.A그룹 고객센터에 연락해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S.A그룹은 시스템적 문제는 게임 내에서 해결하라며 무시로 일관할 테지.

그래, 무시.

마치 엘핀스톤처럼 말이다.

‘....생각할수록 괘씸하네.’

그리드는 엘핀스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이 엘핀스톤이었어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엘핀스톤이 아니다.

엘핀스톤을 이해할지언정 옹호할 생각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 너는 정확히 24시간마다 나타나서 나를 노렸었지.”

극한의 수혈.

대상의 생명력을 대량으로 빼앗아 자신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무시무시한 일격필살의 스킬이자 회복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무려 24시간이라는 단 하나의 단점을 지닌 그 궁극기를, 엘핀스톤은 하필 불사를 지닌 그리드에게 몇 번이고 낭비했었다. 도중부터 자신의 판단 미스를 눈치 챘을 텐데도 자존심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래 맞아, 엘핀스톤 넌 처음부터 고집이 셌어.”

부활의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선 그리드에게 협력하는 편이 좋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도 원한과 분노에 매몰되어 기회를 외면하는 미련한 놈.

어리석다.

“아마 넌....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게임이 섭종을 하거나 내가 게임을 접는 날까지 내 말을 듣지 않겠지.”

엘핀스톤은 이해하기 힘든 낱말들이 범람한다.

하지만 엘핀스톤은 그리드의 억양과 표정을 통해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이봐, 충성을 바치겠다니까?

“말이 점점 짧아지네.”

일렁이며 동요를 드러내는 엘핀스톤의 영혼을 마주보고 선 그리드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셀 수 없이 많은 대적과 싸우고, 쓰러뜨려온 전사의 눈빛이다.

그가 써내려온 서사가 거대한 위압감으로 변모하여 엘핀스톤의 숨통을 조였다.

-오, 오해요! 그리드 님!!

대부분의 대악마와 직계 뱀파이어들이 죽음 앞에 초연한 이유는 윤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어도 언젠간 다시 부활한다.

심지어 옛 기억과 힘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러므로 그들에겐 죽음이 끝이 아닌 것이며 두려워할 개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엔 윤회의 고리를 끊어내는 비정상적인 존재가 있다.

죽음을 종말로 만드는, 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존재.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엘핀스톤의 영혼이 의식하는 대상이 베티라는 사실을 눈치 챈 그리드가 피식 웃었다.

“상황 파악을 전혀 못하는군.”

-?

“네가 두려워해야할 상대는 나다.”

움찔.

엘핀스톤의 영혼이 흔들림을 멈췄다.

피처럼 붉었던 놈의 영혼이 새카맣게 물들어갔다.

-보자보자 하니 개념을 완전히 상실했구나. 고작.... 고작 인간 따위가! 변절자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혈왕에 오른 주제에! 감히! 감히 나를 겁박해?! 고작 네깟 놈이!!

콰앙!!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속세에 적응하기 전의 브라함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엘핀스톤의 모습이 오래간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혈왕의 자리에 도전하겠다!

[혈왕 후보가 당신의 왕좌에 도전합니다.]

[도전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네놈이 두려워 잠자코 있는 줄 알았느냐! 네놈 곁에 브라함이 없었다면 네놈은 진즉에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과연 직계.

그 옛날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엘핀스톤은 분노한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블러드 필드!

실력 또한 여전했다.

어둡고 칙칙했던 베티의 방이 순식간에 혈빛으로 물들면서 엘핀스톤의 마력이 급격히 상승했다.

여전하다는 게 문제다.

“요즘 모기는 참 시끄럽네.”

짜아악!!

그리드가 올려친 손바닥이 엘핀스톤의 뺨을 크게 후려쳤다.

그러자 혈풍을 불러일으키며 기세 좋게 돌진하던 엘핀스톤의 피부가 벽에 부딪친 물풍선마냥 출렁이다가 찢겨나갔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엘핀스톤의 시간은 과거에 멈춰져있다.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토벌 당했던 최후의 날이 엘핀스톤의 마지막 기억이자 체험이었고, 그의 기억 속 그리드는 자신보다 몇 수나 아래였다.

세월이 만든 간극을, 그는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건지 엘핀스톤은 깨닫지 못했다.

뇌가 뒤집히는 듯한 격통과 혼란 속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그가 블러드 필드를 더욱 더 강화시켰다.

콰르르르르륵!!

그리드의 생명력이 조금씩, 조금씩 깎여나간다.

수십, 수백 단위가 누적되어 금세 수천 단위를 넘겼다.

만피가 40만에 도달한 그리드 입장에선 하찮은 수치였다.

-놈!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혈왕이 된 후 제법 성장했나보구나! 하지만 요행은 거기까지다!!

극한의 수혈.

단 일격으로 그리드를 불사 상태에 돌입시켰던 엘핀스톤의 궁극기가 그리드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했다.

혈류의 소용돌이는 매우 신속했고 강렬한 기파를 발산하여 베티의 방을 엉망으로 망가뜨렸다.

하지만 그리드의 동체시력과 경험은 극한의 수혈의 궤도를 손쉽게 간파해버렸다.

‘이렇게 어설픈 공격이었나.’

솔직히 말해서 그리드는 검을 뽑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엘핀스톤의 콧대를 꺾어놓기 위해선 분명한 격차를 느끼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回).”

고요한 발도.

마치 느긋하게 보일 정도로 부드럽게 뽑혀 나온 염룡검이 화염의 폭풍을 만들어 혈류를 집어삼킨다.

-....!?

엘핀스톤의 현재 육신은 허상에 불과했다.

그의 의지가 빚어낸 사념의 현현이었다.

감각이라는 걸 느낄 수 없었다.

한데 엘핀스톤은 자신의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아나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엿본 것이다.

자신과 그리드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눈앞의 인간은 그가 기억하는 인물과 전혀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다른 무엇이었다.

화르르르르륵!!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절망적인 힘의 차이.

무엇조차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육신을 잃고 영혼으로 되돌아간 엘핀스톤이 부르르 떨었다.

-뭐, 뭐냐, 네놈은....?

이정도의 무력감은 여태껏 단 두 번밖에 느껴보지 못했다.

한 번은 브라함에게, 다른 한 번은 마리로즈에게.

설마 그들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의 절망감과 공포를 인간으로부터 느끼게 될 줄이야?

-인간이... 브라함의 도움을 받아 혈왕이 된 인간 따위가 무슨 수로....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엘핀스톤에게 그리드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말이 짧다?”

-죄송합니다! 혈왕이시여!

이곳에서 자신이 두려워해야할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깨달은 엘핀스톤이었다.

육신이 있었으면 넙죽 엎드릴 기세로 소리치는 그의 영혼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거짓말처럼 온화해졌다.

“브라함을 용서하란 말은 안 할게.”

형제간의 일이다.

브라함이 엘핀스톤에게 심한 죄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

엘핀스톤이 브라함을 영원토록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 이해할 정도다.

하니 그리드가 뭐라고 말할 처지가 못 된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하지만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브라함에게 비수를 꽂지 않기를 바란다.”

-....

엘핀스톤은 무려 백작의 직위를 지닌 직계다.

뱀파이어 위에 군림하는 직계 중에서도 상위서열인 그의 분별력이 떨어질 리 만무했다.

그리드의 말뜻을 이해한 그가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수십, 수백 년이 지나면 다시 부활할 수 있고 그때쯤 눈앞의 인간은 죽을 것이다.

브라함에게 복수하는 날은 그때로 미루면 된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철저히 섬기면서 힘을 축적해야겠군.’

의도는 다소 어긋났다고 하나 충성을 바치겠다는 다짐만큼은 진실이다.

그리드에게 새로운 권속이 생긴 날이었다.

고작 300레벨에 불과한 권속이었지만 그리드의 기쁨은 매우 컸다.

엘핀스톤의 잠재력은 직계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편에 속했으니까.

흐뭇한 표정을 짓는 그의 시야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조건 달성으로 첫 번째 혈마법이 개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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