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21화
25시간.
하루를 약간 넘기는 시간이면 지구 반대편까지 이동할 수 있는 시대다.
물론 ZA87-100급 이상의 항공기를 이용할 경우의 이야기지만, 템빨단의 주요 멤버들에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항공료도 큰 부담이 아니었다.
항공기보다 몇 배는 비싼 호화전용기를 갖고 있는 멤버도 수두룩했고 말이다.
“음....?”
스페인을 대표하는 플레이어 폰.
백마 탄 왕자님, 혹은 기사님이라고 불리며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그 또한 전용기를 갖고 있었다.
한국까지 이동하는 동안 들를 3개의 급유 지점을 보고하는 기장에게 알아서 하라고 대꾸하고 캡슐에 앉은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드와 십공신 등, 템빨단의 주요 멤버들이 참가하고 있는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한 줄의 공지 때문이었다.
모임 장소가 이상했다.
“텍사스식 바비큐? 왜?”
왜 머나먼 한국까지 가서 미국 요리를 먹어야하는 거지? 라는 불만으로부터 비롯한 의문이 아니었다.
세상에 텍사스식 바비큐를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장시간 훈연해 입에서 살살 녹는 브리스킷은 폰도 매우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폰이 의문을 느끼는 이유는 단지 극검의 성향 때문이었다.
극검은 한식이야말로 최고로 맛있고 몸에 좋은 세계제일의 음식이라는 자부심을 품은 인물 아닌가.
여태까지 한국에서 모임을 가질 때면 대부분 한식점을 방문하곤 했는데 텍사스식 바비큐라니?
‘오늘은 극검이 안 나오는 건가? 어찌됐든 마음은 편해서 좋군.’
요리에 국경은 없다는 게 폰의 가치관이었다.
모든 나라의 음식은 존중 받아 마땅하며 각자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폰은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한식점을 방문할 때면 부담스러웠던 이유가 뭐냐면 극검이 꼭 음식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한식을 홍보하라고 강요했었기 때문이었다.
‘두 유 노우 김치? 두 유 노우 국밥?’
한국행에 오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귓가에 맴돌던 극검의 지긋지긋한 질문이 드디어 희미해진 것을 느낀 폰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캡슐에 누웠다.
비행시간 동안에도 Satisfy를 플레이하는 건 그에게 지극히 당연한 습관 아니, 의무였다.
***
“맛있어! 혀에서 살살 녹아! 입안을 휩쓰는 육즙에서 느껴지는 감칠맛이 최고야!”
신영우.
Satisfy의 지존이며 템빨국의 존엄인 그의 현실 모습은 여전히 순박했다.
옷과 액세서리 모두 명품을 치장하는 게 당연해진 다른 템빨단원들과 달리 평범한 브랜드의 의상을 즐겨 입었고 ‘음식을 먹는다.’는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큰 기쁨을 표현할 줄 알았다.
‘차도 벌써 몇 년째 똑같은 것만 타고 있고.’
“칫, 쯧, 흥.”
신영우가 타국 음식을 찬양하며 먹을 때마다 혀를 차며 불만을 표출하는 극검을 무시한 반트너가 영우에게 질문했다.
“그리드 넌 평소에 돈 어디다가 쓰냐?”
왜 더 좋은 차를 타지 않고 더 좋은 명품을 치장하지 않느냐는 둥, 철없는 질문을 던지려는 게 아니다.
다만 순수하게 궁금할 뿐이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부자가 된 그리드가 돈을 다 어디다가 쓰고 있는 건지.
“우물우물 꿀꺽. 운동 기구 사는데 쓰고, 부모님 보약 지어드리는데 쓰고, 세희 독립해서 살 집 짓는데 쓰고, 생활이 힘드신 분들께 기부하고, 땅도 사고, 음.... 여기저기?”
“갓리드! 가장 중요한 걸 빼먹었잖아!!”
내내 투덜거리면서도 바비큐와 빵을 맛있게 먹던 극검이 끼어들었다.
“세금 왕창 내서 조국에 이바지하고 있지 않냐!! 갓리드 넌 정말 대한민국의 큰 자랑이라고!!”
한국은 Satisfy로 번 돈을 불로소득으로 취급한다.
그 탓에 신영우가 내는 세금은 이것저것 다 따지면 수익의 50퍼센트에 육박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탈세혐의도 받지 않은 인물이 바로 신영우였다. 극검과 유라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극검, 대한애국협회 강대한은 세금을 잘 내는 것만으로도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불로소득.”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된 템빨단원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지슈카와 툰처럼 한국으로 이민 올 계획을 세웠던 상당수의 템빨단원들의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신의 섣부른 발언 때문에 조국에 세금을 갖다 바칠 고수익자들을 놓쳤단 사실을 깨달은 극검이 뒤늦게 후회하며 수습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질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맥주 한 병을 통째로 들이킨 극검이 김치를 찾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저놈 취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하, 호호.
지슈카, 페이커, 유페미나를 나란히 가운데에 앉혀놓고 진행된 파티는 밤이 깊어질수록 무르익었다. 흥에 취한 반트너에게 등을 떠밀려 2차, 3차까지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도 싫은 내색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현실 시간으로 5년 혹은 6년.
함께해온 세월이 세월이니만큼 템빨단원들은 서로를 친구처럼, 가족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어색했던 카츠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적이었고, 게다가 일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극검에게 종종 헛소리를 듣고 반목했던 카츠 또한 이제 완전한 템빨단원이었다.
카츠는 자신이 템빨단을 아낀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드에게 늘 감사하고 있단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드. 내일 한국에다가 내 전용기 놔두고 갈께. 신형이다. 1번밖에 안 탔어. 명의 바꿔.”
취기가 잔뜩 올라선 어눌한 한국어로 말하는 카츠였다.
그러자 쯧쯧 혀를 찬 극검이 카츠를 질타했다.
“누가 재벌 3세 아니랄까봐 뭐든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네. 그 고약한 버릇 좀 고쳐라. 엉? 그리드는 너랑 이렇게 같이 밥 먹고, 술 먹으면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널 좋아하고 신뢰하는데 뭔 또 비행기를 갖다 바치겠다고 난리야, 난리가!! 넌 우리 갓리드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미안. 방금 한 말 취소.”
“하하하! 그래 좋아! 마셔! 오늘 죽자!! 전설로 전직한 놈들을 다시 한 번 축하하며! 건배!!”
“.....”
내내 기분 좋게 웃던 신영우가 극검을 게슴츠레하게 노려보기 시작했지만 극검은 그 사실을 몰랐다.
후로이가 교묘한 언변으로 극검을 살살 갈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극검은 이유 모를 짜증을 느꼈지만 어찌됐든 즐거웠다.
***
“역시 해장엔 햄버거지.”
정말이지 밤새 달렸다.
오래간만에 게임 생각 안 하고 마음 편히 현실을 만끽했다.
아침 일찍 떠난 템빨단원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툰이 사다준 치즈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신영우가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가볍게 운동하고,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가족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뒤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컨디션을 조절하다가 Satisfy에 접속했다.
‘오늘 할 일은....’
템빨국 왕도 라인하르트.
신영우 아니, 그리드가 일정을 점검했다.
행정관 라빗이 신규 사업에 관해서 논의하고 싶다고 했고 라우엘은 주간 국왕 퀘스트를 몇 개 더 추가해달라고 했었다.
그 외의 일정은 딱히 없다.
가족과의 시간은 어제 충분히 보냈고 다시 지옥으로 출정하기 위한 채비도 끝마쳐놓은 상태다.
곧바로 지옥으로 출발해 렙업에 열중해도 좋겠지만 그리드는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일단 라티나의 목걸이는.... 역시 볼렛에게 맡기자.’
라티나의 목걸이는 현재 유니크 등급까지 성장한 상태다.
착용자의 지력을 350 상승시키며 언데드 소환수의 능력치를 강화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아이템 자체의 기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시킬 경우 뱀파이어 자작 라티나를 소환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성장 난이도에 있었다.
그리드 입장에서 라티나의 목걸이의 경험치를 올리는 방법은 단 하나, 템빨골을 소환하는 행위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문득 계산해보니 라티나의 목걸이를 레전드리 등급까지 성장시키기 위해선 최소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에티마의 대검을 크리스에게, 크레이의 팔찌를 유페미나에게 맡겼듯이 라티나의 목걸이 또한 대리 육성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렛이 적임자야.’
불렛은 네크로맨서 랭킹 2위의 엄청난 실력자다.
네임드급 데스나이트를 보유하고 있으며 수백 마리의 스켈레톤을 동시 소환, 통솔하는 게 가능했다.
고작 2마리의 템빨골밖에 소환 못하는 그리드보단 불렛이 라티나의 목걸이를 사용하는 편이 위력적인 측면에서나 성장속도 측면에서나 몇 배나 더 뛰어난 효율을 보일 것이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불렛에게 선뜻 목걸이를 맡기지 못했던 이유는 라티나의 목걸이가 그리드에게 좋은 아이템이었기 때문.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헬가오를 레이드하고 얻은 위계의 목걸이 때문에 라티나의 목걸이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래, 불렛에게 맡긴다.’
어차피 위계의 목걸이와 반지를 세트로 애용할 예정이니 라티나의 목걸이는 당분간 불렛에게.
결정한 그리드가 다음으로 떠올린 건 엄청난 골칫덩이였다.
<엘핀스톤의 반지>
등급:레전드리
*일반 공격 시, 대상에게 입힌 피해량의 22%만큼 회복합니다.
*스킬 공격 시, 대상에게 입힌 피해량의 10%만큼 회복합니다.
*이 효과는 16초에 한 번만 발동합니다.
*근력, 체력, 지력 +50
백작급 진혈족 엘핀스톤의 고유 마력이 깃든 반지입니다.
착용자의 잠재력을 끌어 올리고 생존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시킵니다.
★반지의 등급이 레전드리까지 성장하여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무게:1
그리드가 Satisfy를 플레이하면서 얻은 아이템 중 여전히 손꼽히는 가치를 지닌 흡혈 아이템.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 중 하나인 브라함의 뱀파이어시절 에피소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엘핀스톤의 상징물이니만큼 이 반지는 매우 훌륭한 성능을 자랑했다.
하물며 흡혈이 발동할 때마다 소량, 혹은 극소량의 경험치를 획득했기 때문에 수 년 만에 레전드리 등급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문제는 반지가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 된 이후에 찾아왔다.
브라함과 몇 차례나 동화하고, 이후에는 브라함의 마법을 계승하기까지 한 그리드에게 엘핀스톤이 큰 반감을 품은 것이다.
이야루그트처럼 패서 교육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엘핀스톤이 당신의 소환에 불응합니다.]
엘핀스톤은 그리드의 소환에 아예 불응했으니까.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되고 지금까지, 그리드는 단 한 번도 엘핀스톤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쯤 되면 나를 브라함이라고 착각하는 수준 같은데.’
착각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다.
브라함으로부터 지공과 마법 관조를 차례대로 계승하고 혈왕의 지위까지 오른 그리드의 기척은 엘핀스톤 입장에서 봤을 때 브라함과 닮아있을 수도 있었다.
브라함에게 누구보다 깊은 원한을 품은 엘핀스톤의 사념이 브라함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일 테고.
‘일단 한 번만 소환할 수 있으면 그 후엔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 것 같은데....’
대현자 스틱세이도, 대마법사 브라함도 해결방안을 모르겠다고 하니 답답할 노릇.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할까?
‘마리로즈?’
아니 그건 미친 짓이고.
한동안 고민해보던 그리드가 탑의 결사들을 떠올렸다.
스틱세이와 브라함보다 더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전대 전설들.
그들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가보자.’
기껏 얻은 선구자 칭호를 이럴 때 써먹지 언제 써먹겠나.
오늘따라 괘씸하게 느껴지는 엘핀스톤의 반지를 한 번 쥐어박은 그리드가 지혜의 탑으로 떠났다.
치우의 시험을 통과하고 29위 대악마와 33위 대악마의 힘까지 흡수한 그는 이제 탑의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탑이 새로운 시험을 요구한다고 해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품었다.
탑에 도착한 그를 반겨준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대질 중인 검성 비반이었다.
“신성한 정화 작업 중일세.”
“네.....”
“설마 의심하는 겐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후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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