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230화 (1,220/1,794)

템빨 62권 - 17화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레이드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드와 웃으며 기쁨을 나눈 유라가 곧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연속적인 위기를 겪은 탓에 정신적인 탈력감이 장난 아니었다.

사실상 혼자서 마르코시아스와 싸운 그리드가 느낄 피로도는 얼마나 높을지 걱정될 지경.

‘....기운 내라고 애교라도 보여줘야 하나?’

이럴 때를 대비해서 연습을 해놓긴 했는데 글쎄.... 긴장된다.

“....?”

뺨을 몇 번 부풀리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유라가 그리드를 돌아보았다가 잠시 멍해졌다.

그리드가 엄청나게 팔팔했기 때문이다. 지친 기색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 푹 자고 일어난 사람마냥 상쾌하게까지 보였다.

당연하다.

보잘 것 없던 73렙 전사 시절에도 정신력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인물이 그리드니까. 북쪽 끝의 동굴을 찾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좌초되고, 수십 번을 죽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든 결국 레이드에 성공한 이상 그의 정신력은 금세 다시 회복됐다. 설령 레이드에 실패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오래간만에 정말 보람차군.’

그리드는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수십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서 버텼던 마르코시아스.

급기야 수십 만 마물 군단까지 소집한 녀석은 <깨달음>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레이드 상대였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좋은 샌드백이었다.

직업 고유 활동, 혹은 전투 시 지속적으로 경험치를 획득하는 깨달음 효과에 제대로 불이 붙어서 레벨이 무려 4개나 올랐으니 그리드는 횡재한 기분이었다.

‘드롭 아이템도 굉장히 훌륭하고.’

마르코시아스가 드롭한 아이템은 석화의 방패.

방패 고유의 방어력이 최상급인 것은 물론이고 착용자의 신체 일부를 석화시켜서 특정 부위 방어력을 퍼센티지로 강화시킨다. 게다가 방패를 마주보는 대상을 높은 확률로 석화시켰으니 최강의 방패임과 동시에 무기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옥의 대악마가 드롭한 아이템답게 엄청난 성능이야.’

이 방패를 제대로 활용하고 싶다. 당분간 방패술을 파고 들어도 좋을 듯하다.

‘안 그래도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가 업그레이드 돼서 기분 좋았는데 덩달아 좋은 일만 생기는군.’

파그마를 영웅으로 인정한 그리드의 서사시 덕분에 파그마의 전설이 더 깊이, 더 널리 알려졌다. 그 반동으로 파그마가 생전에 남겼던 작품들이 모두 한 단계씩 등급이 오른 상태였다.

당장 유라의 마법공학총만 봐도 예전과 비교가 안 되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뿌듯하게 미소 짓는 그리드의 시야에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월드 메시지였다.

[제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가 지옥에서 토벌 당했습니다.]

메시지가 지옥이라는 장소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검성 뮐러조차도 지옥에서 대악마를 토벌한 적은 없기 때문.

데빌 슬레이어 알렉스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인류가 지옥에서 대악마와 싸워 이긴 것은 이번이 최초였다.

[인류의 등불, 템빨왕 그리드가 세운 업적입니다.]

[지옥의 대적들을 긴장시킨 그의 활약은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찬양해야 마땅합니다.]

메시지가 끝나고,

[대륙 전역 명성이 1,000,000 상승하였습니다!]

그리드는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로 대량의 명성을 획득했다.

그리드가 여태껏 평생 쌓아올린 명성의 족히 3배에 가까운 명성을, 단 한 번에 말이다.

‘100만이면 뽑기를 1,001번이나 돌릴 수 있는 양이잖아?’

아무리 똥손이라도 천 번 이상 뽑기를 돌리면 뭐 하나 제대로 건지지 않을까?

생각하던 그리드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도박은 금물이다.’

순전히 운에 기대야하는 컨텐츠에 집착해봤자 돌아오는 건 후회뿐이다.

1퍼센트, 0.1퍼센트, 혹은 0.0001퍼센트의 확률을 뚫고 행운이 따르길 바라는 순간 패가망신행 급행열차를 타게 될 것이다.

끓어오르는 충동을 단호히 끊어버린 그리드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명성 상점에도 신상이 입고된다는 소문이 있었지....’

지갑은 두둑하다.

아무리 비싼 물건이라도 화끈하게 구매할 수 있다.

기대감을 품은 그리드가 명성 상점을 소환했지만 지옥에서는 불가능했다.

[황금 마차를 불러올 수 없는 지역입니다.]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아쉬움을 달랜 그리드가 힐끔 유라를 돌아봤다.

그가 마르코시아스 레이드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

한데 월드 메시지 보상을 혼자서 독차지한 느낌이라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그리드의 염려를 읽은 유라가 설명했다.

“대악마를 쓰러뜨리는 건 데빌 슬레이어의 과업이에요. 마르코시아스를 처치한 보상으로 꽤 많은 양의 스탯이 상승하고 새로운 스킬까지 얻었으니 저도 크게 이득을 봤어요.”

그리드가 유라 덕분에 마르코시아스를 처치할 수 있었듯 유라 또한 그리드 덕분에 마르코시아스를 처치하고 서른 개가 넘는 직업 퀘스트 중 하나를 클리어했다.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리드는 뜨끔했다.

‘대악마를 쓰러뜨리는 게 유라의 퀘스트인 줄도 모르고 나 혼자 독식하려고 했던 거네.’

앞으로는 대악마를 레이드할 때마다 꼭 유라와 함께해야겠다....

다짐하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고개를 저어보였다.

“굳이 배려해주실 필요 없어요. 대악마의 공백은 어차피 빠르게 메워지니까. 설령 마르코시아스 레이드에 참가하지 못했다고 해도 새로운 29위 대악마가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레이드하면 될 일이었죠.”

실제로 29지옥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방으로 흩어졌던 마물 군단이 곳곳에서 새로운 구심점을 찾고 다시 집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 왕좌는 나의 것이다!!”

천차만별의 뿔과 피부색을 지닌 악마들이 각지에서 싸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하필 그리드 일행 근처에 나타난 악마들은 잠시 휴전을 맺고 그리드 일행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거 빡센데.”

정신력과 체력은 별개의 문제다.

그리드의 몸은 그의 기분과 달리 천근만근 무거웠고 대악마 후보자들의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평균 450레벨대의 던전 보스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며 유독 레벨이 높은 몇 놈은 대악마에 필적하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대부분의 스킬들이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린 그리드와 유라 입장에서 마물 군단을 위시한 악마들의 공세에 버틴다는 건 사실상 힘든 일.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붉은 피부의 악마 글런트가 떨어져 내렸다.

“말은 바로 해야죠. 대악마의 공백이 생긴 지옥을 정화하는 게 당신의 최종 과업 아닙니까?”

파지직!!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던 악마.

매번 왕좌 쟁탈전을 벌이는 악마 중에서 글런트처럼 오래 살아남은 악마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그리고 글런트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콰르르르르릉!!

강하기 때문이다.

붉은 전류를 폭발시켜 쇼크 웨이브를 일으킨 글런트가 눈을 까뒤집고 경련하는 마물들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이보세요, 그리드. 저의 주인님께서 과업을 완수하길 바란다면 대악마를 토벌할 때마다 반드시 그녀와 함께하세요. 새로운 대악마가 탄생하길 기다렸다가 그 대악마를 또 다시 토벌하고 지옥을 정화하는 방식으론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이 걸릴 텐데 그게 인간의 수명으로 가능한 일 같습니까?”

차마 그리드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아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지 않은 유라를 대신해서 진실을 알려주는 글런트였다.

글런트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유라의 어깨 위로 그리드가 손을 얹었다.

“유라하고 함께할 수 있으면 나야 고맙고 기쁘지.”

혼자서는 마르코시아스조차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유라와 함께라면 마르코시아스 이상의 대악마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애초에 이번 레이드를 그리드 혼자서 진행하려고 했던 이유는 스스로의 실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지 어떤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계속 혼자서 싸울 거라는 고집을 피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저도 좋아요.”

지옥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난 듯하다.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유라가 지옥 규제와 멸악의 경계선, 그리고 지옥 정화 스킬을 차례대로 사용했다.

주인 잃은 29지옥은 그녀의 영향력을 거부하지 못하고 차츰 마기를 잃어갔다.

“빌어먹을! 한 발 늦었군!!”

“글런트으! 이 더러운 변절자 놈!! 뒤져서 천국에나 가라!!”

마기를 잃은 지옥은 악마들에게 일말의 가치조차 없는 땅이다.

전쟁의 의미를 잃은 놈들이 미련 없이 29지옥을 떠나기 시작했고 또 다시 주인을 잃은 마물 군단은 잠시 배회하다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푸르게 변하기 시작한 하늘을 넋 놓고 바라보던 그리드가 전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정화된 지옥에선 정확히 뭘 할 수 있는 거지?”

“중립 지역으로 만들어서 마족들을 불러 모을 수 있어요. 궁극적으론 도시를 형성해서 세금과 특산물을 거두는 거죠.”

“다른 대악마들이 그 꼴을 잠자코 지켜봐?”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중립 지역을 건드려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는 것 같아요.”

글런트가 끼어들었다.

“그리드 당신이라면 그 이유를 쉽게 유추할 수 있을 텐데요?”

“....?”

“중립 지역의 도시마다 어떤 동상이 있는 걸 못 봤습니까?”

“설마 그건 야탄 신의 동상이었던 건가?”

“맞습니다.”

“그랬군.... 그랬던 거였어.”

절대신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말인 즉, 인간의 신앙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레베카는 인간들의 신앙에 집착한다.

신앙이 쌓일수록 더 큰 힘을 얻기 때문.

‘그건 야탄 또한 마찬가지겠지.’

중립 지역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마족들(지옥의 백성들)이 야탄을 섬김으로써 야탄은 강해지고 야탄이 강해질수록 야탄의 피조물(악마들) 또한 덩달아 강해진다.

그러므로 대악마는 중립 지역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지옥의 생리를 이해한 그리드가 빠르게 계획을 짰다.

“일단 30번대 지옥부터 깔끔하게 정리하자. 29위 대악마도 처치한 마당에 30위대 대악마한테 쫄 필요는 없잖아? 맞지?”

유라가 32지옥을 템빨단 지옥지부라고 소개했을 당시만 해도 그리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다.

황량한 벌판과 가끔 보이는 마물들이 전부인 이런 땅에 어떤 가치가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다.

지옥 또한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영토이며, 소중한 돈줄이 될 거란 사실을 알게 된 이상 그리드는 템빨단 지옥지부를 최대한 크게 확장시키고 싶었다.

“아, 그 전에 대장간부터 들르고 싶은데....”

매번 스태미나에 발목을 붙잡히는 것도 지긋지긋하다.

스태미나 회복에 도움을 주는 아이템의 개발과 제작을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다.

지상으로 돌아갈 채비를 갖추는 그리드에게 유라가 말했다.

“지옥에도 대장간이 있어요.”

‘헬스미스!’

지옥 유일의 대장장이.

수 년 전에 잠시 마주쳤던 마족의 모습을 떠올린 그리드가 두 눈을 반짝였다.

“어디에 있는지 아는 거야?”

“네, 저 거기 단골이에요.”

“....!!”

***

바알의 계약자의 단점은 딱 하나.

지옥에서 사냥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지옥의 모든 마물과 악마는 바알을 섬겼고 바알의 계약자에게도 우호적이었다.

아그너스에겐 지옥의 마물과 악마들이 몬스터가 아닌 NPC로 판정된다는 뜻.

아그너스는 지옥이 아닌 지상에서 새로운 사냥터를 물색해야했다.

[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가 인간에게 사망했다는 비보가 도착했습니다.]

카오스 산맥에 막 도착한 아그너스에게 의외의 소식이 날아왔지만 아그너스는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안드라스와 싸우는 그리드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그의 실력이 어지간한 대악마를 넘어서고 있음을 눈치 챘기 때문.

심지어 그리드 곁에는 데빌 슬레이어 유라가 함께이지 않던가.

질타와 모멸에 익숙했던 약자.

착취당한 끝에 홀로 설 수 없던 패자(敗者).

언젠가 협곡에 메아리쳤던 그리드의 첫 번째 서사시를 되새겨본 아그너스의 표정이 산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보다 냉랭해졌다.

‘너 또한 나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서....’

무슨 수로 다른 사람들을 믿고, 함께할 수 있던 거지?

너의 지금은 그들 덕분이었노라 단언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여전히 혼자인 나의 삶은 실패인가.

멈칫.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유유히 걸어 오르던 아그너스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어깨에 거대한 대검을 짊어진 사내가 산의 중턱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통합 랭킹 2위이자 템빨국 무력의 상징 중 하나, 크리스였다.

“아그너스?”

“어딜 가나 템빨단 투성이군. 딱히 용건이 없다면 비켜라.”

“....!”

산맥 곳곳을 꿰뚫고 나타날 데스나이트와 리치의 습격에 대비하며 긴장하던 크리스가 당황했다.

아그너스가 굳이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쳐간 까닭.

눈만 마주쳐도 사람을 공격했던 미친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크리스가 아그너스를 불러 세웠다.

“아그너스 네가 이곳엔 무슨 용무지?”

“내가 그걸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여긴 템빨국령이라서 말이다. 방문자의 목적 정도는 알아둬야 방문을 허가할지, 말지 결정하지. 안 그래?”

국가나 길드가 특정 구역을 통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히 사냥터를 독점하기 위해서일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분란을 억제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트러블 메이커인 아그너스의 방문을 환영할 국가는 세상에 단 한 곳도 없었다.

당연히 템빨국도 마찬가지였고.

“허가? 내가 너한테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아그너스가 밟고 선 설원 주변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곧 이어 튀어나온 해골 병사들의 갑옷을 확인한 크리스가 도끼눈 떴다.

“이 개새끼가!!”

해골 병사들의 갑옷엔 템빨국의 상징과 스테임 공작가의 상징이 각인돼 있었다.

프론티어 소속 병사들이 입고 있던 갑옷이다.

콰아아앙!!

크리스의 천톤 검이 설원을 후려치자 거대한 산사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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