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62권 - 16화
‘이로써 3페이즈.... 이번이 마지막 페이즈면 좋겠는데.’
그리드는 레이드를 질질 끌 생각이 없었다.
파그마의 영혼을 만나 서사시를 쓴 것을 계기로 지옥에서의 페널티가 사라졌다지만 마르코시아스와 비교하면 지구력이 한참 부족했기 때문.
예로부터 ‘버티는데’ 최적화 된 방어형 몬스터의 강점은 무한에 가까운 지구력에 있었다.
하물며 이곳은 지옥이고 마르코시아스는 대악마이다.
마기를 계속해서 공급받고 있는 녀석이 지쳐서 쓰러진다는 가정은 어지간한 멍청이가 아닌 이상 세우지 않았다.
‘내가 먼저 지쳐서 쓰러지기 전에 결착을 짓는다.’
그리드는 속전속결을 노렸다.
검무와 마법은 물론이고 아이템과 칭호 효과로부터 비롯한 스킬 대부분을 레이드 초반부터 모조리 쏟아부었다.
하지만 비장의 패로 신격과 5융합검무는 남겨뒀다.
바꿔 말하면 신격과 5융합검무 없이도 29위 대악마를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뜻이다.
지상에서의 벨레드보단 한 수 아래인 상대.
아직 그리드에겐 여유가 있었다.
물론 방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르코시아스가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는 패턴이 단순하기 때문일 뿐. 능력치는 여태껏 그리드가 싸워온 대악마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했으니까.
더군다나 최종 페이즈의 대악마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서 학습한 바 있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3페이즈 뒤에 4페이즈가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르코시아스의 남은 생명력은 고작 10퍼센트.
여태껏 다른 대악마가 최종 페이즈에 돌입할 때 남겨뒀던 생명력이 20퍼센트에서 10퍼센트였던 점을 고려하면 마르코시아스의 3페이즈가 최종 페이즈일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수렴했다.
판단한 그리드가 여전히 제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있는 마르코시아스에게 다가가며 춤사위를 펼쳤다.
초연살파극.
오로지 파멸을 그리는 심상이 현현하여 일대의 공간을 위압감으로 지배한다.
그리고 그 위압감은 그리드가 한 번의 보폭을 밟을 때마다 더욱 비대해져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르코시아스의 의지가 꺾일 일은 없었다.
명색이 네임드 보스가 정신계 상태이상에 걸릴 리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한껏 팽창했던 마르코시아스의 피부와 근육이 수축을 일으켰다. 마치 쥐어짠 걸레처럼 메말라갔다. 몸속의 혈액과 수분이 모조리 증발해버린 건 아닐까 착각이 생길 정도.
3페이즈의 영향으로 발생한 변화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그리드는 경계했지만 위축되진 않았다.
초연살파극은 그리드의 가장 강력한 필살기 중 하나.
마르코시아스가 무슨 수작을 부리던 초연살파극이 꺾일 일은 없다는 게 그리드의 판단이었다.
콰르르르르르르르릉!!
과연.
검기의 파도를 일으키며 흉포하게 울부짖는 초연살파극의 기세는 마르코시아스의 변화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꽈드드드드드득!!
마르코시아스의 근육이 극한까지 수축됨과 동시에 10퍼센트만 남겨놓고 텅 비어있던 놈의 생명력 게이지가 가득 충전됐다는 점에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명력이 회복된 건 아니었다.
붉은 색으로 표시되는 생명력 바와 달리 백색으로 표시되는 것을 보아 생명력이 아닌 다른 무언가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실드!’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정!!
회당 5,000퍼센트의 물리공격력 계수를 지닌 살(殺)의 검기가 <브라함식 인챈트 웨폰>으로 강화된 상태로 무려 7회나 마르코시아스를 난도질한다. 날카로운 절삭음을 퍼뜨리는 윈드 커터가 함께 분사됐고 유도 효과를 지닌 파(派)의 검기는 모조리 마르코시아스의 급소에 적중하며 극(極)으로 변화했다.
본래라면 마르코시아스가 비명을 토하게 만드는 게 당연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의 연계였다.
하지만 마르코시아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실드가 그의 전신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
마르코시아스가 자신의 혈액을 분출하고 석화시켜 만들어낸 실드였다.
게이지로 확인되는 실드 소실량은 고작 6퍼센트....
그리드를 당혹하게 만드는 결과였다.
‘초연살파극이 본체에 닿질 않아서 방어력 무시 효과가 무시당한 건가?’
보스 몬스터의 최종 페이즈는 일종의 회광반조다.
평소의 성격, 전투 스타일과 관계없이 모든 보스 몬스터가 최종 페이즈에 돌입하는 순간 폭발적인 공격성을 발휘했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생명이 꺼지기 전에 눈앞의 적을 말살하기 위해서 모든 저력을 끄집어냈다.
반면 마르코시아스의 최종 페이즈는 너무나도 정적이었다.
혈액을 분출하고 석화시켜 몸을 겹겹이 에워싸곤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다.
눈앞의 적에게 집착하는 기색이 추호도 없었다.
‘단지 죽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니.’
삶에 대한 의지가 지독할 정도로 강렬하다.
‘레이드가 불가능한 건가?’
청룡의 부츠와 벨리알의 힘을 빌려서 스태미나의 소모를 최대한 억제한다고 해도 마르코시아스를 시간 내에 쓰러뜨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쩌면 마르코시아스는 일부 히든 NPC처럼 ‘죽이지 못하는 대상’일 수도 있다....
그리드가 생각하는 그때였다.
-나는 이미 너희들에게 몇 번이나 제안했다.
뇌리에 직접 울리는 음성.
마치 바알이 그랬던 것처럼 마르코시아스가 그리드와 유라에게 사념을 전달했다.
미라처럼 메마른 그의 입은 석화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내 제안을 무시하고 굳이 날 적대한 것을 후회하며 죽어가라.
“?”
스스로를 석상으로 만들어놓고 아무 것도 안 하는 주제에 죽으라니?
숨겨둔 패가 있는 걸까?
그리드가 불안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키야아아아아!!
키에에에에에!!
울퉁불퉁한 지상과 새카만 하늘 전역을 뒤덮는 마물의 군단이 출몰했다.
온갖 종류의 마물이 기괴하게 울부짖으며 해일처럼 몰려왔다.
-22개의 군단을 다스리는 29지옥의 군주를 상대로 고작 두 명의 인간이 뭘 할 수 있겠느냐?
지옥에서의 대악마가 지상에서의 대악마보다 강한 본질적인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모든 대악마는 각자의 지옥을 다스리는 왕이며, 군대를 거느린 바.
지옥에서 대악마와 싸운다는 건 수십 만 마물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길, 역대급으로 까다로운 상대였군.’
수천, 수만 단위를 넘어서는 수십 만 마물의 진격은 그리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다.
마르코시아스가 죽지 않고 버티는 사이 마르코시아스의 적을 할퀴고, 찢고, 먹어치우는 역할을 맡은 22개 군단의 마물들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리드를 덮쳐왔다.
“십만대군 학살검!”
무패왕.
살아생전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무적의 존재.
그의 초월적인 검술이 그리드의 손끝에서 빚어져 하늘을 갈랐다.
하늘을 가득 채웠던 마물 중 수천 마리가 일격에 양단되어 죽어버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천 마리의 마물조차 군단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드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범위에는 수십 만 마리의 마물이 여전히 건재하게 살아남아있었다.
날갯짓을 서두르며 가속해오는 놈들로부터 시선을 뗀 그리드가 이번엔 지상을 바라보았다.
땅을 가득 채운 마물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지평선 너머에선 더 많은 마물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죽지 않고 버티는 게 가능한 신체능력과 그 신체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군단 운용법.
과연 유라의 경고대로 마르코시아스는 강력한 존재였다.
그리드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설령 글런트의 평가대로 마르코시아스가 22위에 오를 실력자라고 가정할지라도 마르코시아스보다 강한 대악마가 최소 20마리는 존재한다는 뜻이다.
당장 이놈조차 없애지 못하는데 이놈보다 강한 다른 대악마들은 대체 무슨 수로 쓰러뜨려야하며, 대악마들의 정점에 있는 최종보스 바알은 또 어떻게 해치워야하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아니 뭔 빌어먹을 게임이 매번 산 넘어 산이야?’
아무리 성장하고 강해져봤자 할 수 있는 게 적으니 상실감마저 든다.
허탈해져 잠시 멍하니 있는 그리드의 곁으로 비취색 섬광이 스쳐지나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그리드의 정신이 번뜩 뜨였다.
마물의 군단에게 직격하자마자 폭발을 일으킨 섬광이 수백 마리의 마물을 잿더미로 산화시킨 까닭.
심지어 섬광은 계속해서 쏘아지고 있었다. 전장 곳곳으로 빗발치며 마물들을 청소해나갔다.
키에에엑!!
캬악!!
마물들의 비명이 메아리치는 와중에 귓속말이 들려왔다.
-피라미들은 제게 맡기고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세요.
유라였다.
끊임없이 몰려오는 마물의 군단을 보고 다소 흥분한 건지, 그녀의 말투는 평소와 달리 약간 거칠었다.
옛날의 기억이 떠오를 정도.
-핏빛 마녀님께서 부활하신 건가?
유라 덕분에 여유를 되찾은 그리드가 농담을 던지자 유라의 귀가 약간 붉게 달아올랐다.
핏빛 마녀라는 별명을 썩 좋아하진 않았던 눈치다.
콰앙! 콰앙!! 콰아앙!!
유라의 라이플이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미 그것은 저격이라는 행위와 동떨어져 있었다.
어디로 쏴도 표적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적의 숫자가 많았으니 유라는 조준 과정 자체를 생략해버렸다.
심지어 속사에 적합한 버프 스킬들과 스플래쉬 데미지를 일으키는 탄환을 사용 중인 그녀의 대량살상 행위는 무패왕의 검술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물론 이곳이 데빌 슬레이어를 강화시키는 지옥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결과였지만 어찌됐든 유라는 정말로 뛰어난 파트너였다.
헬가오전에서 활약했던 메르세데스만큼이나 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꼭 쓰러뜨려볼까.’
혼자선 레이드가 불가능한 상대라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둘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애초에 본진에 있는 대악마를 혼자서 해치우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양심 없는 욕심이었을 수도 있다.
의욕을 되찾은 그리드가 신격을 개방했다.
쿠오오오오오....
자신이라는 존재를 신에 근접한 수준으로 격상시킨다.
신격의 상세 정보에 담긴 내용이다.
강렬한 기파 속에서 머리카락을 흩날리기 시작한 그리드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천상의 신들과 나란히 앉아있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재력 개방.”
[신격의 영향으로 잠재력 개방 스킬의 캐스팅 시간과 재사용 대기 시간이 삭제됩니다.]
“용.”
[파그마의 검무 <용(龍)>이 일시적으로 그리드의 검무로 진화합니다.]
“검무 창조. 낙룡극살파(落龍極殺派).”
하늘 높이 떠오른 그리드가 자신을 덮쳐오는 마물들을 무시하고 춤사위를 펼쳤다. 굳이 그리드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그의 살갗을 찢으려드는 마물들의 발톱과 이빨은 모조리 유라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고 있었으니까.
-무의미하다는 걸 모르는가?
마르코시아스가 콧방귀 뀌었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푸른 용의 기세가 제법 매섭긴 했지만 자신은 이미 수백 겹이나 되는 석화 실드를 전신에 두른 상태.
조금 전 검무와 마찬가지로, 저 용의 진격 또한 실드에 가로막힐 것이다.
생각하던 마르코시아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콰창! 콰차차차차차차차차창!!
푸른 용이 수백 겹의 실드를 부수고, 또 부순 끝에 자신의 본체에 도달했기 때문.
락과 극, 살의 연계로 관통 효과가 극대화된 용의 위력이었다.
쩌저저저저정!!
그리드의 검이 마르코시아스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자 마르코시아스의 생명력과 실드량이 각각 2퍼센트, 20퍼센트 깎여나갔다.
“신격.”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잠재력개방과 낙룡극살파.
쩌저저저저저정!!
그리드의 검이 재차 마르코시아스의 몸을 꿰뚫고 지나가자 마르코시아스의 생명력과 실드량이 각각 2퍼센트, 25퍼센트 깎여나갔다.
이미 상당수의 실드가 형체를 잃은 까닭에 마르코시아스의 실드가 지닌 방어력이 약화된 것이다.
“신격.”
-그으....!
쩌저저저저저정!!
“신격.”
-....만!!
쩌저저저저저정!!
“크아아아아악!!”
급기야 모든 실드를 잃고 석화마저 풀린 마르코시아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키야아아아!!
유라가 쏘는 폭격을 간신히 피해 그리드와 유라의 목덜미를 깨물고, 심장에 발톱을 꽂아 넣기 시작했던 마물들이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29위 대악마 마르코시아스의 레이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리드는 13퍼센트의 생명력을 남기고 유라는 불사를 소모한 직후.
다른 그 어떤 레이드보다 길게 느껴졌던 마르코시아스 레이드가 끝났다.
쿠웅!
레벨 업을 상징하는 빛의 기둥이 그리드를 4번, 유라를 1번 감싼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마주 본 두 사람이 웃으며 주먹을 마주쳤다.