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35화 (63권) (1,225/1,794)

템빨 63권

=======================================

템빨 63권 - 01화

지혜의 탑의 9좌 비반.

무쌍검법의 창시자인 그는 뮐러의 스승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리드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레를 내려놓았다.

“자네, 일전에 탑을 방문했을 때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깨달음뿐이랴.

무한의 검기까지 손에 넣고 급격히 강해졌었다.

여태껏 수많은 장소들을 방문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그리드에게도 지혜의 탑과 탑의 결사들은 각별하게 다가왔다.

“맞습니다.”

“한데 어째.... 별로 성장하지 못한 것 같군.”

그리드가 뜨끔했다.

비반이 말하는 성장이라는 게 레벨을 뜻한다는 사실을 눈치 챈 까닭.

지옥에서 2마리의 대악마를 토벌하고 급격히 성장한 그리드의 레벨은 현재 421.

플레이어 중에선 여전히 최고라지만 결사가 봤을 땐 썩 만족스럽지 못할 게 당연했다.

그렇다.

지금 비반은 그리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부끄럽습니다.”

부끄럽다.

그리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주어진 환경에 비해 자신의 레벨 성장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했다.

“....부끄러울 필요까지 있나.”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비반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른 법이고 자네는 재능이 조금... 그래 아주 조금 부족했을 뿐일세.”

크라우젤에서 그리드로 바뀌었듯이, 머지않아 다시 또 선구자가 바뀌겠구나....

눈치 챈 비반은 그리드에게 깊은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탑의 결사란 속세를 완전히 떠난 존재.

선구자를 제외한 속인과의 만남이 철저히 금지된다.

어쩌면 영원히 이별하게 될 그리드에게 괜한 정을 줬다가 그리움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찾아온 겐가?”

“결사님들 중엔 뱀파이어에 정통하신 분이 계시지 않을까 해서....”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갑자기 왜?”

굳이 긴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드가 엘핀스톤의 반지를 보여주자 자세히 살펴본 비반이 상황을 이해했다.

“충분한 피 맛을 봐서 봉인 된 영혼이 잠에서 깨어났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겐가?”

“네.”

“쯧쯧.... 예로부터 모기새끼들은 싸가지가 없었지.”

과연 수백 년을 살아온 비반답게 뱀파이어와도 인연이 있는 눈치였다.

비반이 만난 뱀파이어는 누구였을까?

그리드가 흥미진진한 표정을 짓자 비반의 손끝이 그리드의 망토를 가리켰다.

“그 망토를 이불 삼아 자던 놈.”

“아, 펜릴....”

“베리아체의 첫째였나, 셋째였나? 별것도 아닌 놈이 콧대만 높아서 매를 벌었다네. 뱀파이어가 대악마들을 적대하지만 않았아도 내 손에 진작 죽었을 놈이야.”

과연.

얼핏 보면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듯한 비반도 결사는 결사였다.

드래곤과 싸우는 한편 ‘세계를 지킨다.’는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간접적으로나마 대악마도 견제해온 것이다.

“저는 펜릴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동료들과 힘을 모으고 사투를 치렀는데 비반 님에겐 쉬운 상대였던 거군요.”

그리드가 자신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우쭐해진 비반이 피식 웃었다.

“나의 검이 베지 못하는 것은 없으니까.”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

검성의 실력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묘사다.

그리드는 문득 궁금해졌다.

“검성의 검은 신도, 용도 벨 수 있는 겁니까?”

신을 베는가, 드래곤을 베는가.

업적에 따라서 초월자는 신살자 혹은 용살자로 전직하게 된다.

초월자의 한계를 증명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초월자는 신과 드래곤 둘 중 하나는 벨 수 있어도 둘 모두는 베지 못한다.

시스템적으로 분명히 그럴 것이다.

허면, 검성은?

비반이 대답해주었다.

“당연히 둘 다 벨 수 있다네.”

“....!”

최강의 전투 직업 클래스 검성의 가치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전율하는 그리드에게 비반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베어서 ‘죽인다’는 결과를 만드는 건 뮐러조차도 뛰어넘는 검성이 등장해야만 가능하겠지.”

비반은 단언한다.

무쌍검법이야말로 역사상 최강의 검술이라고.

천재 중의 천재인 뮐러가 무쌍검법을 고스란히 계승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하지만 비반은 드래곤을 베되 죽이진 못했다.

탑의 결사들 중에서도 드래곤을 죽일 수 있는 건 1좌 하야테뿐이었다.

베는 것과 죽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셈.

“무쌍검법보다 뛰어난 검술을 창안하는 자가 존재하고 그자가 검성이 된다면.... 바로 그자가 신과 드래곤조차 베어 멸할 것일세.”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할까?

비반은 ‘뮐러를 뛰어넘는 검성’이 나타날 거라는 상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반면 그리드는 쉽게 떠올렸다.

“크라우젤.”

“....?”

“비반 공께서 말씀하시는 사람은 크라우젤이군요.”

“응....?”

전혀 아닌데?

검성이 되고 몇 년이 지나도록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으로 모자라 선구자의 자리마저 빼앗긴 그 아이가 무슨 수로?

부정하려던 비반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무쌍검법.

심지어 뮐러가 한 차원 더 발전시킨 뮐러류 무쌍검법의 계승을 한사코 거부했던 크라우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이다.

‘설마?’

비반은 선구자 시절의 크라우젤을 기억한다.

아쉬운 부분을 찾기 힘들었던 재능의 소유자.

검성이 된 후의 행보가 딱히 대단하지 않다고 해서 크라우젤이라는 인물을 폄하할 수 있을까?

‘....없다.’

깨달은 비반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때.

‘나조차도 파그마를 넘어섰어. 크라우젤이라면 분명히 뮐러를 넘어서겠지.’

그리드는 확신하고 있었다.

무쌍검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던 크라우젤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피부 위로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크라우젤은 뮐러를 넘어서는 방법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과연 크라우젤이라는 말밖엔 안 나온다.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느낀 그리드가 오래간만에 국가대항전을 떠올렸다.

국가대항전.

그리드에겐 더 이상 관심 없는 대회였다.

출전하는 모든 종목에서 1등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시시한 무대에 불과했다. 대회 보상으로 얻을 수 있는 숨결들이야 단원들이 알아서 구해다 주니 굳이 참가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우젤과 다시 싸울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와 동등한 강자를 상대로 나는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까?

궁금하다.

확인하고 싶다.

-크라우젤은 당연히 올해 국대전에도 참가하겠지?

길드 채팅으로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템빨단원들이 대답해주었다.

-참가자 명단에 없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더라.

‘역시.’

그리드의 얼굴에 환희가 찼다.

‘크라우젤 너도 국대전이 시시해진 거냐.’

같은 시각 동대륙.

“....?”

모래왕국 가야의 산이란 산은 모두 뒤지고 다니는 중인 크라우젤이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오늘도 양반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그의 기분이 괜히 찝찝해졌다.

***

나란히 복도를 걷는 그리드와 비반의 목적지는 4좌 베티의 방이었다.

비반은 베티가 그리드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그리드는 다소 꺼림칙했다.

‘그 양반은 나를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몇 달 전 지혜의 탑을 방문했을 당시.

베티는 다른 결사들과 달리 그리드에게 관심이나 호감을 표현하지 않았다.

서로 인사를 나눌 때도 이름만 툭 던졌을 뿐이고 작별의 인사를 건네러 찾아온 그리드를 문전박대했을 정도다.

7좌 아벨리오는 그녀가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니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글쎄.... 수백 살 먹은 노파가 뭘 그리 수줍어하겠나. 곁에 있는 비반만 봐도 얼굴에 철판을 몇 장이나 깔았는데.

‘조금 긴장되는군.’

매우 어색할 것 같다.

협조나 제대로 해줄지 의문이다.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키는 동안 두 사람은 이미 베티의 방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쾅쾅!

비반이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라기보다는 때려 부수려는 느낌이었다.

“어이, 할망구! 손님 왔어!!”

끼익.

방문이 살짝 열렸다.

방문 틈새로 살짝 고개를 내미는 베티의 눈동자는 여전히 매우 컸다.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느낌을 주었지만 동그랗고 짙어서 참 예뻤다.

외견만 보면 로드랑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정말이지 며느리 삼고 싶을 정도.

“....무슨 일?”

꾸벅,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그리드를 빤히 바라본 베티가 곧장 용건을 물었다.

어색하게 웃는 그리드를 대신해서 비반이 설명했다.

“뱀파이어의 영혼이 말을 안 듣는다네?”

베티의 시선이 그리드의 손으로 향했다.

“그 아이 말이지?”

놀랍게도 엘핀스톤의 반지를 한 눈에 알아보는 베티였다.

아무래도 그리드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여겨 본 눈치였다.

“마, 맞습니다.”

처음 만난 날.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소개했던 다른 결사들과 달리 베티는 단지 이름만 밝혔을 뿐이다.

그녀의 정체는 정확히 무엇이기에 뱀파이어에 정통하다는 것이며 엘핀스톤의 반지를 한 눈에 알아본 걸까?

기대감과 의문에 찬 그리드에게 베티가 턱짓했다.

“들어와.”

“네.”

“비반 너는 나가.”

“응? 나한텐 왜 쌀쌀맞게 구는 겐가?”

“딱히. 용건이 없을 뿐이야.”

“....”

쾅.

베티가 방문을 닫자 복도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비반의 마음이 울적해졌다.

이 넓은 탑에서 그와 함께하는 건 걸레뿐이었으니 오늘따라 특히 더 외롭고 우울했다.

***

“몇 달 전하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초월의 격을 많이 쌓아올렸어.”

오성이 낮은 비반과 달리 그리드의 내적 변화를 바로 눈치 채는 베티였다.

비반은 그리드에게 실망한 반면 베티는 그리드가 짧은 시간동안 이뤄낸 성장에 매우 놀라워했다.

“네.... 어쩌다보니.....”

방의 풍경은 그리드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밝고 화려한 색으로 치장된 공주님 방을 상상했는데 실상은 어둡고 칙칙했다.

달콤한 향기가 아닌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인형 대신 해부표본이 방 곳곳에 가득 늘어서있었다.

조류, 양서류, 파충류 등의 작은 짐승이 아닌 각종 몬스터와 마족의 해부표본.

심지어 인간처럼 이족보행하는 종족들의 해부표본이 족히 50개 이상 늘어져 방의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를 도륙해온 그리드에게도 소름 돋게 다가오는, 다소 끔찍하고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을 입 밖에 꺼내는 건 실례일 테지.

마침 조명 대신 사용되고 있는 마력의 구체를 발견한 그리드가 화제를 돌렸다.

“라이트 마법을 수십 개나 동시에 유지하고 계시는 걸 보니 마법사이신가 보군요.”

“그거 마법 아니야.”

“?”

빛의 정령하고는 많이 다른 느낌인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설명했다.

“영혼이야.”

“....네?”

베티의 시선이 해부표본들을 가리켰다.

“저것들의 영혼.”

“.....”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생각은 장난으로라도 하지 말아야할 것 같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히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바알의 첫 번째 계약자.”

“....!?”

스르륵.

베티가 헐렁하게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드러난 맨몸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목과 머리, 그리고 하반신을 제외한 신체 대부분이 해골이었기 때문.

말랐다는 표현이 아니라 마치 스켈레톤처럼 뼈만 있었다.

“혐오스런 실패작. 덕분에 바알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이렇게 숨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

“나는 영혼을 잘 알아.”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은 베티가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멍하니 굳어있던 그리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엘핀스톤의 반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직계 뱀파이어는 대악마와 똑같은 윤회 구조를 갖고 있어. 지금은 비록 육신을 잃었다고 해도 언젠간 반드시 부활할 수 있다는 뜻이야. 이 아이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집을 피우는 거고.”

자신의 전문분야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말수가 부쩍 늘어나는 베티였다.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는 그리드에게 베티가 질문했다.

“너는 이 아이를 완전하게 통제하고 싶은 거지?”

“네.”

“언젠가 바알과 싸우려면 이 아이의 힘이 필요한 거고?”

베티는 바알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류가 바알과 전쟁을 벌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협조할 생각이었다.

바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지혜의 탑에 의탁한 그녀는 자신을 대신해서 바알을 소멸시킬 영웅들의 출현을 소망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맞습니다.”

“알았어. 그럼 이 아이의 희망을 꺾어놓을게.”

꾸득, 꾸드득.

베티가 엘핀스톤의 반지에서 엘핀스톤의 영혼을 꺼내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실현하는 기적이라기보다는 물리적으로 끄집어내는 행위에 가까웠다.

엘핀스톤의 영혼이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방을 진동시키며 그리드를 긴장시켰다.

흰색 빛에 휩싸인 베티의 손가락이 급기야 모습을 드러낸 엘핀스톤의 영혼을 겨누었다.

“이 아이가 갖고 있는 윤회의 고리를 끊을 거야.”

순간.

-그리드! 아니, 그리드 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몇 년째 불통으로 일관했던 엘핀스톤의 다급한 외침이 방안에 메아리쳤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